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존엄을 훼손하는 정신병원 내 강박과 격리 지침을 당장 폐지하라”
“인간 존엄을 훼손하는 정신병원 내 강박과 격리 지침을 당장 폐지하라”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1.02.17 22: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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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위의 ‘격리 및 강박 지침 권고’에 대한 마인드포스트의 입장

#1. “정신병원에 입원 중 격리실에 수용됐는데 통풍이 안 되는 등 환경이 좋지 않았고 장시간 강박을 당한 상태로 있었다” (김모 씨, 53세, 2004년 입원 정신병원 상대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

#2. “정신병원에 입원 중 장시간 강박을 당한 채 격리돼 있는 등 인권을 침해당했다” (심모 씨, 40세, 2004년 해당 정신병원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3. “3일 이상 강박 조치로 대형 기저귀를 채워놓은 채 소변조차 마음대로 보지 못하게 하며 환자들을 부당하게 입원 조치하는 사례에 대해 조사를 원한다” (김모 씨, 여성, 34세, 2005년 국가인권위위원회에 진정)

#4. “자의입원하러 갔는데도 강제입원시키고 입원 당시부터 강박을 시키고 부작용이 심한 약을 강제로 투약해 고통을 겪었다” (박모 씨, 40세, 2007년 해당 병원장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

#5. “임신 5주차에 A정신과의원에 입원하게 되어 임신 사실을 알리고 기형아 출산이 우려돼 약물 복용을 거부했더니 27일간 격리실에 강박하고 약물 복용을 강요했다. 강박 중에는 기저귀를 통해 대소변을 해결하도록 했으며 결국 약물을 복용한 후에야 풀려났다” (이모 씨, 여성, 41세, 2012년 해당 병원 상대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

#6. “정신병원에서 환자를 포승줄로 묶는데 그 방법이 잔인하다. 우선 발을 묶고 손을 최대한 침대의 아래쪽으로 꺾어서 묶는다. 피가 안 통할 정도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어깨 뒤로 포승줄을 돌려 양손의 겨드랑이를 통과한 줄로 가슴조차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는다” (김모 씨, 2013년 국민권익위원회에 진정)

#7. 알코올의존증 27세 청년이 정신병원 입원 후 강박 35시간 만에 사망 (2016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

#8. “정신적으로 질환이 있는 환자들이기 때문에 약물로, 통제로, 명령으로, 협박으로, 말도 되지 않는 변명으로 치료 중인가. 많은 입원 환자들이 간호사와 보호사가 오히려 화를 돋구고 기다렸다는 듯이 1인실 침대에 손을 묶어 가두는 일을 빈번하게 겪었다고 들었다” (김모 씨, 여성, 2018년 청와대국민청원게시판)

#9. “의료진들에게 발길질과 욕설을 했다는 이유로 신체가 묶이는 강박을 당했다. 장기간 강박 조치로 팔목과 발목에 상처를 입었지만 병원 측은 강박과 격리 조치를 풀지 않았다” (A씨,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

몇 가지의 예를 더 들어보려다가 여기서 멈춘다. 17일 국가인권위원회는 “정신과 전문의 대면 없이 과도하게 ‘필요시 강박’ 처방을 하는 것은 환자의 신체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할 소지가 있다고 판단해 해당 정신병원에 강박 지시 관행을 개선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고 밝혔다.

문제는 인간의 자유로운 신체를 왜 포승줄로 묶느냐에 있다. 보건복지부는 정신병원의 ‘격리 및 강박 지침’(강박 지침)의 존재 이유를 “입원환자의 치료를 위해 불가피하다고 판단될 경우”라고 규정하고 있다. 누가 이 시대착오적이고 정신 역사의 유물에 포함돼야 할 강박과 구속을 현재의 시대로 이끌어왔는가. 의료권력인가? 아니면 비정상적이고 비이성적인 신체가 자유롭게 사회로 돌아다니는 것을 불편해하는 국가권력인가.

아무튼 좋다. 중요한 건 정신장애인이 정신병원이라는 폭압적 공간으로 들어가면 개인은 의료권력의 하위에 위치한 폭력성과 마주하게 된다는 점이다. 저항은 이 경우 억압을 더 강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바로 강박이다.

사람이 사람을 묶을 수 있는 것은 그가 범죄를 저질렀거나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탈된 행위를 했을 때 법이 개입해 그에게 실시하는 법률적 개념이다. 포승줄이든 수갑이든 개인의 사회생태계를 위협하는 경우에 대항에 국가가 신체의 자유를 뺏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정신장애인은 죄인인가. 사회적으로 어떤 불법을 저지른 존재들인가. 아니다. 그런데 왜 유독 정신장애인에 대해서만은 국가권력이 정신병원의 임의적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는 부분을 묵인하고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물론 보건복지부는 정신건강복지법 75조를 근거로, 강박 지침을 이유로 민간병원에 통제의 권한을 일부 이양했다고 말할 것이다.

정신건강복지법 75조는 정신병원장이 “치료 또는 보호의 목적으로” 묶는 등의 신체적 제한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강박 지침에는 “치료 또는 보호의 목적으로”로 역시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지침의 절차에는 “자·타해의 위험 가능성이 뚜렷하게 높을 때”라는 조건까지 두고 있다.

앞부분에 열거한 다양한 강박의 ‘증언’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정신병원은 본질적으로 폭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학대와 고문, 배제와 차별, 폭압과 질서, 신체의 복종을 근거로 정신병원은 작동해 왔다. 정신병원의 인력으로 다수의 정신장애인들에 ‘질서’라는 서사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병원 치료인력의 육체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 경우 제도가 개입하게 된다. 소리치지 말 것, 이상한 행동하지 말 것, 욕하지 말 것, 의료진에 대항하지 말 것, 명령에 복종할 것. 이 제도적 규율을 따르지 않을 경우 병원이라는 권력은 즉각적으로 당사자의 육체를 감금해 버린다.

기자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2009년. 그나마 정신병원 중에서 인권친화적 병원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던 그 병원에서 강박을 당한 적이 있었다. 기자는 어떤 부분이 궁금해서 간호실 간호사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그 간호사는 화가 난다는 이유로 남성 보호사들을 호출기로 불렀다. 이윽고 나타난 그들은 기자에게 변론의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격리실로 데려가 침대에 묶어 버렸다. 그들은 무릎으로 내 목을 누르고 “앞으로 서로 조심하자”는 말을 남기고 격리실 문을 닫아버렸다. 약물 주사를 놓은 때문인지 기자는 그 이후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룻동안의 강박에서 풀려난 기자는 그 간호사에게 가서 말했다. “나는 질문을 했을 뿐인데 왜 강박을 당해야 했느냐”고. 간호사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정신장애인은 그 장애 속성상 ‘혐오’와 ‘공포’라는 의미로 분류된다. 휠체어를 타는 신체장애인에 대해 우리가 두려움을 가지지 않지만 정신장애인은 의심과 불안, 공포의 표상이 된다.

당대의 사회가 ‘위험한’ 정신질환자를 정신병원과 같은 폭력의 공간으로 보내 사회와의 소통을 차단해 버리는 것은 지배권력과 국가의 의지이기도 하지만 더 심층에는 이를 용인하고 동의하는 사회의 집단적 의지가 녹아 있다고 봐야 한다.

지금 제3세계와 아프리카에서 정신장애인을 쇠사슬로 묶어 놓고 있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정신장애에 대해 가지는 무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된다. 우리 역시 농경사회에서 정신장애인은 집안에 가둠을 당하는 존재들이었다. 이후 병원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집안이 가둬진 정신장애인들이 집단적으로 병원으로 존재를 이전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 속성과 본질은 하나다. 격리하고 배제하는 것.

범죄를 저질러 형무소에 들어간 수형자들은 교도소의 권력에 순응하는 몸을 강압적으로 갖게 된다. 질서에 위배될 경우 이들은 징벌방으로 가거나 구속복이 채워져 독방에 가둬진다. 따라서 벤담이 말한 ‘팬 옵티콘’의 시선 아래서 권력에 복종하는 신체로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왜 죄수에게 신체를 강박하느냐고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대다수는 그 결정에 개입하지 않고 싶을 것이다. 왜냐하면 죄수들은 위험하고 무서운 존재들이니까.

정신장애인으로 돌아와 보자. 단지 병원 권력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온몸을 강박해 버리는 것에 대해서 사회는 어떤 질문을 던진 적이 있을까.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이니까. 죄수에 대해서 가지는 위험성과 두려움은 정신장애인에게 가지는 시선과 본질적으로 같다.

17세기 프랑스 구빈원에 수용된 집시와 광인, 죄수, 부랑자 등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노동 윤리에 부적합한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자본의 영토가 국가 전체로 확장되면서 이들 역시 노동자로 편입시켜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때 집시와 부랑자 들은 자본주의 체계로 분류돼 구빈원 등을 나오게 된다. 그런데 나오지 못했던 두 부류가 있다. 바로 죄수와 광인(정신장애인)이다. 그 이유는 바로 ‘두려움’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그 ‘두려움’이라는 표상은 본질상 역사를 관통해오면서 변함 없는 억압의 기제로 작동했으며 이 두려움이라는 공포는 ‘우리’와 다른 타자적 존재들에 대한 자비심 없는 즉각적 체포와 구금, 강박으로 이어지게 된다. 어쩌면 이는 시민의 집단적 무의식의 소망일 수도 있다.

헌법이 보장하는 신체의 자유와 행복추구권은 정신장애인의 삶에는 적용되지 않아 왔다. 두려운 존재들에게 헌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조차 사회는 내키지 않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장애인은 권위의 육체로 구성된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시설에서 다만 쥐죽은 듯이 고요히 존재해야 하는 존재 아닌 존재로 규정된다. 이 보이지 않는 억압의 실핏줄에 걸려든 정신장애인들에게 의료권력이라는 육체가 강박을 하듯, 폭력을 행사하든 사회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죄수와 같이 두려운 존재들이 어떤 육체적 학대를 당하든 그것은 그들만의 문제이며 이 같은 문제들이 사회에 담론으로 떠돌거나 돌아다니는 것은 일반 시민-이라고 생각하는-에게는 불쾌하면서 공포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정신장애인에게는 시민의 공포를 제거할 수 있는 강박과 격리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는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 정신장애인에 대한 비인권적 처우는 길고 긴 서사를 만들어 왔다. 바로 폭력에 대한 증언이다. 1990년대 기하급수적으로 정신병원들이 만들어지면서 정신장애인들의 집단적 타자화와 폭력에의 굴종은 당시 그 현장에 있던 이들 중 생존한 이들이 사회로 나오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시설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문제들은 방송에 나갈 때 잠깐 국민적 관심을 이끌었지만 또 쉽게 잊혀졌다. 그런데 병원과 시설에서 ‘살아남아’ 사회로 복귀한 정신장애인들이 병원의 폭압과 억압, 인권적 훼손에 대해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들의 증언은 힘을 얻었고 시민사회가 의아해하면서도 이들의 목소리에 조금씩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싸움이 시작됐다. 10여 년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정신병원의 폭력성과 억압에 대한 싸움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억압에 길들여졌던 정신장애인들의 집단적 목소리는 이제 수동적이고 비이성적이라는 지배권력이 부여한 정체성을 거부하고 존엄을 주창하는 정치적 투쟁으로 진화해 왔다.

이 과정에서 강박에 대한 저항은 정신장애인 정치투쟁의 핵심 고리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강박을 폐지시키는 것은 정신장애인이 의료권력에 의한 가둠의 정치성에 저항하는 것임과 동시에 강박의 공간에서 인간의 지위를 거세당했던 이들이 그 지위를 온전히 복원 시키는 정치 투쟁인 것이다.

강박 지침이 규정한 4시간마다 풀어줘야 하며 강박에 대해 가족과 당사자에게 왜 강박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해 줘야 하고 자주 격리실에 들어와서 몸의 혈액이 원활하게 순환하고 있는지, 부작용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팔다리를 움직여주고 환자의 신체 자세를 변경하도록 하는 어처구니 없는 설명들과 규율들이 존재할 이유가 있을까.

신체를 감금하는 이유는 사실 만들어내면 된다. 꾸며내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한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하품을 했다는 이유로도 강박을 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치료라는 이유로.

신체를 복종시키지 않는 한 질서는 이뤄지지 않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질서가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것이다. 강박 또한 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누구를 위한 강박인가를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그건 의료권력과 국가권력의 편의적 통제의 이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국가인권위원회가 2001년 출범한 이후 무수한 진정이 제기됐다. 인권위가 2015년 11월 발표한 ‘정신병원 격리·강박 실태조사 결과 발표’에 따르면 2014년 인권위에 제기된 정신장애인 인권 침해 2789건 중 격리·강박에 관한 사건이 12.6%(354건)을 차지했다.

진정 사례에는 장시간의 부당한 강박과 격리, 격리·강박 과정에서의 폭언과 폭행, 강제 약물 투여, 기저귀 착용 등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경우, 격리실 철창과 용변 처리, 악취 등 환경 문제들이, 그 고통과 인격적 모멸감이 날것으로 들어가 있었다. 인권위는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시설이 좀 더 인간적이고 인권 친화적인 병실을 만들 것을 권고했다.

그리고, 2021년. 우리는 인권위의 ‘치료 목적의 강박이라도 주의 의무 준수 않으면 인권 침해’라는 긴 제목의 6년 전과 비슷한 권고문을 확인하게 된다. 그 기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일까.

정신장애인이 정신병원에서 폭력에 노출돼 권력에 순응하는 몸을 갖고 살아갈 때, 죽어갈 때, 아무도 우리를 위해 울어준 사람은 없었다. 위험하고 폭력적인 존재에 시민사회가 눈길을 준 적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정치성을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그 투쟁의 고리는 강박에서 시작될 것이다. 우리를 가두지 말라는 목소리에 이어 이제는 우리를 묶지 말라는 정치적 구호를 외쳐야 하는 것이다. 더 이상은 기저귀에 채워지고 침대에 묶여 인간의 존엄을 훼손당하는 폭력은 끝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친다. 우리를 묶지 말라. 우리를 강박하지 말라. 국가의 구시대적 유물인 강박 지침을 즉각 폐지하라.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시설에서 강박실을 즉각 폐쇄하라. 국가는 정신장애인의 인간적 존엄을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라. 자유가 치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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