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책임을 떠안고 실존주의자의 자리로 다시 돌아온다면
모든 책임을 떠안고 실존주의자의 자리로 다시 돌아온다면
  • 박지니
  • 승인 2022.06.26 2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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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연 선생님의 서평에 부쳐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게 윤리지만 ‘윤리’로 모든 걸 판단할 순 없어
오래 생각하면 답을 찾을 확률 높지만 모든 사람이 그래야 하는 건 아냐
나 자신에 대한 신뢰가 공포 이기게 해...스스로 믿고 든든히 여기기를
“너는 세상의 단독자로 서서 인생의 결정을 내릴 용기가 있니?”

<글을 기고한 박지니 씨는 20여 년 동안 거식증을 겪어왔다. 대학 졸업 후 콘텐츠 기획, 홍보, 제약광고, 출판편집, 번역 등 다양한 업종에서 일했다. 현재는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를 탐구 중이다. 그는 가장 바라는 것으로 “지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 비좁은 머릿속의 벽을 넘어뜨려 바다같이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거식증 경험을 담은, ‘환자’가 아니라 ‘화자’로서 쓴 <삼키기 연습>을 출간했다. 그는 거식증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해내야만 할 본질적인 진실, 좀 더 많은 지식으로 번역해내야만 할 경험으로 생각한다. 현재 섭식장애 디지털 치료제를 개발하는 헬스테크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다.>

 

고민 끝에 또 한 번의 퇴사를 결정했다는 메일을 드리자, 글쓰기 선생님은 다음 선택은 더 나은 길을 펼쳐 보이길 바란다며 “세계는 참 신비해. 내 생각보다 한결 더 복잡하고 섬세하게 작동되는 거 같아”라고 답메일을 맺으셨지요.

마침 트위터 알고리즘은 데이비드 리프가 쓴 짧은 트윗 “생의 끝자락에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나는 알지 못합니다(I don’t know)’야말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라고 말했다”를 제 타임라인의 꼭대기에 보여 주었습니다.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 역시 마찬가지로, 신약 성경의 이 구절을 자주 떠올립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나는 내가 의도하고 실행한 일이 실상 무슨 일로 귀결될는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내 진짜 의도조차 알지 못하며, 그 께름칙한 두려움은 매일같이 제 그림자를 밟으며 다가옵니다.

그리고 더욱이, 그렇게 이루어지는 내 과오들 - 롭 라이히의 <시스템 에러>에서 언급되는 기술 기업들의 ‘부산물(by-product)’ 혹은 ‘외부효과(externalities)’와 같은, 혹은 이반 일리치가 냉혹히 말하는 기술적 혁신의 피할 수 없는 ‘역-생산성(counter-productivity)’ 같은 귀결 - 이 과연 용서받을 수 있을 일일는지도 자신할 수 없습니다.

이 글을 쓰자고 생각하고 나서도 두 달이 흐르도록 침묵을 깨지 못한 까닭은,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고통 속에 있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는 모든 말이 어불성설입니다 - 지금 제가 하는 말 따위, 그 사람들에겐 전혀 들리지 않을 겁니다. 그 수심에서 운 좋게 몸을 건져낸 당사자이면서, 막상 그 사람들 앞에 내가 선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정말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저 또한 알 수 없습니다.

- 자, 그리고 위의 문단은 이 글을 오래 내팽개치기 전 초고에 썼던 내용입니다. 지금 이렇게 덧붙여 이어 쓰고 있는 나는 섭식장애 디지털 치료제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헬스테크 회사에 합류해 벌써 두 주를 보냈습니다. 작년 여름 출간한 회고록의 원고를 쓰던 때와 대등한 번민과 압박감을 나는 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뒤에 이어서 하지요.

회사 일을 마무리한 뒤 정말 오랜만에 간호사 선생님의 식사치료에 참석했을 때, 저는 회사에서 제가 느꼈던 부당함에 대해 토로했습니다. 더 정확히는, 그걸 ‘부당함’으로 느끼고야 마는 제 고질적 집착에 대해 - 과업을 맡았다면 누구나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하며, 혼자서 몇 사람 몫의 일을 해내는 사람은 연봉 인상은 아니어도 최소한 그가 호소하는 근무 환경 개선에 대한 요구 사항은 반영돼야 한다고 결국 생각하고 마는, 메타-자아로는 회의하지만 ‘내장에서 느껴지는(visceral)’ 분노는 ‘능력주의(meritocracy)’ 논리로 표출되는 반사적 패턴에 대해 고해했습니다.

자꾸 그런 상황을 자처하고 결국 그 상황의 부당성에 배신감을 느끼는 패턴을 알면서 못 도망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하지만 일을 하기로 한 사람은, 열심히- 일해야- 하잖아요!” 하고 제 자신을 비아냥대는 식으로 쉽게 가시지 않는 분노를 고백했지요.

그러자 선생님은 당신 특유의 방식으로 - 따뜻한 목소리로 냉정하게 말씀하셨어요. “‘윤리’로 따지면 네 말이 맞아. 열심히 일해야 되는 게 맞지. 하지만 ‘윤리’로 모든 걸 판단할 순 없어.”

시몬 베유.
시몬 베유.

저는 의아했지요. 마침 새로 번역 출간된 시몬 베유의 책을 읽은 뒤라 베유의 ‘추구’, ‘단련’에 대한 생각에 마음 모양이 액체마냥 조금 달라져 있던 터라 더 그랬어요. 하지만 그때도 너무 분명했던 건, 베유와는 정반대로 제 ‘윤리’는 타자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베유와는 전혀 연결점이 없었죠.

처음에 간호사 선생님의 말은 제게 바로 흡수되지 않고 이물감을 유지했습니다. 윤리를 무시한다면 사람은 무엇을 추구할 수 있을까, 자기수련이나 이상 같은 것도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지 않나 의아했지요. 하지만 그 뒤로 두 달 정도 흐른 지금은, 웬일인지 그때의 융통성 없었던 제 자신이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그 사이 저는 '그 무엇보다 큰' 세상의 일에 대해 - 영성가 바이런 케이티가 '가장 친절한' 존재라 일컬었던 지금 이 순간의 '현실'에 대해 좀 더 잘 이해하게 되었거든요. 지금의 이 모든 건 나보다 크며, 나는 그 어떤 일의 발생과 흐름에도 억울해할 필요 없다는 걸 부지불식간 깨치게 된 것 같습니다.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 '인식'의 문제, '언어'의 문제를 저는 늘 생각합니다. 글쓰기 선생님이 강조해 오신 것처럼 사고가 뭉툭하고 그걸 스스로 못 깨닫고 있으면 우린 우리가 의도치 않은 귀결을 만들어 버릴 수 있거든요. 어떤 사람들이 테크놀로지의 진보에 대해 그렇게 비관하듯 우리 행보의 '역생산성'이 실로 피할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저는 할 수 있는 한 내 실수와 실패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내 역생산성을 목도해야겠어요.

내 안팎에서 보는 생각들은 자주 많이 뭉툭합니다. 맹아기의 디지털 헬스케어 업계가 투자자들에게 유망해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아직 그 유용성의 한계를 알 수 없는, 무한한 '데이터'에 있습니다.

언젠가 저는 제 후배 세대인 '스타트업 네이티브' 시대의 젊은이들이 과거 '이론'이 있던 자리에 '데이터'를 두고 움직이는 '데이터의 세대'라고 명명해 보기도 했어요. 그들은 고전적인 느낌의 스토리텔링, 가설과 명제에 코웃음 칩니다. 대신 기술로 포착해 자동 수집할 수 있는 데이터의 통계를 신뢰하고, 그걸 의사결정의 근거로 삼죠.

하지만 이 객관적이고 단위로 측정되는 양적인 정보들이 실제 무엇을 대표하는 구성개념이고 시뮬라시옹일지는 불확실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오래 묵어 습관이 된,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인 뭉툭한 사고가 끼어들고 마는 부분이에요.

사람의 얼굴에 표시한 랜드마크 포인트들을 기준으로 한 딥러닝 기술로 (1-1) 온라인 학습 중인 아이가 하품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잡아내거나 (2-1) 누군가가 입꼬리를 올리고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이 인식됐다면, (1-2) 아이가 지금 ‘집중하지 않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아이 본인에게 혹은 교사에게 알람으로 고지하면 어떨까, (2-2) 미소를 닮은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그러므로 순전히 기쁘고 행복할 것이라고 단정해도 좋을 것이다, 라고 너무 비과학적인, 안타깝게도 몸에 밴, 관습적인 판단을 내릴 때가 많습니다.

우생학 연구자라는 오명을 남긴 프랜시스 골턴은 찰스 다윈의 사촌이자 통계학자였습니다. 그는 수많은 인물 사진들을 출력해 겹치면 특정한 편차들을 짚어낼 수 있을 것이고, 거기서부터 역추론해 정상성의 형상을 추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시각적 데이터와 통계 기술의, 눈앞에 너무 명징해 보이는 ‘증거’들이 너무 단순한 도식적 명제를 획기적 진실로 느껴지게 만든 것이죠.

정치적 올바름을 구현하는 일 역시 마찬가집니다. 역시 그 점에서도, 우리는 ‘언어’를 맹신할 수 없습니다. 영국의 의료인류학자로 정신의학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굉장히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제임스 데이비스는 제가 깊은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 해당 분야 트위터스피어(Twittersphere)에서도 양가적인 반응을 촉발하곤 합니다.

얼마 전 그는 대략 스무 명의 상원의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오찬을 같이하며 정신건강 분야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제를 놓고 대화를 나눴다고 트위터에 썼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정서적 스트레스를 약물로 해결하려는 과도한 추세에 대한 그의 비판에, 동석한 정치가들 모두가 굉장한 관심을 보였다며 기쁘게 이야기했어요.

이 정신의학계의 ‘과잉진료’에 대한 비판에 이제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이며, 바야흐로 진짜 행동을 취할 때라고 그는 말을 맺었죠.

이에 대해 <어사일럼(Asylum)>(asylummagazine.org) 매거진을 출간하는 헬렌 스팬들러 교수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놀랍지도 않군요. 당신은 이미 열린 문을 들이받고 있었어요. 그런 담론을 신자유주의자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셨나요? 의료와 복지 서비스를 감축할 명분이 되니까요. 지금 우리가 집중해야 할, 그보다 더 중요한 안건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지니 著. 삼키기 연습.
박지니 著. 삼키기 연습.

저는 지금 섭식장애 디지털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는 어느 헬스테크 스타트업에 합류해 일하고 있습니다. 프로젝트에 대해 알았던 건 작년 이맘때였고, 소식을 접하자마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대학병원의 연구 책임 교수를 비롯해 참여 기업들의 메일 주소를 찾아 무작정 편지를 드렸습니다. 저는 이러이러한 사람이고, 어떤 형태로든 섭식장애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다고요.

그렇게 해서 어느 토요일 오전, 강남의 대학병원 근처 카페에서 프로젝트에 참여 중이신 어느 교수님과 기업 담당자를 만나 이야기 나눌 기회가 생겼지만, 저의 참여에 관한 논의는 금방 흐지부지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그때의 그 프로젝트에 다른 회사를 통해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느닷없이 다가온 거예요! 저는 생전 처음으로, 그러는 수밖에 다른 대안은 없었으므로, 모든 걸 걸고 처음부터 제 병력을 밝힌 채 채용 전형을 시작했습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회사의 의사결정은 제 16년 경력 중 그 어느 때보다 더뎠고, 한 달을 꼬박 기다린 끝에 계약직으로 프로젝트에 합류할 권한을 얻었지요.

그리고 지난 16년 경력 중 역시 처음으로, 너무나 자아동질적(ego-syntonic)인 고민을 일로서 하고 있습니다. (시쳇말로 ‘덕업일치’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나 그게 결코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는 걸 알고 계시겠지요.)

그러나 제가 ‘고민’이라는 표현을 썼듯, 나는 이것이 결코 가볍고 단순한 과제가 아닌 것을 익히 알기 때문에, 내가 까맣게 모르는 어느 미지의 ‘환자’들이 어떻게든 쓸 기술 정도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오래 망설이다 기적처럼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정말 감사한 기적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게 아니면 그 사람들이 가족 안에서, 사회 속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살는지가 너무 빤하게 보이기 때문에, 나는 때때로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공포를 느끼곤 합니다.

며칠 전, 저는 제가 존경하는 어느 공공의료 연구자 선생님께 메일을 보내드렸습니다. “...저는 7시에 출근해 사람들이 그제야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오전 10시쯤까지 혼자 아침 식사도 하면서 논문을 읽고, 집중적으로 일할 수 있어요. 그리고 4시 퇴근이라, 회사 일 자체에 큰 부담은 없답니다.

하지만 섭식장애 디지털 치료제 앱을 실제로 ‘작동’하게 만들기 위한 치료적 알고리즘과 UI/UX에 대한 고민, 그리고 무엇보다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 특히 ‘인식론적 부정의’와 관련한 - 고민 때문에 저는 이따금 느닷없이 엉엉 울음을 터뜨릴 수도 있을 것 같은 고통과 공포감을 느끼게 됐어요.

그리고 이건, 맞는 일이니까요. 이런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건 옳지 않은 일일 거예요. 지금도, 격주로 다니고 있는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과 실랑이하는 부분인데, 선생님이 말하는 것처럼, 저는 '일'과 '생활'을 구분하는 게 본질적으로 되질 않거든요. 제 몸이 그렇게 움직이기 때문이에요. 지금처럼 개인적으로 크게 골몰하고 있던 주제가 아니더라도, 회사 일에 대한 고민은 하루 온종일, 심지어 꿈속에서까지 이어집니다.

- “선생님은 제게 진정한 ‘취미 생활’이 없다고 하시지만, 아르키메데스도 한 문제를 내내 생각해 ‘유레카’를 외칠 수 있었고 뉴턴도 같은 문제에 쉬지 않고 집착해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달았잖아요. 제 성향에 대한 변명을 찾자면 그래요.” “그렇게 오래 생각하면 답을 찾을 확률이 높아지는 건 맞겠죠.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해야 된다는 건 아니라는 건 알지요?”

(중략) 어쨌든 - 지금 제가 투신한 이 프로젝트에서 도망칠 수는 없는 게 사실입니다. 저는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야 하고 그럴 수 있도록 제 자신을 달래고 단련시켜 볼 생각이에요.

때때로 너무 무섭지만, 지금 이 공포를 어떻게 무마시키고 현실로 나아가 ‘액션’을 취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바로 그 방법을 섭식장애 환자들을 위한 DTx 앱에 어떻게 반영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그리고 감사히도, 선생님은 이렇게 격려의 말씀을 보내주셨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신뢰가 공포를 이기게 합니다. 글을 통해 접하는 박지니 선생은 신뢰할 만한 사람이에요. 스스로 믿고 든든히 여기기를 바랍니다. 꼭 윤리적인 치료가 개발되기를 기대합니다. 응원해요.”

오래 전 서울 생활을 잠시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 내 방에 스스로를 가둔 채 번역가로 지냈던 3년 동안, 내게 큰 위안이 되어 주었던 시인 조셉 브로드스키는 어디엔가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악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극단적 개인주의, 독자적 사고, 변덕, 그리고 기벽(奇癖)이다.” 노벨상을 수상한 시인답게 너무도 과격하게 결벽증적인 언사라는 느낌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경계가 허튼소리인 건 아닙니다.

아주 오래전, 고등학생 시절에, 한 특이했던 친구가 이렇게 속삭였던 적이 있어요. “너는 세상에 단독자로 서서 인생의 결정을 내릴 용기가 있니?” 그리고 그 아이는 세상에 대한 모든 앎이 언어로 치환되는 굴레를 끊고 싶다고, 가족도 학교도 모르게 어느 먼 산사(山寺) 로 도망쳐서 벙어리인 척하며 살고 싶다고 그의 계획을 얘기했지요.

그 얘기까지 장황하게 잇진 않을게요. 저는 그 아이와 나눴던 그때의 대화를, 종종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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