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언니의 책방] 우울한 생각을 멈추게 만드는 춤
[삐삐언니의 책방] 우울한 생각을 멈추게 만드는 춤
  • 이주현 기자
  • 승인 2022.10.26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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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언니의 책방 ⑩ 달리기와 존재하기

조지 쉬언 지음·김연수 옮김, 한문화

달리기에 처음 눈을 뜨게 된 건 2005년 늦봄이었다. 회사에서 야근 중이었는데, 당시 마라톤에 심취해 있던 선배 A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주현, 같이 달리기 하자!” 나는 지체 없이 답했다. “네. 언제부터요?”

지금도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다. 좀 과장되게 얘기하자면, 예수가 갈릴리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베드로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베드로가 그물을 버리고 당장 따라나섰던 것과 비슷했다. 나는 이틀 뒤 집에서 놀고 있던 운동화(러닝화도 아니었다)를 신고 한강으로 나갔다. 

그해 나는 몇번의 하프마라톤 대회를 거쳐 42.195km 풀코스까지 완주하기에 이르렀다. 그럼, 지금까지 계속 꾸준히 달리기를 했냐고? 설마…. 나는 그런 신실한 사람이 못 된다. 그 뒤 몇년간은 아예 달리기와 담을 쌓기도 했다. 하지만 굳이 달리기가 아니라도 좋았다. 걷기·등산 같은 두 다리로 하는 행위에 늘 마음이 닿아 있었다.   

2년 전 고도의 집중력과 체력이 요구되는 업무를 맡은 적이 있었다. 인사 발령이 난 직후 한 달 동안 제대로 잠도 잘 수 없었고 밥도 먹을 수 없었다. 낡은 외투 소매처럼 마음이 나달나달해져 있었다. 

극심한 피곤에도 쉬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던 어느 토요일 오후, 나는 그냥 운동화를 신고 한강으로 나갔다. 컨디션이 안 좋아 도저히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그저 다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나는 그때 깨달았다. 이 고통 역시 지나가리라는 것을. 나는 일을 망치지도 않을 것이며 나도 망하지 않을 거야. 아무튼 이렇게 달리고 있잖아? 

이 무렵, 의사이자 장거리 러너인 조지 쉬언의 <달리기와 존재하기>를 만난 것은 축복이었다. 좀 달려본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그 책은 달리기의 경전이야. 정말 그랬다. 달리기에 영감을 주는 문장이 가득했다.

“숙명의 존재 유무가 아니라 그 숙명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런 삶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진실을 경험하지 못하고, 내면이 부름을 듣지 못하고 종말에 다다를 수도 있다. 그 영혼을 한 번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 우리에게 준비된 삶을 살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비극이다. 

니체는 그런 끔찍한 상황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사소한 것들에 주목하라. 영양섭취에 신경을 써라. 자신이 먹는 음식을 살펴보라. 자신이 사는 곳과 들이마시는 공기에 대해 따져보라. 자기를 지키는 일에 동물적인 감각을 발달시켜라. 삶을 하나의 놀이로 만들어라.” 

조지 쉬언 지음, '달리기와 존재하기', 김연수 옮김, 한문화, 2020.
조지 쉬언 지음, '달리기와 존재하기', 김연수 옮김, 한문화, 2020.

쉬언은 달리기를 ‘삶을 즐기는 놀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놀이에 집중하면 자신의 본모습을, 영혼을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내가 달리면서 놀고 있으면 어떤 사람들은 꽤나 한가하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얼마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지, 온 마음을 모으고 집중하고 있는지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부엌으로 가라, 거기에도 신은 계시다’라고 말했다. 길로 뛰어나가 놀 때 우리는 건강한 삶이 무엇인지, 자신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알게 된다. 

거리는 우리가 자신의 꿈에 대한 각본을 쓰고 실제로 연기하는 극장이다. 물론 처음에는 뼛속 깊은 곳까지 내려가야만 하다. 그러면 서서히 다른 어떤 것과도 대체할 수 없는 독특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이해하게 된다.”

조울병을 비롯해 정신질환의 괴로움은 어떤 생각에 사로잡히면 헤어나오기 힘들다는 데 있다. 가령, 우울에 빠져들면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를 물며 무한 하강 곡선을 그린다. 앞으로 좋은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내 삶은 의미 없다는 생각, 그냥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 이때 가장 필요한 일은 긍정적 생각을 갖는 것이 아니라, 생각 그 자체를 멈추는 일이다. 사소한 일에 마음을 쏟으며 생각을 잊는 일이다. 나는 달리기가 바로 그 해법이라고 생각한다. 달리기는 생각을 멈추게 만드는 아름다운 춤이다. 

마음이 고단할 때면 쉬언의 책을 들춰본다. 그는 거의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얼마 전엔 이 문장을 읽었다. 

“내가 달리는 모든 1마일은 늘 첫 번째 1마일이다. 길에서 보내는 매시간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다. 날마다 러닝복을 입을 때마다 나는 처음 본 것처럼 삼라만상을 보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평범한 것을 비범하게 보며 다시 태어난다.”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를 쓴 삐삐언니가 매달 마지막주 수요일 <마인드포스트> 독자들을 만납니다. 조울병과 함께한 오랜 여정에서 유익한 정보와 따뜻한 위로로 힘을 준 책들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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