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장애인 혐오 이미지 부추기는 뉴제주일보 기사를 규탄한다
정신장애인 혐오 이미지 부추기는 뉴제주일보 기사를 규탄한다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1.04.11 22:5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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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애인 편견 기사에 대한 마인드포스트 입장
정신장애인은 폭력의 주체가 아니라 권리를 옹호받아야 할 삶의 주인

이런 엉터리 관리법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지난 11일 <뉴제주일보>가 조현병 당사자와 정신질환자를 국가와 사회가 관리해야 한다는 논조의 ‘조현병 방치하는 허술한 사회 안전망’ 기사를 생산했다.

해당 기자는 제주 시내에서 대낮에 길을 가던 13살 소녀를 강제추행하고 집으로 끌려가려다 미수에 그친 50대 남성이 조현병 환자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이미 성폭력 범죄로 두 차례 실형을 받고 복역했던 전력이 있었다.

그런데 기자는 “50대 범인은 조현병을 앓고 있었다”며 “‘미분화 조현병’으로 하나의 증상이 아니라 여러 가지 증상이 번갈이 나타나는 정신질환자였다”고 대중의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미분화 조현병이란 게 뭘까. 조현병 당사자인 <마인드포스트> 기자는 그런 류의 질환명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 그 기자는 어디서 이런 정보를 얻어온 것일까. 미분화 조현병이 도대체 뭘까. 한번 물어보고 싶다.

들어보지도 못한 ‘미분화 조현병’?...기자의 무지가 공포를 생산해

이 신문 기자는 또 “(조현병은) 망상에 사로잡혀 폭력 등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아주 심각하다”며 “지역사회가 조현병 환자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관리해야 하는 이유”라고 심각하게 입장을 밝혔다.

정신장애인을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시설에 집어넣고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가장 유아적인 사유와 일맥상통한다. 이 기자는 정신장애인을 만나본 적이 있을까.

대체로 기자들의 정신질환과 관련된 기사는 일정한 패턴을 보인다. 우선 기자들은 정신장애인을 만나볼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정신적 질환의 질병적 특징을 알지 못한다.

다만 사회에서 떠도는 표상과 기호로서의 정신질환은 언제나 ‘살인’과 ‘폭력’ 등으로 소비되기 때문에 정신질환자에 의한 사건·사고는 굉장히 급박하고 당면한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 축적된 정신질환자의 사건·사고는 기자의 의식에 정신질환자는 폭력적이고 위험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사회 생태계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반사회적 인격으로 소환된다.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정신질환자는 혐오의 대상이며 이 혐오와 공포는 정신장애를 가진 인구집단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 이 비난은 전후좌우의 논리가 아닌 기자의 무의식에서 폭력적 이미지로서의 정신질환자를 구성해내는 것이고 이 혐오스러운 존재가 사회의 한 구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마저 불편하게 느끼도록 만들어내는 것이다.

정신장애인이 왜 위험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뉴제주일보> 기자는 “최근 몇 년 새 제주에서 조현병 환자가 저지른 크고 작은 범죄가 있었다”며 “20대 조현병 환자는 집에 찾아온 경찰관의 목을 흉기로 찔러 중상을 입히기도 했다”고 전했다. 두려움과 공포가 구성되는 지점이다.

기자가 말한 대로 정신질환자도 사건·사고를 일으키기도 한다. 부인하지는 않겠다. 그런데 정신장애라는 특정 인구집단을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게 아니라 축적된 편견에 기대 두려움과 공포, 혐오가 되는 정신장애인이 지역사회를 돌아다니는 것을 비난하려 했다면 <뉴제주일보> 기자는 좀 더 성찰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정신장애인은 비난의 대상으로만 구성돼...언론이 이를 부추겨

당신의 논리는 택시기사가 여성을 성폭행하면 택시기사 전부가 잠재적 범죄자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며 관절염 환자가 폭행 사건을 일으키면 관절염 환자는 모두 잠재적 폭력성을 갖고 있는 존재가 된다는 의미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비정신장애인이고 고혈압 약을 먹고 있는 한 성인 남성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장난감 총으로 사람들에게 쏘는 시늉을 하면 <뉴제주일보> 기자 당신은 이걸 기사화할 수 있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조현병을 가진 정신장애인 똑같이 장난감 총을 들었다면 당신은 이걸 기사화할 것인가. 물론, 할 것이다. 기사 가치가 너무나 충분하다고 여기면서 말이다. 실제로 이런 기사가 중앙 일간지에 버젓이 발행되기도 했다.

기자들이 만들어내는 허구는 종종 정신장애라는 특정 질병에 대한 대중의 혐오와 의혹, 비난받아야 할 대상, 이성적 논리가 없는 존재들로 바라보게 하는 중심고리 역할을 한다.

그래서 <뉴제주일보> 기자 당신은 기사에서 “조현병은 우발적 범죄의 가능성을 늘 안고 있다”고 기자 본인의 두려움을 투사해 대중을 선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치료 병상도 턱없이 부족하다”며 “사회 안전망이 열악한 까닭에 조현병 환자의 범죄가 꼬리를 물고 있는 것”이라고 당신은 썼다.

기자의 글쓰기는 사실을 쓰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신화로 구성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하나의 기사가 특정한 집단을 타자화할 때, 그 텍스트를 읽는 언론소비자는 정신장애와 정신질환에 대해 극도의 공포심을 갖게 된다.

그 와중에 정신장애인에 의한 사건·사고가 나면 불편하고 두려운 존재를 왜 우리 사회가 먹여살려야 하고 이들에게 온정을 베풀어야 하냐는 식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 결론의 마지막 골목길에는 정신장애인이 산속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시설로 들어가서 ‘다시는’ 사회로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비난과 강요의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이 같은 이론은 이미 우생학의 주류 이데올로기였으며 독일 나치가 탄생하게 되는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나치 이전의 독일 법학자 칼 빈딩은 “노동자도 되지 못하고 군인도 되지 못하는 버러지같은 정신장애인들을 왜 국가가 먹여 살려야 하는 것인가”라고 질문한다.

나치의 통치는 끝났지만 이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유령처럼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기자의 이념은 이 파시즘 논리와 거의 일치한다. 결국 ‘버러지 같은 존재들’을 먹여 살려야 하냐는 의미로 귀착되는 것이다.

정신장애인 관리 문법은 파시즘 사유

<뉴제주일보> 기자 당신은 파시스트인가. 그래서 당신은 기사 말미에 “정신질환자 문제는 지금 제주의 사회적 당면 과제”라며 “관리 제도를 보완하는 노력을 서둘러야 한다”고 너무나 ‘쿨’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정신장애인은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싶어하는 인격적 존재들이다. 기자 당신이 원하는 관리란 도대체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인가. 당신이 말한 “더 심각한 상황이 오기 전에”라는 단서는 어떤 상황의 도래에 대해 두려움인가.

치매 인구에 대한 국가책임제는 국가가 사회적 약자이자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특정 질병에 대해 국가가 보호하고 치유해 나가겠다는 의지로 만들어진 국가 정책이다.

<뉴제주일보> 기자가 혹시 치매 노인이 장난감 칼을 들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당신은 그 치매 환자의 폭력성과 충동성, 우발적으로 발생할 위험성을 ‘야마’(주제)로 해서 기사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그리고 치매 환자가 누군가를 폭행했다면 치매환자의 폭력성에 대해 기획 기사를 쓸 것인가. 아니지 않은가.

당신처럼 정신질환을 폭력과 살인의 이미지로 등치시키는 기자들의 기사 결론은 늘 그렇다. 즉 “관리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는 것.

언론은 사건·사고에 개입된 정신질환자가 있다면 이들의 폭력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마지막 결론에서는 아량을 베풀 듯이 “정신질환자 모두를 범죄인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말해 왔다.

이는 사람을 때려놓고 사람을 때리는 건 윤리적으로 나쁘다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정말 당신들 기자들이 해야 할 일은 한국 사회 정신보건 시스템에 대한 점검과 정신장애인의 국가책임제가 가지는 사회적 의제의 중요성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버스 기사 한 명이 졸음운전을 해서 사고가 나면 모든 버스 기사가 졸음 운전을 해 “사회를 위협한다”는 식의 기사를 심각하게 쓸 수 있을까.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당신은 버스 기사들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과도한 운행에 시달리는 시스템의 문제를 먼저 짚지 않을까. 그리고 운전사들에게 최소한 하루에 10시간 이상의 운행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의 제정을 요청하지 않을까.

언론은 정신장애인 국가책임제를 요청해야

정신장애도 마찬가지다. 정신장애인 한 명이 사고를 일으켰을 때 그 표상을 두려움과 의혹, 공포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정신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제도를 국가정책으로 요청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단순히 ‘관리 사각지대’에 정신장애인들이 있다는 식의 공포를 조성하기보다 이들에게 국가와 사회가 어떤 방식의 복지와 인권적 치료를 제공해야 하는지를 알리고 그 제도의 성립을 위해 국가에 요청하는 것이 더 올바른 기자의 시선이 아닐까.

<뉴제주일보> 당신의 기사로 정신장애인은 한 번 더 ‘괴물’과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정신장애인은 괴물이 아니다. 그들은 지역사회에서 충분한 돌봄 서비스를 받으면서 인간으로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너무나 평범한 우리의 이웃일 뿐이다. 엉터리로 관리의 시선만을 강조한 기자, 당신의 사과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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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2021-04-12 22:40:30
기자분과 독자분들을 위해서 용어와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 설명을 드립니다.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DSM)'에서는 DSM-4에서 DSM-5로 넘어오면서 더이상 조현병의 세부 타입구분은 하고 있지않으나, 현재 ICD-10에서는 여전히 세부 타입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도 역시 국제적 기준인 ICD-10을 기반으로 질병 및 관련 건강문제를 분류하고 있어서 지금도 진단서상에는 '편집형 조현병'이나 '미분화형 조현병'같은 용어가 등장하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