[박종언의 만남-길을 묻다] 유동현, “정신장애인도 국민…정신장애인 혐오 여론 방조하는 건 국가 책임”
[박종언의 만남-길을 묻다] 유동현, “정신장애인도 국민…정신장애인 혐오 여론 방조하는 건 국가 책임”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8.07.12 23: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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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현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인터뷰
중1 때 찾아온 조울증, 깊은 절망의 청춘 보내
우연히 가입한 한울센터에서 정신장애인운동 만나
옷장 하나, 옷걸이 하나로 시작한 자립생활센터
2017년 정신장애인 조직으로는 최초로 서울시 지원받아
‘더 느리게, 더 낮게, 더 가깝게’가 센터 슬로건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자기 집에 살면서 복지 지원받아야
국가가 정신장애인 인권 위해 사회적 지침 만들어야

꿈 많던 14살, 중학교 1학년 때 조울증이 찾아왔다. 초등학교 5학년때 전조는 있었지만 병이 폭발한 건 중학교 때였다. 학교에서 그의 말대로 ‘난동’을 부렸고 정신과 약을 먹기 시작했다. 10대에 그가 마주한 것은 꿈이 아니라 깊은 절망이었다. 중학교 2학년에 처음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다. 그리고 퇴원.

고등학교를 마치고 전문대 컴퓨터공학과에 들어가 학업을 이어갔다. 그때 마음에 둔 사랑하는 사람에게 호감을 표시했다가 거부당했다. 주변의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두려웠다. 손목을 자해했다. 다시 입원. 학창 시절, 그리고 성인이 된 이후에 모두 다섯 번의 입원을 했다. 그 중 네 번이 강제입원이었다.

20대 초반. 극심한 조울증이 찾아오고 삶은 버거워졌다. 그는 정신과에서 타온 약 30일치를 한꺼번에 먹고 자살을 기도한다. 병원에 실려갔고 바로 위 세척을 했다.

삶은 어디까지가 고통이고 어디까지가 행복일까. 그는 질문했다. 20대 초반, 시든 꽃처럼 흔들리던 시절, 서울 도봉구 자신이 다니던 센터의 복지사가 한울정신건강복지센터를 소개해줬다. 대기자가 있어 조금 기다리다가 회원이 됐다. 거기에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같은 정신장애를 가졌지만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집에서만 지내는 이들을 찾아나가 지지해주는 일도 했다.

어느 날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라는 곳에서 자신에게 ‘오퍼’가 들어왔다. “같이 합시다.”

직원은 그를 합해 네 명이었다. 그냥 뛰어들었다. 그곳에서 정신장애인 당사자 옹호 운동을 그는 배웠다. 사업을 하고 행사를 추진했다. 그때가 2012년. 아무도 그 센터를 도와주지 않았다. 회원 100여 명의 작은 후원과 일부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거둬 센터의 운영을 도왔지만 늘 돈이 빠듯했다. 센터 운영진들은 무보수로 센터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도 그렇게 살았다.

그가 몸담은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2012년 12월 개소했다. 서울 봉천동 가파른 언덕길 어느 한 곳에 ‘아지트’를 마련했다. 한 5평 정도의 공간이었다. 컴퓨터 하나, 옷장 하나, 책상이 전부인 공간이었다.

당시만 해도 정신장애인자립센터는 하나의 친목단체였다. 국가는 도와주지 않았다. 서울시에만 정신장애인을 제외한 여타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40여 개가 넘었지만 서울시는 정신장애인센터를 외면했다. 장애인복지법 15조에 따르면 정신장애인은 장애인복지센터 이용이 제한된다. 출입금지다. 이 법에는 정신장애인이 센터 등록 금지를 법적으로 명문화하고 있다. 길이 있을까 싶었다.

그러던 2017년 7월 센터는 지방자체단체로는 처음으로 서울시가 시행하는 ‘정신장애 당사자가 주도하는 자립생활 프로그램’ 사업의 운영주체로 선정됐다. 한국 정신장애인 운동 역사상 최초의 공식적 센터가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당시 서울시와 이 센터가 맺은 협약서의 골자는 정신장애인 법령 개정, 모니터링, 자문 등 상호협조였다. 그 협약서의 대표 문는 ‘있는 그대로 괜찮아’였다.

그리고 이 센터 첫 출발부터 함께했던 그는 이제 센터장이 됐다. 청춘의 시절, 입퇴원을 반복하다 센터에서 운동을 배우고 정신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의 중요성을 배운 그 사람, 유동현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한정자) 소장을 만나 저간의 사정들을 들어봤다.

현재 센터는 두 차례의 이사를 거쳐 서울 관악구 봉천로 27길10번길에 자리를 잡았다. 8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 다음은 일문 일답.

유동현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마인드포스트.
유동현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마인드포스트.

인터뷰

-대표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유동현이라고 합니다. 올해 처음으로 1월에 선출이 돼서 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지금 나이가 29살입니까?

“네 맞습니다. 아직 서른이 안 됐습니다, 만으로는”

-개인 소개 조금 더 해 주시죠.

“저는 초등학교 5학년쯤에 조울증 증세가 보여서 중학교 1학년 2학기 때 학교 정학을 먹으면서 그때부터 약을 먹기 시작했고요. 최근에 세 번의 입원을 했고,”

-최근에요?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성인이 된 후에는 세 번의 입원을 했고요. 어렸을 때는 두 번 입원을 했고. 각각 입원할 때마다 30~40일정도. 길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거의 대부분 강제입원이었습니까?

“거의 강제 입원이었는데 마지막 입원은 자의입원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일단 저는 조울증 일형이라서 기복이 좀 심한 편입니다. ‘

-조울증 뭐라고요?

“일형”

-일형?

“조울증이라는 게 일형과 이형과 순환성 기분장애, 반복성 우울장애 이렇게 이런 네 종류가 있는데 일형은 약간 경미한 경조증이, 이형은 경조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고 증상이 (그렇게 나옵니다). 근데 일형은 왔다갔다하는 기분 폭이 심합니다. 그래서 심할 때는 하루가 좋았다가 하루 끝이 갑자기 기분이 많이 안 좋아져서 급하게 급성기가 오거나 하루 사이에도, 심할 때는 그렇게 되고. 저도 그렇게 겪었다가 전문대학을 어찌어찌 졸업해가지고, 그러자마자 제가 취업하기는 어려우니까 그 상황에서, 바로 사회복귀시설, 정신재활시설을 이용하게 됐고요”

-어딥니까?

“한울지역정신건강센터. 그게 2011년 2월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찾다가 찾다가 이제 이곳으로?

“네. 그전에는 제가 서울 성북구에 살았는데 그 당시 정신건강증진센터 사례 담당자분이 이용하고 있는 담당자분이 ‘여기가 좋겠다. 한울지역정신건강센터가 좋을 거 같다. 이용하시게’라고 해서.

어린 시절부터 조울증으로 다섯 번 입원

-2011년?

“네 2011년. 그래 가지고 먼저 2010년 초에 의뢰를 해서 센터에 대기를 하다가 대기 끝나고 이용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인연이 맺어졌네요?

“네”

-한정자 잠깐 소개 좀 해주시죠.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당사자와 비당사자의 경계 없이 정신장애인이 지역사회에 자립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하나의 비영리단체, 운동단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2012년도에 개소한 걸로 알고 있는데.

“네 2012년 12월 28일. 그때 당시 사업자번호를 받고.”

-아, 사업자 등록을 하고?

“네. 12월 28일 사업자등록을 하고 정식으로 시작했는데요. 그때 당시에는 처음 소장님이신 김락우 대표님이 혼자서 사무실을 꾸려서 하고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같이가는길’이라는 모임 명칭으로 해서 그 사무실 공간을 썼고요. 그 사무실 공간이 굉장히 협소했습니다. 해봤자 5평 정도.”

-그 언덕길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한울지역정신건강센터 앞 쪽에 있었던. 봉천역 3번 출구 쭉 올라오는 언덕길에요.”

-그때 옷걸이 하나, 옷 하나 이렇게 놓고 시작했다고?

“네 맞습니다. 김락우 대표님이 옷장 하나 옷걸이 하나, 소파 얻은 걸로. 책상도 의자도 후원받아가지고.”

-어떻게 처음에 그쪽으로 들어가시게 된 거에요?

“제가 2013년 말에, 그전엔 제가 센터에서 동료상담활동가로 일을 했어요. 당사자 동료상담 활동가로 활동하다가 그게 사업이 종료되고 그냥 몇 개월 정도 있다가, 1년 정도 뒤에 김락우 대표님이 저한테 같이 해볼 생각 없냐 해서.”

-그때가 몇 년도죠?

“2013년 10월에 저한테 얘기를 했습니다. 같이 활동할 생각이 없냐고. 제가 관심 있다 얘기해서 2014년 2월부터 활동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때 몇 분 정도 같이 일했습니까?

“그때는 총 네 명이서 일했습니다. 저, 김락우 대표, 이혜정 선생님이라고 당사자 회계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신석철 선생님.”

-지금 한자생 비영리단체로 돼 있죠?

“네 비영리단체로 등록이 돼 있습니다.”

우연히 가입한 한울센터에서 당사자운동 알게 돼

-수익을 낼 수는 없는 겁니까?

“네 2016년 4월 말에 서울시 비영리단체 민간단체 등록이 돼 있어서. 그래서 수익사업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걸 어떻게 꾸려가고 있는 건가요?

“그래서 저희가 등록을 받고 나서 2016년 7월에 서울시 지원사업, 정신장애인 자립생활 주도 프로그램 지원사업에 신청해서 사업비를 받아서 그걸로.”

-사업비가 1억 정도 되신다고?

“2016년 7월부터 시작한 거는 그때 12월에 종료됐어요. 그때 (지원금이) 5천만 원이었어요.”

-충분했던가요, 그게?

“네. 그 안에서 각 활동가들의 활동 인건비를 치지 않고 활동 품위 유지비 그런 것으로 최소한의, 최저임금도 안 되는 금액으로 활동했는데요. 첫 시작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충분하지 않았지만 의미를 두고 있죠.”

-그럼 한정자 봉천동 언덕길 거기 처음 개소하고 이사 몇 번 했어요?

“이사 2번 했습니다.”

-거기서 또 어디로 갔어요?

“한 번은 보일러실 느낌의 분위기가 (났어요). 안쪽에 거기가 사무실로 쓸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동(洞)으로 갔었죠?

“똑같은 데입니다. 바로 위쪽 건물이었으니까. 거기로는 사무실 용도로 쓸 수 없어서 사업비를 줄 수 없다, 얘기를 해가지고 저희가 옮기게 됐습니다.”

-사무실 그게 용도가 안 된다고요? 서울시에서?

“네”

-그래서 이쪽으로 옮기신 겁니까?

“네, 지금 현재 사무실로.”

-회원이 몇 분 정도 되십니까?

“백 명이 좀 넘습니다.”

-그분들 다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입니까?

“일부는요. 비율로 따지면 20~30명은 비장애인이고 가족 분도 계시고 관련 기관 종사자들 분들도 계시고요. 저희가 협약 맺으신 분들이나 관련 기관의 센터장님도 계시고.”

-그분들 그럼 운영비 한 달에 얼마씩 내는 거예요?

“그분들께서는 연회비가 이제 있거든요. 연회비 만 원으로. 회비 통장을 따고 계좌를 만들어서 거기 안에서.”

2017년 최초로 서울시 지원 받아

-잘 내고 있습니까?

“한 20% 정도요 (웃음).”

-그럼 직원은 지금 몇 분이세요?

“지금 현재 8명입니다.”

-다 정신장애인 아니죠? 한 분은 비 정신장애인?

“아니요. 비당사자분이 세 분이 계시고.”

-그럼 정신장애인이 다섯 명?

“네. 저를 포함해서 다섯 명.”

-이 분들 페이(급여)는 어떻게 합니까?

“네 서울시 사업비에서 활동비를 받거든요. 저희 운영비에서 받지 못하고, 운영자금이 적어가지고.”

-그런데 서울시에서 올 때는 그 운영비를 페이로 주라고 말을 하지는 않죠?

“네.”

-이건 불법은 아닌 거죠?

“네. 사업비 안에서 활동비를 받아서.”

-일억 원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네”

-최근 6월에 비정신장애인을 채용한다고 공고가 났더라고요.

“네 그래서 채용을 했습니다.”

-특별히 비정신장애인을 채용한 이유가 있습니까?

“저희가 사업을 진행하다보니까 중간 중간에 큰 단위의 사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토론회나 성과보고회 같은 큰 단위 사업을 당사자 활동가 두 명이 전적으로 일임해서 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요. 왜냐면 사업을 진행하면서 그 활동가들도 자기 맡은 사업이 있기 때문에 따로 중간의 큰 단위 사업을 진행하기 어려워서 저희가 비당사자 활동가를 임시로 채용했습니다.”

-회계 쪽으로 일하십니까?

“어떻게 보면 회계 부분도 커버하고, 진행 회의나 이런 것들도 지원하고 당사자 활동하고.”

-경력이 좀 되던가요?

“최근에 학교를 졸업했고 사회복지학과. 그리고 관련해서 인턴 생활도 했고 자격증도 많이 따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시 여쭤보겠습니다. 급여는 어떻게 지급되고 있습니까?

“월 52만원. 세금 떼고. 또 저희가 오천 원을 상조회비로 각자 우리의 경조사를 위해서 공동으로 상조 회비 계좌가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오천 원씩?

“저희가 3만 원을, 후원 조성을 위해서 저희 각자 활동가들이 3만 원을 그 안에서 지출하고 있습니다.”

©마인드포스트.
©마인드포스트.

-지난 2016년 6월에 한정자에서 서울시 사업운영 주체로 선정됐습니다. 그때하고 특별히 나아진 부분이 있습니까, 지원금 같은 게?

“일단 연도별로 지원금이 달랐습니다. 2016년 하반기였기 때문에 딱 일억의 반인 오천만 원만 지원해 줬고요, 2017년에는 1억. 올해도 1억 단위로 1억으로 사업을 하고 있고 그에 따른 사업 기간도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니까 2016년 하반기는 6개월 단위였는데 작년 2017년은 11개월, 올해는 9개월. 사업 기간이. 왜 그러냐 했더니 저희가 결과 보고서 내고 서울시 사정상 사업공고 내는 게 너무 늦어졌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저희가 사업단위가 9개월. 근데 그 안에서 1억 원을 써야 되는 상황입니다.”

지원금 1억 받는 공식 정신장애센터로 발전

-그럼 9개월 되면 더 좋지 않아요? 11개월보다?

“네 그렇게 볼 수 있는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기준이 되는 금액이기 때문에, 기준에 대한 금액이 넘으면 어차피 시에서 환수조치를 할 거라서 저희가 예산 부분에서 활용하는 게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2016년 8월에 공익법센터하고 업무협약 맺었습니다. 그래서 한자생이 서울시 지원을 받으면서 이루어지고. 지금 공익법센터와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저희가 큰 행사할 때마다, 토론회나 행사 때 후원 물품을 지원받고 있습니다.”

-어떤 물품을 받습니까?

“저희가 물품을 지정을 해서 구입하고 요청 드리면 거기서 결제를 해주시는 걸로.”

-무슨 선물을 주는 거예요?

“기념품 형태일 수도 잇고. 토론회를 준비하기 위한 필요한 다과나 이런 것도 (있고요).”

-법적인 문제들이 있으면 같이 논의하고 합니까?

“아, 그럼요. 당연히 저희가 연락을 드리고 저희 센터 차원에서 자문을 드리는 것도 있습니다.”

-최근에 무슨 자문받은 게 있습니까?

“최근 자문은 저희 활동가가 수급비 관련해서 활동비를 받고 나서 수급비가 차감이 되다 보니까 거기에 대한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났죠. 그 활동가는 개인적 피해가 가서 그것에 대해서 문의를 드린 게 있습니다.”

-그 문제는 해결됐습니까?

“해결이 안 됐습니다.”

-그대로 차감되고?

“네 어찌어찌 그렇게. 그 활동가는 개인적으로 어렵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한자생 슬로건이 ‘더 느리게, 더 낮게, 더 가깝게’인데요.

“네 그거는 작년에 성과보고회 때 표어를 만들었거든요. 그게 평창 올림픽 때의 ‘더 멀리, 더 높이, 더 빠르게’라는 표어를 저희가 차용해서 반대로 해 봤는데요. 이게 어떻게 보면 느림의 미학이라고 표현을 했던 것 같습니다. 더 가깝게는 더 자세히, 옆에서 더 지켜보겠다 우리 당사자분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가고 정신장애인 당사자의 속도에 맞추겠다. 더 느리게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게 속도에 맞추겠다는 의미거든요. 비당사자들의 기존의 속도를 맞추는 게 아니라 우리의 속도에 맞춰서 활동하겠다, 추진하겠다 그런 것들.”

-작년에 만들어진 겁니까?

“네.”

-발달장애인 자립센터 계속 늘고 있죠? 몇 개쯤 됩니까?

“아뇨.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늘고는 있죠?

“네”

-정신장애인을 위한 공식 센터가 한정자 여기 하나뿐이거든요. 다른 지역에 혹시 한정자와 같은 조직을 만들려는 비슷한 움직임 같은 건 없습니까?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딱 저희 형태라기보다도 뭔가 자조모임 안에서도 일어나는 움직임이 있는데 그게 부산 모임이 있고, 또 가족 분들 중심으로 대전에, 전남 쪽에 가족 분들 하려고 추진하고 있어요. 청주 쪽, 청주 쪽에도. 근데 그 정도가 뭔가 적극적이라기보다는 아직 준비 단계로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그 부분들, 그 쪽에서 이런 저런 문제들 있으면 연락 오고 조언 받고 합니까?

“자주 연락은 오지 않습니다.”

‘더 느리게, 더 낮게, 더 가깝게’...느림의 미학

-예의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네요 지금?

“어느 정도 그냥 저희가 들어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자세히 듣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준비 단계네요, 그 부분은?

“네.”

-장애인복지법 15조가 정신장애인들 복지는 포함되지 않는 건데, 이 한정자의 의미가 이에 대한 대항적 의미라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대항적이라는 의미보다도 이거를 변화시켜야겠다는 의미로 생각합니다. 이거를 대항한다는 의미보다는 이거의 개선을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장애인복지법 15조가 폐지 수순을 밟아야 되는 건 맞지만 그 후의 대안이 없다면 폐지해 봤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안을 위해서 우리는 활동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럼 폐지가 되면 의미가 없다고 하는데 그건 무슨 의미입니까?

“폐지가 되고 그 후의 대안의 없다면 의미가 없다고 얘기 드린 거고요.”

-대안이 없다는 건 무슨 말씀입니까?

“현재 장애인복지법 15조 안에서 (정신장애인이) 그 적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나중에 장애인복지법 15조 안에서 적용을 받게 되면 그 안에 여타 장애인 영역처럼 혜택을 받을 수 있냐?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만큼 재원이 들어가냐? 그렇지 않다면 폐지만 됐지 법은 효력은 발생하지만 실효적인 게 없거든요. 그런 수순으로 간다면 뭔가 명목상으로만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장애인복지법 15조 폐지해야 된다,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까?

“그렇지만 법에 명시만 돼 있지 이게 뭔가 그 후의 대안이, 정신장애 당사자들이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기본적인 실효성 있는.”

-새로운 법을 만들어야 된다? 장애인복지법을 대체하는 어떤 법을 만들어야 된다는 말씀입니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장애인복지법을 대체할 수 있는 법이 아니라 일단 그 안에서 폐지를 하되 현재의 법에 있어서 법 개정이 다시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

“네”

-그 안에서 정신장애인도 들어가야 된다?

“네.”

-일본의 ‘베델의집’ 아시죠? 그쪽하고 한정자하고 비교해보면 어떻습니까? (일본 삿포로 우라카와 마을에 있는 ‘베델의집’은 정신장애인들 당사자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룬 지역이다. 해마다 3천여 명의 관광객이 이 곳을 다녀갈 정도로 정신장애인 공동체 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편집자 주)

“일본 베델의집은 하나의 지역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공동체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어떻게 보면 자급자족이 되고 그 안에서 활동 반경이 넓지만 그 안에서 고민하는 것은 그 안에서만 고민이 해결되고 어떻게 보면 맴돈다는 거.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그럼으로써 지역사회도 발전하고 지역의 이미지는 좋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부분이 굉장히 긍정적인 효과가 있고 파워도 크죠. 하지만 저희 한정자는 거기와는 다르게 도심지 내에서 있는 단체이기도 하고 공간이기 때문에 뭔가 거기보다는 결속력라든가 친목적 그런 것들이 약하다고 봅니다.”

-베델의집보다 약하다?

“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저희가 추구하는 가치가 저희 안에서만 잘 되는 것이 아닌 한국 안에서의 정신장애인 당사자분들이 지역사회, 내가 내 집에서 살 수 있는, 그리고 살면서 내가 누릴 수 있는 복지를 얻을 수 있으려면 저희 단체의 활동이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올해 사업은 어떤 것들이 있었습니까?

“저희가 기본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일반 신체장애인 자립생활센터처럼 활동보조인 개념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것이 동료상담 사업입니다. 동료상담사업이라는 거는 회복된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집에 있는 어려운 당사자들을 방문해서 상담을 하고 외부 활동 같이 하고 같이 친구가 되고.”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지역에서 복지를 지원받아야

-그게 한정자 사업 안에?

“네.”

-그걸 올해 끝까지?

“네 올해 하고 있습니다.”

-지금 몇 명 정도 하고 있습니까?

“지금 활동가분들은 아홉 분 되고 이용자들은 스무 명이 좀 안 됩니다. 활동 건수는 월 80건이 못 미칩니다.”

-80건이면 여덟 명이 거기를 가서 만나는 것 모두 다 합해서 80번?

“네”

-그 정도면 양호한 건가요?

“어떻게 보면 예산을 쓰려면 그 정도는 충분한 거죠.”

-어느 정도 페이를 그분들한테 주고?

“네 활동비로.”

-경기도 하남시에 정신장애인 지원 및 자립촉진 등에 관한 조례가 있더라고요.

“네 저도 봤습니다.”

-서울시는 이런 조례가 없죠?

“네. 안 나와 있습니다.”

-그 조례 보고 어떤 느낌이 들었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는 시(市)에서는, 저희가 시에서 (지원을) 받고 있지만 과연 서울시나 다른 광역단체가 그만큼 정신장애인 이슈에 대해서 의지를 갖고 있나 하는 물음표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나마 한 곳이라도 조례를 만들었다는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보거든요. 그러니까 전혀 없는 게 문제지 그나마 한 곳이라도 사례가 있다면 그걸 활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것도 있죠. 서울시에서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눈치를 봐야 하는 점은 있죠?

“네 그런 점이 (있습니다).”

-어떤 눈치를 봐야 합니까, 서울시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희가 활동을 하면서 기자회견이나 집회 같은 것들을 많이 줄였습니다.”

-왜 줄였습니까?

“일단 사업 진행에 있어서 사업이 원활하게 가야 된다는 그걸 우선순위로 두다보니까, 어떻게 보면 저희가 가치에 있어서 먼저 우선순위를 두고 있고 그런 당사자 옹호라는 현안들에 있어서 대응을 좀 뒤로 미루는 건 아닌가 합니다.”

-자기 검열을 해 버리는 거네요?

“네 그렇습니다.”

-어떻습니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웃음). 근데 그만큼 요즘 언론에서 워낙 이슈가 많이 터지다보니까 하나하나에 대응하기가 솔직히 어렵습니다.”

-최근 경북 영양에서 조현병 당사자가 흉기로 경찰을 살해한 사건이 있고 또 치료감호 받는 정신장애인이 폐쇄병동에서 탈출했다가 잡히고. 조현병과 관련해서 중앙일간지들이 다 조현병 위험하다 얘기하고 있거든요. 지금 이걸 어떻게 보십니까?

“저 개인적으로 국가에서 보도지침을 마련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건 시 자체 내에서 혹은 지역 도에서 지침 마련하는 걸로는, 의지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부 중앙지침이 있어야 합니다. 왜 그러냐면 어떻게 보면 국가는 국민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데 국민을 지켜야 하는 의무는 모든 국민을 지칭한다고 봅니다. 근데 그 모든 국민은 정신장애인, 비정신장애인이든 장애 당사자이든 비장애 당사자이든 모두가 속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국민 내에서 장애로 인해서 격리를 해야 되는 여론의 분위기, 그런 것들에 있어서 방조한 국가가 과연 옳은 국가 개념을 갖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듭니다.”

-지침 말씀하셨는데 예를 들면 어떤 지침 말씀하시는 겁니까?

“일단 조현병이 의심이 든다는 표현을 얘기하는 것보다는 이런저런 상황이 있고 그런 일이 발생했다. 그럼 경찰은 관련해서 (정신질환) 의심이 된다는 표현보다는 ‘다른 별도의 사항이 있는지 조사할 예정이다’라고만 표현을 썼으면 좋겠어요. 꼭 집어서 정신병력이 있거나 조현병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추정을 해서 기사를 낸다는 자체가 그 자체만으로도 사회 분위기나 사회적 혐오를 조장하는 거라고 봅니다.”

정신장애인 격리 분위기를 방조하는 건 국가 책임

-언론 지침도 좀 필요하지 않습니까?

“네 맞습니다.”

-앞으로 직원은 늘릴 계획은 있습니까?

“당장은 없습니다.”

-내년에도 사업비 받을 수 있을 거죠, 서울시에서?

“그거는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웃음). 저희가 올해도 잘하고 잘 마무리하고 잘 넘긴다면 그렇다면 기대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표님 생각 한 번 물어볼게요. 정신장애 복지 수준이 타 장애에 비해서 굉장히 열악하거든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전에는 장애 운동 영역에 정신장애 당사자들이 없었고 정신장애 당사자들은 병원과 시설과 센터에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낄 겨를도 여유도 모임도 없었죠. 그런 부분을 지금에서나마 추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그 전에는 병원과 시설과 센터 그리고 가족 품 안에서, 가족 아니면 지역사회에서 방치되는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지금에서야 우리나라가 인권에 대한 관심을, 인권감수성이라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가 되니까 지금에서야 얘기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제 첫 발자국을 뗐다?

“얼마 안 됐죠.”

 

©마인드포스트.
©마인드포스트.

-향후 계획은 어떻습니까? 준비하는 사업은 또 있습니까?

“아뇨. 일단 저희는 지금 현재 사업에 충실하고 저희가 하고 있는 니나내나 한국장애인재단사업도 (있고요).”

-그건 또 뭡니까?

“니나내나 사업은 소수의 당사자분들을 섭외해서 인디밴드와 협의해서 그들이 작은 소극장에서 콘서트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입니다.”

-올해도 하시는 겁니까?

“올해도 하고 있습니다.”

-그게 3회째인가요?

“네 3회째입니다.”

-그거 말고 다른 사업은 특별하게 준비하고 있는 것은?

“특별히는 아직.”

-지금은 특별하게 없다. 앞으로 바라는 게 있으면 대표님 한 말씀 해주시죠.

“우리나라의 많은 정신장애 당사자들이 장애등록을 하지 않은 수가 많습니다. 거기에 대한 장애등록 인구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장애를 겪고 있는 당사자들의 복지와 관련해서 좀 더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지 않나. 거기에 대한 복지서비스가 시행이 돼야 된다고 봅니다. 실제로는 주거 문제가 가장 크고 마지막으로 가서는 직업을 구하는 것 외에도 직업 유지의 문제도 크게 있다고 봅니다. 그런 것들을 위해서 저희는 적극적으로 옹호할 수 있는 단체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개인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정신장애를 겪으면서 여러분들이 절대로 내가 헛살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정신장애를 겪으면서 내가 헛살고 있지 않다라는 것들을 모두가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렇게 정리를 할게요. 대표님 같은 경우는 중학교 때 발병하고 그 동안에 다섯 번 입원하고 그러면서 어느 날, 그때가 나이가 23살 정도 됐겠네요. 이쪽 센터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왔다가 인연이 닿아 갖고 정신장애인 운동을 만났단 말이에요. 만나면서 여기까지 왔단 말이에요. 그리고 치유의 길을 만났고 여타 정신장애인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일을 하고 있게 됐다는 걸로 제가 이해를 하겠습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았다는 것. 지금도 대표님으로 열심히 하고 있다는 부분 알겠고요.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유 소장은 인터뷰가 끝나자 “물 한 잔 드시고 가세요”라고 권유했다. 기자는 환각에 취한 듯 그 센터 사무실을 천천히 걸어나왔다. 치유도 이렇게 천천히 완성되는 것일까. 이 센터 슬로건 '더 느리게'처럼. 햇살이 눈이 아프게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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