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형 기자의 변론] "정신적 증상으로만 보지 말고 우리 내면이 무엇을 원하는지 귀기울여 주세요"
[이관형 기자의 변론] "정신적 증상으로만 보지 말고 우리 내면이 무엇을 원하는지 귀기울여 주세요"
  • 이관형 기자
  • 승인 2021.04.02 23:0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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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이덴티티'는 어린 시절 학대의 기억이 연쇄살인마로 변해가는 과정 담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현실에 좌절, 다중인격자로 성장
정신장애인은 삶 속에서 상처와 아픔을 증상으로 갖고 있어
정신적 고통은 우리의 상처와 아픔에 귀기울여 달라는 호소
출처 : 네이버

2003년 <아이덴티티>라는 영화가 개봉합니다. <유주얼 서스펙트>, <식스 센스>와 더불어 미국의 3대 반전 영화로 불렸던 유명한 작품이죠.

영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폭풍우가 내리쳐 모든 도로가 침수된 밤, 홀로 떨어져 있는 외딴 모텔에 10여 명의 사람들이 고립됩니다. 모텔 주인을 비롯해, 경찰, 윤락 여성, 신혼부부, 여배우, 부부와 아들, 의사 등등. 다양한 나이와 직업, 성격이 각각 다른 여러 사람들이 모인 것입니다.

거친 폭풍우로 인해 차로 이동할 수도 없고, 전화선마저 끊긴 상황에서 등장인물들은 모텔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 둘 죽임을 당합니다. 누가 어떤 이유로 죽였는지도 모른 채 등장인물들은 하나 둘, 잔혹하게 살해당해가기 시작하죠.

서로가 서로를 범인으로 의심하는 과정에서 생존자는 점점 줄어듭니다. 심지어 시체는 찾을 수도 없이 사람들은 계속 사라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윤락 여성만 모텔에 남게 됩니다. 그렇게 모텔에서 구조돼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여성은 자신이 최후의 생존자라고 믿었습니다.

이어, 영화의 장면은 한 교도소의 치료감호로 바뀝니다. 그리고 정신병을 가진 연쇄살인범이 심리사에 의해 최면에서 깨어나죠. 알고 보니, 다중인격을 가진 연쇄살인범을 치료하기 위해 심리사가 최면을 건 것이었습니다.

살인범의 무의식 속에 고립된 모텔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만들었고, 그 안에 살인범의 다양한 인격들이 갇힌 것입니다. 그리고 연쇄살인범 안에 있던 다양한 인격들은 모텔에서 하나둘 죽어갑니다. 그렇게 다양한 인격들이 모두 다 죽고 결국 윤락 여성, 단 하나의 인격만 살아남게 된 것이죠. 심리사는 연쇄살인마가 윤락 여성, 하나의 인격을 갖고 평생을 살아갈 거라 믿었습니다.

그렇게 최면 치료는 끝났고, 연쇄살인마는 다른 곳으로 이송되죠.

출처 : 영화 아이덴티티
영화 아이덴티티 스틸컷

그런데 여기서 다시 반전이 있습니다. 영화는 다시 연쇄살인마의 무의식 속으로 들어갑니다. 모텔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여성이 한 농촌 지역을 방문했는데, 그곳에 갑자기 한 아이가 나타납니다. 모텔에 부모와 함께 왔던 바로 그 사내 아이였습니다.

여성은 놀랄 새도 없이, 사내아이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알고 보니, 모텔에서 사람들을 살해했던 범인이 그 사내아이였던 것이죠. 그 아이가 자신의 부모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던 겁니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와 연쇄살인마의 여성 인격도 사라지고, 사내아이의 인격만 남습니다. 사내아이의 인격은 연쇄살인마로 하여금 자신을 이송하던 경찰마저 살해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던 한 스토리에 집중했습니다. 연쇄살인마가 어떻게 다중인격자로 다양한 인격을 갖게 되었는지 말이죠.

연쇄살인마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학대를 당했습니다. 어머니는 윤락 여성처럼 바람을 피웠고, 아버지는 폭력을 휘둘렀죠. 아이는 언제나 사랑스런 부모의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때로는 경찰이 출동하여 자신을 구조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나중에 커서 의사가 되어 사람들을 살리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티비 속 여배우를 동경하기도 했습니다. 결혼을 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상상을 했고요.

그런데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부모는 변하지 않았고, 경찰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의사가 되는 꿈도,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도 모두 상상 속 허상에 불과했죠. 그래서 그는 스스로 인격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망상을 통해 직접 경찰이 되고, 의사가 되고, 때로는 사랑스런 부모가 되었죠.

하지만 현실은 윤락 여성 같은 엄마와 폭력적 아버지, 도움을 요청해도 찾아오지 않는 경찰, 그리고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들. 그 모든 현실 속 기억들도 또 다른 자신의 인격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렇게 다중인격자가 된 것이죠.

 

출처 : 영화 아이덴티티
영화 아이덴티티 스틸컷

많은 인격들 중에서 가장 악하고 가장 분노와 증오에 차있던 인격은 어린 시절의 자아였습니다. 부모를 원망하고, 사람들을 증오했죠. 그러다 결국 연쇄살인까지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최면 속에서도 그 어린 사내 자아는 부모를 살해하고, 도와주지 않았던 경찰의 자아, 미래의 꿈이었던 의사, 여배우와 윤락 여성까지 모든 자아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만큼 어린 시절의 자아는 상처와 분노 속에서 점점 잔혹한 살인마로 변해갔던 것입니다. 부모가 좀 더 사랑으로 대했다면, 경찰이 도우러 왔다면, 의사가 아니더라도, 단란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면, 그런 악한 사내 아이 자아는 점차 약화되어 끝까지 남아 있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심리치료사는 연쇄 살인범이 다중인격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방법과 절차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다중인격을 해결하기 위해 결과적으로 하나의 자아만 남겨두면 문제가 해결된 거라고 믿었습니다.

만약 최면을 통해 자아들이 서로를 잔혹하게 죽이는 방법이 아니라, 서로 용서를 빌고, 화해하고 사랑을 베풀어준다면 나쁜 자아는 사라지고 좋은 자아만 남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특히 어린 자아에게 그때 부모의 자아로서 학대해서 미안하다고, 어른의 자아로서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면, 원망과 분노에 사로잡힌 어린 자아는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사라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출처 : 영화 아이덴티티
영화 아이덴티티 스틸컷

저를 비롯해서, 많은 정신장애인들이 과거 상처와 아픔으로 증상을 갖고 있습니다. 어릴 적 부모의 학대로, 학창 시절 괴롭힘으로, 군대에서의 구타로, 성범죄 피해를 계기로 정신질환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그때의 기억들이 끊임없이 떠오르다 보니, 악몽이 되고 망상으로 이어집니다. 누군가가 내 욕을 하고, 감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심지어 그것들은 환청과 환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저 역시도, 증상이 안 좋을 때는 누군가 웃거나 대화를 하면, 내 욕을 하며 비웃는 거 같아서 자해 행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 약을 통해서 증상을 가라앉힐 수 있지만, 정말 제게 필요한건, 어릴 적 받은 아픔과 상처에 대한 따뜻한 위로와 포옹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신장애인의 증상에 집중합니다. 의사들은 진단분류체계(DSM)를 기준으로 병명을 내리고, 가족들은 당사자의 기괴한 행동과 말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며 갈등하고, 심하면 병원에 강제입원 시키기도 합니다.

대중들은 미디어를 통해, 집안에 쓰레기를 모으거나, 혼잣말하는 정신장애인들을 보며 이상하고 위험한 집단이라며 경계합니다. 많은 연구자들도 정신장애인의 인생보다, 증상과 치료, 때로는 범죄 사건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때로 이상한 말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과대 행동을 할까요? 왜 망상과 환청과 환시에 시달리며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하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가 겪었던 아픔과 상처에 대해 한 번만, 조금이라도 귀기울여 달라는 호소와 절규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욕하고 해치려 한다는 망상과 환청을 겪을 때, “아무도 너를 싫어하지 않아. 우리는 너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고 있어”라는 말 한 마디가 주사보다 더 큰 약효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벽에 머리를 박으며 자해를 하고, 소리를 지르며, 책상을 주먹으로 칠 때, “많이 힘들었던 거야?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라는 걱정과 관심이 행동을 멈추게 할 수도 있습니다. 

정신질환자들을 관리한다는 게, 병원에 입원시켜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최면을 통해 모텔에서 인격들이 서로를 죽고 죽이게 하듯, 증상을 가라앉히기 위해 코끼리 주사로 일주일 동안 잠재우는 것만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 수 있습니다. 증상이 더 심해 질 때, 약의 양을 늘리는 것만이 근본적 해결책이 아닐 겁니다.

우리의 내면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도움을 청하는지, 왜 괴로워하는지, 때로는 귀기울이는 따뜻한 마음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상처가 너무 아파서, 이대론 버티지 못할 거 같아서,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증상을 외면하고 잠재우며, 우리의 내면에 귀기울이지 않을 때, 그것은 더 큰 외침과 절규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약과 치료를 거부하고 무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 정신장애인들의 범죄를 정당화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 내면의 소리에 좀 더 귀기울여 달라는 것입니다. 의사와 상담사는 물론, 당사자의 가족들에게, 복지 분야 종사자에게, 법과 제도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일부의 측면만을 보도하는 언론에게, 그리고 이 사회와 대중에게 간곡히 하고 싶은 부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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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2021-04-05 02:59:13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당사자조력활동가의 활성화와 가족교육시 당사자와의 대화방식과 태도에 대한 내용도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더 나아가 일반대중에게도 그러한 인식개선 및 대화방식 알리는 캠페인도 필요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