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형 기자의 변론] '조현병포비아'를 만든 건 99%의 가해 집단이지 1%의 조현병 당사자가 아닙니다
[이관형 기자의 변론] '조현병포비아'를 만든 건 99%의 가해 집단이지 1%의 조현병 당사자가 아닙니다
  • 이관형 기자
  • 승인 2021.03.25 23: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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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상대주의의 시선으로 국가와 문화를 이해해야
성범죄 발생하면 가해자 남성보다 피해자 여성이 더 비난받아
언어·행동발달 지연이 왕따의 문제?...약자 포용 못하는 가해자들이 더 문제

과거, 왼손잡이 아이들은 부모님께 꾸중을 많이 들었습니다. 밥을 먹을 때, 오른손으로 수저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죠. 밥을 먹을 때, 식탁 위 밥그릇을 들고 먹으면 한국에서는 거지들이나 그렇게 먹는 거라며 핀잔을 주지만, 일본에서는 식탁 위 밥그릇을 놓고 먹으면 개들이나 그렇게 먹는 거라며 핀잔을 주곤 합니다.

인도에서는 밥을 숟가락 대신 손으로 떠서 먹습니다. 수저나 포크를 사용하는 대다수의 나라 입장에서는 비위생적이고 이해가 안가는 모습이죠.

이러한 문화적 차이를 보면, 마치 두루미와 여우가 식사하는 동화 속 장면이 떠오릅니다. 두루미는 속이 깊은 항아리에, 여우는 납작한 그릇에 음식을 담아 먹어야 맞는 것이죠. 이처럼 우리는 밥을 먹는 하나의 행동만으로도 신체에 따라, 문화에 따라, 국가에 따라 다른 모습, 다른 모양과 행동을 나타내곤 합니다.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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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현상에 대해서도 나의 관점과 나의 시선에서, 타인의 관점과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른손잡이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면, 왼손잡이는 무언가 잘못이 있거나 신체적 장애로까지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왼손잡이 아이들이 억울하게 야단을 맞아야 했죠. 한국에서 밥그릇을 들고 식사를 하는 일본인은 거지처럼 오해받고 편견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또한 손으로 식사하는 인도인은 비위생적이고 더러운 이미지로 취급당하기 쉽죠.

하지만 한 번만이라도 입장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많은 것들이 달라집니다.

왼손잡이는 오른손잡이에 비해 우뇌가 발달해서 예술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회 통념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왼손잡이 사람들이 투합하여 1992년부터 8월 13일마다 ‘국제 왼손잡이의 날’이 제정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왼손잡이 자녀를 훈육하고 야단치는 모습은 많이 사라지고 있는 추세죠. “밥그릇을 식탁에서 들고 먹느냐? 놓고 먹느냐?” 로 서로 무시하던 한국과 일본의 인식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국제 여행과 미디어를 통해 서로의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하게 된 것이죠. 마찬가지로, 해외를 여행하는 외국인들도, 그 나라의 전통과 그 나라의 문화를 따라 생활습관을 따라 하기도 합니다.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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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문화 상대주의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시킴은 물론, 차이를 인정하고 혐오를 사라지게 합니다. 그리고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찾는 중요한 열쇠가 되기도 하죠.

자녀의 왼손잡이 습관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고, 혐오와 무시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나라의 문화적 차이로 인정하며, 다른 입장을 받아들이고 타 문화에 동화되기도 합니다. 이같은 사고의 전환은 문화 상대주의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는 특정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함에 있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인과관계를 명확히 하지 못하고, 오히려 순서와 대상을 바꾸어 생각하기도 하죠.

그중 하나가,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입니다. 예를 들어, 폭행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의 눈에는 가해자의 주먹보다, 피해자의 멍든 눈에 더 시선을 빼앗기게 됩니다. 가해자의 분노와 혈기가 아닌, 피해자의 다친 몸을 보며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죠.

또한, 가해자의 주먹을 막고 피해자를 대신하여 응징하기보다는, 더 이상의 폭력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가해자를 말리고 피해자를 멀리 떨어뜨리는 상황이 더 익숙할 겁니다. 폭력의 문제와 책임은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가해자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우선 피해자를 움직여 상황을 진정시키는 것이죠.

이러한 현상의 극단적인 예가 성범죄일 것입니다.

성폭행 범죄가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더 시선을 집중하게 됩니다. 피해 여성이 합의하에 성관계를 맺었는지? 아니면 강압적으로 성폭행을 당한 것인지? 그리고 왜 늦은 밤에 길거리를 걸어 다녔고, 어떤 차림의 옷을 입고 다닌 것인지를 토대로 사건의 경위를 파악하는 관습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해 남성이 어떤 마음과 어떤 몸 상태로 범행을 저질렀는지? 어떤 옷을 입고, 왜 늦은 밤에 길거리를 배회하며, 계획적으로 여성을 노렸는지? 그 남성에게 과거 전력이나 전과가 있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결국, 경찰과 법원 앞에서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심각성을 호소하는 것은 남성 가해자보다 여성 피해자일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저는 과거, 중학교 시절, 끔찍한 괴롭힘과 왕따(집단따돌림)를 당했습니다. 그때 제 짝궁은 반의 분위기를 주도하며 계획적으로 절 괴롭혔죠. 성인이 된 이후로도 그때의 상처가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진료를 받기 위해 처음으로 대학병원 정신과에 찾아 갔었습니다. 제 상황을 적은 접수장을 내밀었을 때, 접수처 간호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들었습니다.

“본인은 과거에 왜 왕따를 당했다고 생각하세요?”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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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질문이 다음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본인이 잘못을 했으니깐, 반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했겠죠?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사실, 제가 왕따를 당한 이유는, 저보다 가해 학생에게 묻는 게 더 정확할 겁니다. 당시 제 짝궁이던 그 가해 학생은, 전 학년도에 반에서 왕따를 당하던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분풀이인지, 아니면 방어 작용 때문인지, 반에서 약하고 손쉬운 상대를 고르다 마침 짝궁이 된 저를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문제는 제가 아니라 그 짝궁임을 말하고 싶습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문제를 해결해야 할 사람은 그 짝궁이 아닌 제가 되었죠. 사회에서 위험하고 문제시하는 대상도 그 짝궁이 아닌 제가 되었습니다. 왕따나 학교 폭력 문제의 원인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왕따 문제가 발생하면 가해자 아이들은 훈계 처리로 끝나고, 피해 학생은 전학을 가는 걸로 사건이 마무리 됩니다.

제가 찾은 자료 중 “청소년 정신과 환자 중 외톨이 혹은 왕따 특성을 보이는 환자에 대한 예비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이 있습니다.

이 논문은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을 특성에 따라 두 가지 집단군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설문지 분석을 통해 언어 발달 및 행동 발달의 지연과 같은 특성이 있으면 왕따를 당할 확률이 높다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그런데 언어 발달과 지연의 문제가 진짜 왕따의 원인일까요? 상대주의적 관점으로 입장을 바꿔 보면, 언어 발달과 지연에 대해 수용하고 안아주지 못하고 오히려 괴롭히고 폭행을 휘두르는 반 아이들이 문제가 아닐까요? 그리고 그 아이들의 행동과 인성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는 교사와 부모들은 문제의 원인으로부터 자유할까요?

왕따 피해 아동과 청소년들에 대해 연구보다도, 왕따 가해 아동과 그 부모들에 대한 연구가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왕따와 학교 폭력의 문제를 위한 본질적 해결책이니까요.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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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병에 대한 기사를 찾다보면, 가장 많이 언급되는 내용 중 하나가 조현병 환자들의 범죄율입니다.

조현병 환자들의 범죄율은 일반인들의 범죄율보다 낮기 때문에 조현병 환자들은 위험하지 않다는 논리입니다. 물론, 조현병 환자의 범죄율이 낮으니 어떤 사람들은 혐오와 편견을 거두고 우리를 안전하고 친근하게 여길 수도 있겠죠.

그런데 대다수 대중들이 가졌던 기존의 혐오와 편견까지 사라지게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조현병에 대한 통계치로 활용하는 주제가 범죄율, 재범율, 강력범죄율이라는 자체가 이미 편견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또한 그러한 논문의 출처가 법학과, 경찰행정학과라는 사실 자체도 이미 우리 사회의 인식이 어떠한지 나타내고 있죠.

물론 언론학과, 심리학과 등에서는 뉴스의 조현병 관련 혐오 보도와 사회의 편견과 차별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초점이 ‘조현병 환자들은 안전하다’라는 방어적인 입장에서 ‘혐오와 조장하는 언론과 편견에 물든 사회’로 공격적인 입장의 논문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 중에,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박민영,2020)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청소년 혐오, 20대 혐오, 노인 혐오, 장애인 혐오, 동성애자 혐오, 세월호 혐오, 이주 노동자 혐오, 조선족 혐오, 난민 혐오, 이슬람 혐오”와 같이 다양한 집단에 대해 이 사회가 어떻게 혐오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카테고리 하나하나만 살펴볼 때는 청소년, 20대, 노인, 장애인, 동성애자... 등등에 문제가 있으니깐, 혐오의 대상이 된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목차 전체를 보면, 결국 다양한 집단을 혐오하는 이 사회의 분위기와 관습이 진짜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조금 다르거나 소수의 집단이라면, 아주 작은 일부 잘못의 부분으로 전체 집단을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미디어의 행태, 그리고 사회적 분위기가 문제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죠.

이것은 집단적 행동뿐 아니라 개인의 행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정 연예인에 대해, 특정 정치인에 대해, 특정 집단에 대해 악플을 달고 험담을 내뱉을 때, 누군가는 그 특정 대상에 대해 함께 욕을 하며 동조할 겁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과 입장을 바꾸고 상대적으로 바라보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을 다시 생각해보면, 모니터 뒤에 숨어 키보드로 악플을 다는 그 누군가가 진짜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어떤 병이 있든 처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아무런 범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조현병 환자라는 사실로 악플을 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군가는 “저 조현병 환자도 뉴스에 나온 사람들처럼 문제가 있다”고 동조할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과 입장을 바꿔보면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섬에 가두라고”, “저들은 몽둥이가 약이라고”, “모조리 불에 태워 죽여야 한다”고 외치는 그들이야말로, 정상적이고, 마음이 건강하고, 행동이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를 조장하는 언론과 미디어는 정의롭다 말할 수 있을까요?

세상과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진짜 문제이고, 문제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언론이 만든 ‘조현병 포비아’라는 단어처럼, 세상은 1%에 해당하는 조현병 환자들 때문에 세상이 무섭고 돌아다니기 겁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혐오와 차별에 사로잡혀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배척하는, 99%에 해당하는 이 사회의 문제는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입장을 달리 바꿔서 생각해보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을 다시 바라보고 생각해 본다면, 세상은 문제와 해결책이 더 선명하게 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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