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구하의 사는 이야기] 국민으로서의 정신장애인의 정치적 존재감…혐오에서 권리의 주체로 이행해야
[작가 구하의 사는 이야기] 국민으로서의 정신장애인의 정치적 존재감…혐오에서 권리의 주체로 이행해야
  • 구하
  • 승인 2021.04.0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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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는 약자·소수자가 공론장에 소환되는 기회
정치는 자기주장을 설득하고 결집된 목소리 내야
가능하지 않다던 발달장애인법 2014년에 제정
정신장애 권리가 국회 1호 정책으로 채택되길 기대해
지난 2월 정신장애 단체들이 8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 앞에서 정치인들의 '조현병' 발언 사과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c)마인드포스트 자료 사진.
지난 2월 정신장애 단체들이 8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 앞에서 정치인들의 '조현병' 발언 사과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c)마인드포스트 자료 사진.

떠들썩했던 선거 시즌이 끝났습니다. 투표는 내가 국민으로서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그나마 몇 안 되는 기회인 것 같습니다.

선거철은 정치인들이 국민을 찾아오고, 머리를 조아리고,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아주 짧은 시간이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선거로 근본적인 세상의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쯤은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선거를 통해 적어도 소수자의 존재가, 그들의 권리가 소위 ‘공약(公約)’이라는 이름 하에 공론의 장으로 소환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임에는 분명합니다.

흔히들 하나의 정책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근거가 있어야 하고, 국민적 합의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현실의 정치는 꼭 논리적인 과정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결집된 목소리가 있어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을 기다려서는, 당사자가 원하는 방향으로의 해결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저는 발달장애인을 위한 별도의 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그 필요성에는 동의하지만 논리적으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발달장애인법이 박근혜 정부의 공약으로 채택되고, 제19대 국회의 1호 법안으로 통과되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면서 정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발달장애인법은 그동안 특정 장애유형을 위한 별도의 지원체계를 구축한 전례가 없었다는 점에서 장애판 내부에서도 많은 우려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애인부모연대는 결집된 힘으로 끈질기게 설득했고, 의미 있는 성과를 얻어냈습니다. 발달장애인만이 가지고 있는 욕구의 독특성, 그리고 장애 영역에서도 이중소외 받는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부모연대는 공약실현을 위해 전국 순회 간담회, 지역사회 현수막, 서명운동과 캠페인, 1인 시위 등의 집중 활동을 펼쳐 나가면서 국회를 압박했습니다.

결국 2014년 통과된 발달장애인법은 총 7장 44조로 구성되어, 권리 보장, 복지 지원 및 서비스, 가족 및 보호자 지원, 발달장애인지원센터 등에 대한 광범위한 지원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성소수자, 여성, 기후 위기 등의 이슈를 전면에 내세운 후보들도 등장했습니다. 더 이상 자신들의 문제를 누군가 대신 해결해 주기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사회적 차별과 제도적 모순, 혐오에 정면으로 맞서며 자신들의 존재를, 국민으로서의 요구를 당당히 이야기합니다.

혹자는 1%도 되지 않는 소수의 의미 없는 몸부림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서울 곳곳에 펄럭이는 오색 플래카드가, 여자 혼자도 살기 좋다는 선거 문구가, ‘탄소한계선’이라는 생소한 구호가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선거라는 판에서 드러낼 목소리와 힘이 있다는 것이 이미 변화가 시작됐다는 느낌마저 들게 합니다.

정신장애인도 선거판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드러낼 수 있는 때가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평생 한 번은 정신질환을 경험하며, 중증정신장애인 추정 수도 50만 명이나 되지만, 정작 정신장애인은 국민으로서의 정치적 존재감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관리와 통제, 때로는 혐오의 대상으로서만 소환될 뿐입니다. 정신장애인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당당히 권리를 주장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정신장애인의 ’복지권’, ‘권리 옹호’, ‘사회 참여’, ‘국가책임제’와 같은 구호들이 1호 정책으로 채택되기를 바라봅니다.

물론 저절로 되지는 않겠지요. 어쩌면 다음, 그 다다음 대선 혹은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그 첫걸음을 어떻게 내디딜까일 것입니다. 누군가 한 걸음만 나아가 준다면, 저처럼 운동화 끈을 동여매고 함께 뛰어줄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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