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의 반올림](기고) 정신장애 너머의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정신장애를 배우다
[이건희의 반올림](기고) 정신장애 너머의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정신장애를 배우다
  • 이건희 기자
  • 승인 2020.07.21 18: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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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애가 '특성' 아닌 '본성'으로 느껴지지만...사회적 구성개념에 불과
정신장애는 '발견'이 아니라 '발명'..정신적 고통 정의 위한 도구일 뿐
정신장애는 우리 이름 아냐...우리는 수많은 색깔로 구성돼
출처: www.facebook.com/BeyondTheD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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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연히 정신장애와 함께 자라 왔다.

아버지는 알코올중독과 조현병을 가지고 있었고, 환청과 망상에 시달렸다. 지금은 십수 년간 정신병원에 입원해 생활하고 있다.

나 역시 오랜 시간을 우울증과 함께 자랐다. 항상 무언가 비어 있는 느낌이었고 채울 수 없는 것을 채우기 위해 사는 것 같았다. 공허감을 느끼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자해를 했고 자살 시도를 해 응급실에 실려 간 적도 있었다. 그 이후로 약물치료를 받기도 하고 심리상담을 받기도 하면서 나의 우울에 대해 배워나갔다.

나는 심리학과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며 정신건강을 공부하는 학부생이다. 스님이 자기 머리를 못 깎는다는 말이 여기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정신건강을 공부한다고 해서 자신의 정신적 어려움을 더 잘 극복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 우울의 늪을 벗어나지 못했고 자해를 완전히 그만두지도 못했다. 어쩌면 나와 내 가족의 심리적 어려움 때문에 심리학과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기로 선택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Night Falls Fast(번역서: 자살의 이해)』의 저자 케이 레드필드 제미슨(Kay Redfield Jamison)은 저명한 자살 연구자다. 자신의 양극성장애와 자살 충동을 이해하기 위해 자살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두고 "호랑이 조련사가 호랑이의 습성을 배우고 비행기 조종사가 공기 역학을 배우는 것과 같다"고 했다.

나도 마찬가지 심정이다. 나와 내 아버지를 괴롭히는 호랑이와 맞바람을 길들이기 위해 떠밀리듯 정신장애를 공부하게 됐다. 그러면서 정신장애란 무엇이고, 정신장애를 왜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빈약한 답을 찾아가는 중이다.

출처: lifemirror.net
출처: lifemirror.net

정신장애는 일종의 '정체성'으로 작동한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정신장애와 함께 자라 온 사람은 정신장애와 자신을 떼어놓고 생각하는 일이 어렵다. '삐' 하고 들리는 사소한 이명이 환청의 전주곡처럼 들리고 잠깐 가라앉는 기분은 우울증으로 들어가는 터널의 입구처럼 느껴진다.

어느새 정신장애는 혈액형이나 신발 사이즈 같은 '특성'이 아니라, 그림자처럼 떼어낼 수 없는 '본성'처럼 느껴지게 된다. 예컨대 본인이 우울한 것인지 우울이 본인인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장애는 어디까지나 '사회적 구성 개념(social constructs)'이다. 필요에 의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얘기다. 이를테면 '조현병'이라는 고정불변한 실체가 있다기보다는 망상, 환청, 혼란스러운 언어와 행동 등의 개별 현상들을 '조현병'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낸 것이다.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이기에 정신장애는 사회의 모습을 반영한다. 종교의 역할이 컸던 시대에 재림예수에 관한 망상이 많고, 군부독재 시대에 정부기관의 감시와 미행에 관한 망상이 많으며, 현대에는 대기업의 감시나 타인으로부터의 평가에 대한 망상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심지어는 무엇을 정신장애로 볼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도 고정 불변하지 않다. 동성애,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출처: www.in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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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정신장애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화석이나 행성처럼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법률이나 전구처럼 '발명'되는 것이다. 발명품은 누군가에게 이로움을 가져다주기 위해 존재한다. 그것이 발명품의 가치이고 딱 거기까지가 발명품이 가질 수 있는 권력의 한계선이다.

공인된 정신장애 진단체계인 DSM(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편람)을 체계화하는 데 기여한 앨런 프랜시스(Allen Frances)는 이렇게 말했다. "(정신장애는) 신화(myth)도 아니고 질병도 아니다. 그저 유용한 개념이다. 그것은 특수한 정신적 문제들의 집합을 묘사한 용어일 뿐이다."

정신장애는 태생적으로 누군가의 '이름표'가 되기 위해서 만들어진 발명품이 아니다. 정신적 고통을 정의하고 분류하고 치유함으로써 당사자에게 이로움을 가져다주기 위하여 잠정적으로 만들어놓은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정신장애라는 발명품'은 당사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이로움을 가져다주는 본연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할 때에만 쓸모가 있다. 자신의 쓸모를 넘어서서 당사자와 주변인에게 낙인으로 들러붙는다거나 고통을 가중시킬 권한은 없다.

정신장애는 우리의 이름표가 아니다. 우리는 정신장애 말고도 수많은 색깔들로 구성된다. 다만 정신적 고통으로 인하여 삶을 살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정신장애라는 도구를 만들어서 이용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정신장애 너머의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 관심이 많다. 내가 정신장애를 공부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정신장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우리의 정체성과 감정과 삶을 배우기 위해서다.

정신장애가 당사자를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정신장애라는 발명품을 사용하는 것이다. 정신장애 안에 갇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신장애 말고도 나를 규정하는 수많은 정체성들을 찾아 나가기 위해 정신장애를 배우는 것이다.

정신장애라는 권위 앞에서 당사자는 쉽게 용기를 잃어버리게 되지만 진단 너머의 본인이 누구인지는 스스로 알아낼 수밖에 없다. 나 역시 그 답을 찾아 나가고 싶다.

좋아하는 드라마 대사로 글을 끝맺는다.

Life awaits.

(삶은 기다리고 있지.)

Meaningful friendship, inspiring work, independence, your place in the world...

(의미있는 친구 관계, 영감을 주는 일, 독립하기, 세상에 자기 자리를 만드는 일...)

They're all just waiting outside your door.

(문 밖에 그 모든 것이 기다리고 있지.)

Now imagine if that door was locked.

(그럼 이제 그 문이 잠겼다고 생각해봐.)

No key, no side exit... You're trapped while everybody else blossoms around you.

(열쇠도 없고 비상구도 없이... 주변 사람들이 꽃피고 있을 때 넌 갇혀 있다고.)

That's what it feels like growing up with a mental illness.

(그게 정신질환을 가지고 자란다는 것의 느낌이야.)

So, while gamma knife surgery can disable the neurological circuit where this patient's OCD Impulse form,

(감마나이프 수술이 강박충동의 신경과학적 회로를 고쳐줄 수는 있어도,)

It can't make up for the lost time.

(잃어버린 시간까지 보상해줄 수는 없어.)

Surgery can't teach us how to take care of ourselves...

(수술이 스스로를 돌보는 방법까지 가르쳐줄 수는 없지...)

or how to recognize feelings like love or loss... or possibility

(사랑이나 상실 같은 감정들을 알아차리는 방법도 알려줄 수 없어... 가능성도 마찬가지고.)

We all have to figure out who we are beyond our diagnosis.

(진단 너머의 우리가 누구인지는 스스로 알아내야 하는 거야.)

It's a long process.

(그건 긴 과정이지.)

That begins with learning how to trust our own minds again.

(스스로의 마음을 믿는 법, 그걸 배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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