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형 기자의 변론] 조현병을 보는 오래된 시선들...주류 언론이 만든 위험과 폭력의 신화 앞에서
[이관형 기자의 변론] 조현병을 보는 오래된 시선들...주류 언론이 만든 위험과 폭력의 신화 앞에서
  • 이관형 기자
  • 승인 2022.05.26 19: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신과의사 필립피넬 기념, 5월 24일은 세계 조현병의 날
한국 언론은 이날에 조현병 사건 일제히 보도..세계 기념일 다룬 기사 없어
주류언론이 소비하는 정신장애는 살인과 폭력에 집중...당사자 숨게 만들어
출처 :
(c)국립정신건강센터

5월 24일은 ‘세계 조현병의 날’입니다. 국제사회는 조현병에 대한 인식을 개선할 목적으로 지난 1986년부터 매년 5월 24일을 조현병의 날로 정했습니다. 이날은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질환자들을 쇠사슬로부터 해방시킨 필립 피넬의 생일을 기리며 정한 날짜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 날에 대한 취지나 홍보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국립정신건강센터 블로그에 올라온 내용 말고는 이 날에 대한 정보를 찾아볼 수 없었죠. 기자는 네이버 뉴스에서 ‘세계 조현병의 날’을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최신 뉴스를 위주로 찾아보았지만, 5월 25일 기준으로 단 한 곳의 언론사도 이날에 대한 의미나 정보에 대한 기사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출처 : 네이버 뉴스 캡쳐
사진=네이버 뉴스 검색결과 갈무리

대신, 이날 수많은 언론사들이 앞 다투어 보도한 사건이 하나 있었죠. 조현병과 양극성장애를 가진 한 남성이 식당에서 14개월 된 아이가 앉아 있던 유아용 의자를 넘어뜨린 사건입니다. 아이는 뇌진탕 진단을 받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고, 아이의 아버지는 남성의 뒤통수를 두 대 정도 때렸습니다.

이후 아이의 부모는 이 남성을 고소했습니다. 가해 남성의 가족들은 처음에는 선처를 부탁했지만, 고소를 당하게 되자 태도를 바꿔 아이의 아버지를 폭력 혐의로 맞고소를 했습니다. 뒤통수를 두 대 때렸다는 이유로 말이죠. 아이의 아버지는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경찰 측은 “아이에 대한 가해 남성의 폭력 상황이 이미 종료된 상태에서 아이의 부모가 가해 남성을 폭행했기 때문에 정당방위가 성립되기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올해 ‘세계 조현병의 날’은 무관심 속에서 잊혀지고, 오히려 안익득 사건 이후로 가장 혐오와 편견이 심해지게 되는 날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가해 남성에 대해서 변호하거나 감싸주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조현병이나 조울증을 가진 당사자라는 이유로, 어떤 폭력과 범죄도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인드포스트>도 정신장애 당사자의 목소리를 내는 언론사지만, 폭력과 범죄를 저지르는 당사자의 입장을 대변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가해자가 조현병의 이름을 들먹이며 스스로의 죄 값을 덜려는 행동은 다른 다수의 선량한 당사자들에게 큰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가해자는 조현병 여부를 떠나 지은 죄에 맞게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려가 되는 점은,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해자 한 사람을 너머 조현병을 가진 모든 당사자와 가족들에게 분노와 혐오의 비난을 쏟아낸다는 사실입니다. 기자가 찾아본 댓글도 이러한 현상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출처 : 네이버 뉴스 댓글
사진=네이버 뉴스 댓글 갈무리

기자는 그동안 정신장애에 대한 인식개선을 위해 나름 노력해 왔습니다. 책과 기사를 쓰는 것뿐 아니라, 얼굴을 공개하고 발품을 팔아가며 방송과 강의를 해왔습니다. 조현병과 같은 정신장애에 대한 올바른 정보와 인식 개선을 위해 차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희망을 갖고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이 한번 발생하면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기를 반복해왔습니다.

기자는 이번 일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거대 메이저 언론의 영향력과 파급력은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하다는 사실을. 많은 당사자와 가족들의 노력으로 ‘정신질환 보도 가이드라인’을 만들었지만 이는 바위를 깨기 위해 계란을 던지는 것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마인드포스트>와 메이저 언론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아니라, 개미와 코끼리의 말도 안 되는 싸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이죠.

이처럼, 대형 메이저 언론사를 통해 조현병 관련 범죄 보도가 물 붓듯이 쏟아지면 많은 당사자와 가족들은 병을 빨리 완치해 조현병 환자의 딱지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랄 것입니다.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지인들의 눈을 피해 신경정신과를 찾아야 하고, 약 봉투도 집 안 보이지 않는 구석에 숨겨놔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불안과 염려 속에서 누구에게도 아픔을 털어 놓지 못한 채 가슴 깊이 묻어두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조현병이나 조울증은 물론 가벼운 우울증이나 불면증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병에 대한 잘못된 정보로 인해, 약에 의지하지 않고 강한 정신력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증상이 심해져 뒤늦게 병원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해도, 이미 초기 치료의 기회는 놓치고 후회만 남게 됩니다.

만약 조현병을 잠재적 범죄자를 만드는 병으로, 혹은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면 증상의 고통에 더해 자신의 신변을 비관한 채 극단적 선택을 할 수도 있겠죠. 우리나라는 조현병 환자로서 평생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낙인 속에서 사는 것보다, 정신과 진료 기록 없이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는 편이 자신에게나 가족들에게 더 명예로운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조현병 환자의 인구는 전체 대비 1%에 달한다고 합니다. 계산해보면 우리나라에는 약 50만 명의 사람들이 조현병을 겪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수치를 비교해보면 정신장애인의 인권과 권리를 위해 활동하는 당사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분별한 조현병 관련 범죄 보도를 접하며 자신의 질병과 얼굴을 드러낸 채 활동하는 것은 큰 부담이 되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당사자 활동가들이 모두 사라지고 미래를 책임질 새로운 당사자 활동가들도 나타나지 않는 대한민국 사회를 상상해 보십시오.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의사나 교수 같은 전문가들이 우리의 입장을 대변할 것입니다.

당사자들의 권익과 인권 옹호를 위한 모임은 사라지고 오직 치료를 위한 클리닉과 병동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가족들 역시 진료와 약물에 관심을 가질 뿐, 당사자의 인생과 비전은 모두 의사에게 맡기게 될 것입니다.

<마인드포스트>와 같은 매체와 기자들이 사라지고 나면, 당사자들의 삶의 모습은 메이저 언론의 기자들에 의해 그려질 것입니다. 조현병을 안고 당당하게 삶을 살아가는 당사자의 모습 대신, 의사의 지도와 진료에 따라 약을 잘 먹어 회복된 착한 환자들이 부각될 것입니다.

조현병을 갖고도 사회에서 능력과 직위를 인정받는 당사자들은 정신질환의 낙인과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병을 숨길 것입니다. 대신 병원에서 퇴원하여 직업을 갖고 기초수급대상자에서 벗어난 환자들이 병을 극복한 사례로 치켜세워질 것입니다. 사회와 언론은 정신질환을 갖고도 비장애인 이상으로 살아가는 당사자들을 본적도 없고 보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자는 앞서 말한 염려가 이루어지는 세상이 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지만 이 사회는 정신장애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더 완화되는 게 아니라,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앞서 혐오와 차별로 가득 찬 댓글을 보여드린 것도 현재의 현실과 상황을 보여드리기 위함입니다.

사진=네이버 뉴스 검색결과 갈무리

어제 화제가 되었던 기사와 댓글들을 접하면서 걱정과 고민에 잠을 쉽게 이룰 수 없었습니다. 강연을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당사자의 편에 서달라고 외쳤던 목소리가 명분도 설득력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열심히 기사를 써도 대중들이 읽는 건 결국 메이저 언론의 뉴스라는 사실에 이제는 포기할 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인드포스트> 기자로서 메이저 언론사의 조현병 관련 기사를 읽다보면, 코끼리 발에 밟히는 개미가 된 듯 무기력과 회의감을 느낍니다. 한 마리의 개미는 일대일 싸움에서 그 어떤 동물에게도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약합니다. 그래서인지 개미들은 수많은 무리가 몰려다니면서 다른 동물들과 맞섭니다. 개미 한 마리는 자신의 몸무게보다 40배나 더 무거운 물체를 들 수 있는 잠재력이 있습니다. 이러한 개미들이 모여서 개미군단을 만들면 매서운 말벌이나 사마귀, 더 나아가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에 상대 못 할 동물이 없을 것입니다.

수많은 당사자와 가족들, 단체와 모임을 생각하며 다시 힘을 내기로 다짐했습니다. <마인드포스트> 기자로서 기사를 쓸 때는 혼자지만, 그 기사를 읽어 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분들을 잊지 않으며 당사자와 가족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을 이어나가겠습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