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 박 감독 “다큐멘터리 만들면서 조현병 당사자도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 알게 돼”
펄 박 감독 “다큐멘터리 만들면서 조현병 당사자도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 알게 돼”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1.06.05 03: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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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영화 ‘캔’ 제작한 한국계 미국인 펄박(Pearl J.Park) 감독 강연
베트남계 미국인 캠 트롱의 정신질환 경험과 회복 과정 담아내
영화 속 정신장애인 당사자의 시선과 비주류 이민자의 삶 담아
희망은 회복의 기초가 되는 개념...용서 역시 필요해
이민자 인구에서 정신질환 경험자 높은 수치 보여
정신질환 커밍아웃은 질환을 이해하는 이에게 해야
치유와 회복은 전 생애적인 여정으로 생각해야

여기, 다큐멘터리가 있다. 러닝 타임 65분. 베트남계 미국인인 캔 트롱(Can Truong)의 이야기다. 1970년대 베트남이 공산화될 때 캔은 6살이었다. 그의 부모는 보트피플이 됐다. 말레이시아와 이탈리아를 거쳐 그들은 미국 오하이오 주 애크론에 정착한다.

캔은 유난히 머리가 좋았다. 고등학교 시절 전국 과학 올림피아드에 나가 오하이오 주에서 1위를, 전국에서 4위를 차지했다. 이후 시카고 대학교 의대에 들어갔다. 앞날이 한없이 빛나던 그. 그러나 대학 시절, 조울증(양극성정동장애)을 갖게 된다.

의사와 면담을 하면서 “저는 지금 너무 좋아요. 우울이 끝났어요”라고 자기방어를 했다. 그러나 조증은 그에게 주식시장에 투자해 1년에 10만 달러를 벌 수 있다는 ‘망상’을 가지게 했다. 일단 쓰고 보자는 심리로 그는 3만2000달러짜리 차를 사기도 했다.

조증은 물러나지 않았다. 결국 약을 먹었고 약의 부작용에 취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대학을 떠났다. 그리고 자신의 정신적 고통을 야기했다고 여겨지는 과거의 삶을 현실로 소환해 마주했다.

캔은 어린 시절 아시아 인으로 차별과 괴롭힘을 당했다. 백인이 아닌 자신의 정체성을 못마땅해했다.

아시아계 미국인은 감정 말하지 않아...“나는 그 대가를 치렀다”

아이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울면서 집으로 왔지만 자신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아들의 병을 알게 된 어머니는 의사가 되라는 적극적 후원을 포기하고 “아픔을 견뎌내고 병을 받아들이라”고 조언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강한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자신의 성공과 전쟁터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이야기들, 결국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살아왔다는 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캔은 “아버지는 제가 당신만큼 훌륭하지 않고 결코 그만큼 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아시아계 마이너리티로서 사회문화적으로 압박을 받아야 하는 이민자들의 모델은 저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그것은 삶에 대한 억척스러움이며 주류 사회 주변부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발적 포기와 맥락을 같이 한다.

부모는 주변부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살았지만 아들은 마이너리티에서 중심 문화로 들어가던 순간, 정신이 분열돼 버렸다.

캔은 자신을 연구했고 자신과 대화했고 과거를 소환해 직면했다. 그리고 억압의 주체였던 아버지를, 또 다른 다층적 억압의 기제였던 커뮤니티의 삶에서 받았던 슬픔을 어느 날, 그는 용서했다고 한다.

캔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정신적 문제 중 하나는 많은 경우 감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나는 그 대가를 치렀다”고 말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나를 때릴 때 무서웠고 나를 다치게도 했다”며 “과거에 나는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고 토로했다.

아버지는 캔에게 말한다. “아시아인들의 사랑은 서양의 방식처럼 열려 있지 않다. 아시아 사람들은 항상 가슴에 무언가를 묻어둔다”라고.

캔은 어린 시절, 가난한 아버지가 자신을 바이올린 학원에 보낸 것을 기억했다. 그럴 경제적 여유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캔은 “아버지가 나를 사랑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됐다”고 말한다.

그는 그렇게 회복의 길로 들어섰고 2002년 라이트 주립대학에서 마케팅학과를 졸업하게 된다.

주류 사회에 진입할 수 없는 유색인, 특히 아시아계 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늘 낮은 목소리로 주변에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의제와 정치적 권력은 백인들의 무대에서나 가능했다. 아시아계 미국인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안다. 작은 커뮤니티 안에서 비슷한 경제적 수준의 아시아인들과 교류해야 한다는 것을.

아시아계 마이러니티의 삶은 다층적 억압에 노출돼

그리고 사회문화적으로 다층적 억압을 받는 아시아계 미국인은 그 자체로 정신적 해리 현상을 겪을 수밖에 없다.

영화는 정신질환과 회복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미국의 인종적 소수자가 가지는 분열된 의식을 드러낸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한국계 미국인 펄 박(Pear J.Park)이다. 그가 영화를 만든 건 자신의 가족사에서 비롯된다. 할아버지는 조현병 당사자였다.

한국 문화라는 정체성을 가진 부모는 그 질병을 개방하기보다 숨겼다. 펄 박은 혼란을 느낀다. 그는 미국 사회에서 미디어가 주는 메시지와 힘의 영향력을 생각했다.

그리고 미국의 문화적 작동 체계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의 정신질환을 드러내고 싶었다. 영화를 만든 이유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그는 제철웅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한국후견·신탁연구센터장)의 요청으로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영화와 정신질환에 대한 강연을 진행했다. 지난 4일, 그는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한국 대중에게 소개했다.

영화를 준비하면서 그는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을 만나 영화 참여 의사를 물었다. 당신의 삶을 공개해도 되는지, 정신질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지. 없었다. 딱 한 명, 캔을 빼고는.

이민자 인구에서 정신질환의 비율은 굉장히 높다고 펄 박은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민자 인구가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와 불안장애, 우울장애를 겪을 확률은 최대 80%다.

펄 박은 캔을 캐스팅한 후 2005년 영화 크랭크 인에 들어간 후 2009년 완성한다. 4년 가까운 시간이 걸린 것에 대해 그는 “영화 마지막에 정신장애의 해결책이 들어가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펄 박은 “나는 진실을 찾기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며 “중요한 건 조현병 같은 질환에서도 사람들이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신질환자들이 아동기에 부정적인 경험을 가진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며 “정신질환으로부터 목적 지향적인 회복은 전체적인 것이어야 하며 그 사람의 삶의 모든 측면을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 이민자 인구 80%가 다양한 정신질환 경험해

그는 “이 영화를 찍으면서 가장 불쾌했던 경험은 많은 사람들이 어릴 때 성폭력과 폭행을 당했다는 것”이라며 “이건 단순히 어린 시절 경험이 정신질환을 유발하는 것만이 아니라 생물학적 요소도 포함된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영화를 찍기 전까지는 정신질환은 나을 수 없는 병이며 약이 질환에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다 만들고 나서 그는 정신과 약이 많이 팔리는 것과 효과성은 별개라는 걸 알게 됐다고 한다.

펄 박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신질환으로부터의 회복의 개념을 네 가지로 정리했다. 우선은 희망. 그는 “희망은 회복의 기초가 되는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교육. 그는 “교실에서 배우는 교육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들에 대해 모든 것을 학습하고 삶의 모든 측면에 대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게 자신을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용서. 그는 또 인간관계가 회복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가족이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지만 가족이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며 “우리가 가진 감정, 생각하는 것들을 누군가가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신질환을 가지게 되는 것과 그것을 세계에 발화하는 것은 깊은 괴리가 있다. 자신의 정신질환을 발화하는 순간, 인간은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그는 “수치심은 나에게 내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감정인데 이는 자신을 숨기게 만들고 그 이야기를 숨기고 싶게 만들어 버린다”고 말했다.

이어 “수치심은 나를 사랑하고 지지하는 환경에서는 절대 자라날 수 없는 감정”이라며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 자체가 문화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고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펄 박이 제시한 네 가지 회복의 개념이 온전히 작동했을 때 우리는 회복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회복은 하나의 개념으로 묶을 수 없다. 그 개념의 경험은 다양하고 다층적이다.

펄 박은 “진정으로 치유되기 위해서는 그 아픔을 온전히 느껴야 한다”며 “치유와 회복은 전 생애적인 여정으로 생각해야 하며 좀 더 전체론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결국 약물만으로는 인간은 온전한 회복을 경험할 수 없다.

그는 “어떤 옹호자로부터 ‘자신보다 더 큰 목적을 믿으세요’라는 말을 들었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줌으로써 공감을 형성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힘이 된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결국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희망은 회복의 토대

그리고 캔은 영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희망은 회복의 토대다.”

펄 벅 감독의 강연이 끝난 후 토론자로 참여한 이들이 감상을 이야기했다.

강은일 정신장애와인권 파도손 활동가는 “정신질환은 대인관계로 인한 상처, 혹은 가난한 집안 생활로 인해 마음 속 상처들이 질환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며 “캔이 상처준 사람과 환경을 용서했듯이 개인이 성숙해지면 과거와 마주하고 용서하게 되면 정신적으로 편안해질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이어 “누군가 정신장애인 당사자에게 손을 내밀어준다면, 또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캔 트롱처럼 될 수 있다”고 전했다.

이어 권순택 파도손 활동가는 “의미 없이 사는 도중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살라’는 어떤 글귀를 읽는 순간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며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내면이 성장하고 새로운 꿈을 꾸면서 달려갈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당사자 가족인 문정희 씨는 “당사자와 같이 그 길을 가야 하는 가족 입장에서는 지팡이 역할을 해 줄 프로그램과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끼리의 지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애완견의 언어를 사람들이 배우듯이 경험을 통해 당사자의 언어를 배우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며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돼도 경험하고 관찰하다보니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사자의 행동을 보면서 저게 무엇을 뜻하는지 경험적으로 알 수 있어서 힘을 받는 느낌”이라고 전했다.

캔처럼 상처 준 사람과 환경을 용서할 수 있어야

정신장애인 당사자 예술단체 광장에서 활동하는 박목우 씨는 “삶에서는 생존 못지않게 음악적인 것, 시적인 것도 필요하다는 걸 캔이 말해주고 있다”며 “캔이 찾은 마지막 긍지는 시인이 가지는 긍지가 아니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봤다”고 말했다.

이어 “캔의 언어와 행위가 인증받고 승인받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일종의 부활을 연상했다”며 “침묵당하고 억압받던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기록하고 다른 이의 삶에 기여한 과정을 짚어준 영화”라고 전했다.

제철웅 교수는 “환청과 환시는 내 이야기가 아니라 의사의 이야기”라며 “나한테는 실제로 들리는 소리다. 내가 경험하는 소리이고 나에게는 진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는 나의 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 인간이 경험하는 진실”이라며 “그 과정의 삶을 같이 공유할 때 내가 회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진 온라인 질의응답에서 한 온라인 참여자는 한국 사회는 약물 복용을 강조하는 사회인데 정신과 약물은 어떤 기능을 가지는지를 묻는 질문을 던졌다.

펄 벅은 “조현병 치료를 위해 약물이 유일한 치료 방법이 아니다”라며 “약물이 기능적 상태를 호전시키지만 우리는 아직 조현병의 근원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신질환을 경험하는 사람에게 무엇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당신이 잘 기능하고 회복할 수 있는 도구로서 진단이 되는 것이지 당신의 삶에 큰 문제가 된다면 진단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어 정신질환을 공개하는 것이 회복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에는 “정신질환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가진 이에게는 좋지만 그런 이해가 없는 이들에게는 부정적 편견을 주게 된다”며 “당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줄 역량이 있는지에 따라 공개하는 것이 달려있다”고 조언했다.

제 교수는 “정신질환이 수치스럽기 때문에 공개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현명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며 “무턱대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좋은 선택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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