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언니의 책방]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는 사랑의 역사였더라
[삐삐언니의 책방]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는 사랑의 역사였더라
  • 이주현 기자
  • 승인 2022.06.29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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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언니의 책방 ⑥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존 돈반·캐런 저커 지음, 강병철 옮김, 꿈꿀자유 펴냄
존 돈반, 캐런 주커 지음,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꿈꿀자유, 2021.
존 돈반, 캐런 주커 지음,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강병철 옮김, 꿈꿀자유, 2021.

나와 떨어져 사시는 부모님은 뭔가를 택배로 보내실 때 메모 또는 짧은 편지를 함께 보내시곤 한다. 실무적인 내용이 많다. ‘말린 취나물을 무쳐 먹을 때는 먼저 물에 담가 불린 뒤 액젓과 국간장을 넣고…’ ‘통에서 김치를 꺼내 먹을 때는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위를 항상 꼭꼭 눌러주고…’ 

20여 년 전 조울병 첫 발병 뒤 폐쇄병동에 입원했을 때 아버지는 애끓는 마음을 글로 적어 보냈다. “네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을 아빠도 이해한다. 아빠도 무너지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편지를 쓴다 (…) 주현아, 너는 네 의지로 꼭 나을 수 있다. (…) 잠시동안 인생 역정에 힘든 과정을 겪고 있다고 생각해주기 바란다. 길을 가나 앉아 있으나 네 얼굴이 어른거려 헤매는 아빠가 쓴다.” 

당시 원하지 않는 입원을 시킨 부모님에게 단단히 화가 나 있었으나, 어쩐 일인지 그 편지는 찢지 않고 오랫동안 보관했다. 이성적 판단이 어려웠던 순간에도, 그 안에 담긴 사랑을 느끼고 있었나 보다. 

최근 우연히 9살짜리 자폐아를 만난 뒤 책장에 꽂혀 있던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를 꺼내 들었다. 

‘자폐증’(autism)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지 않았다. 미국의 어린이 정신과 의사 레오 카너는 1940년대 ‘도널드’라는 소년의 사례 연구를 통해 자폐증을 ‘발견’했다. 도널드를 비롯해 그동안 봐 왔던 여러 어린이들은 능력과 증상에 차이가 있었으나 자폐라는 하나의 틀로 설명 가능했다. 극단적으로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극단적으로 주변 환경이 동일한 상태를 유지해야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재능과 결합이 기묘한 형태로 뒤섞여 있다는 것 등등. 

자폐증의 발견이 곧 자폐의 치료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브루노 베텔하임 같은 ‘저명한 전문가’들은 자폐의 원인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지 않는 부모(특히 엄마)의 탓으로 돌렸다. 자폐 어린이에게 가장 중요한 보호자에게 죄책감을 심어줌으로써 적절한 교육과 치료 기회를 찾으려는 노력도 좌절시키는 악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결국 자폐증 환자들이 간직한 재능(비록 특정 분야에 한정돼 있긴 하지만)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이들에게 희망의 빛을 제시한 것은 자폐아의 부모들로부터 비롯했다.

심리학 박사이자 자폐아 ‘마크’의 아버지인 버나드 림랜드는 자폐아들의 수많은 데이터를 축적해 행동요법을 모색했고, ‘조’의 어머니 루스 설리번은 자폐아의 가족들을 조직해 전미 자폐어린이협회(National Society for Autistic Children)의 초석을 놓았다.

이들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어딘지 다른 사람들”도 살아야 필요가 있고, “어딘지 다른 사람들”도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는 인식이 보편화됐으며, 그 결과 정부의 장애인 정책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한발 더 나아가 자폐를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의 신경다양성에 대한 이해의 차원으로 확대됐다. “인간은 정신적 다양성을 지닌 존재”이며, “자폐란 특정한 측면이 덜 발달한 대신 다른 측면이 더 발달하는 현상”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이 책의 장점은 자폐에 대한 이해를 돕는 풍부한 정보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작가들의 탁월한 스토리텔링 솜씨는 800쪽에 이르는 만만치 않은 분량도 부담스럽지 않게 만든다. 나를 감동시킨 대목은 가족 및 ‘보통 사람들’의 헌신과 노력으로 자폐의 역사가 전진해왔다는 점이었다. 자폐아 가족들의 깊은 사랑은, 20여 년 전 애타는 편지를 썼던 아버지의 마음과 닮아 있었다. 

레오 카너가 발견한 최초의 자폐증 환자 도널드는 소년 시절 할아버지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았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사랑했지만, 평생 만난 어떤 사람보다 널 사랑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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