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 에세이] 산을 마시다
[당사자 에세이] 산을 마시다
  • 정송희
  • 승인 2023.04.06 22: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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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정송희 씨 제공.
사진=정송희 씨 제공.

매일 점심을 먹고 나면 산으로 향한다. 내가 일하는 보건소 뒤편으로 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그 길에 접어들면 답답한 마스크를 벗고 깊숙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그러면 폐 속으로 맑은 공기가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이런저런 생각들로 엉켜있던 머릿속도 개운해지는 듯하다. 한 발짝 두 발짝 오르막길을 오를 때 다리에 힘을 주어 걷는데 그 순간 잠깐이나마 발에 뿌리가 내린 듯하다.

아! 같이 산에 오르는 동료를 빼놓을 수는 없다. 작년에는 직장 동료 재기 씨와 산을 올랐고, 올해에는 같은 직장 동료 승희와 산을 오르고 있다. 재욱 씨는 활달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느라 오르던 걸음을 몇 차례 멈춰야 했는데 비해, 승희는 과묵해서 내가 먼저 말을 해야 한다. 승희는 오르막길을 힘들어한다. 쌕쌕- 숨소리를 내며 뒤에서 따라오는데 엉덩이를 붙일 벤치가 보이면 갑자기 걸음이 빨라져 나를 따라잡고 저 멀리 있는 벤치로 쭉쭉- 나아간다.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수 있다.

산에서는 사람들 간의 거리도 가까워진다. 도시 생활에 익숙해져서 모르는 사람에게 말 걸기가 쉽지 않은데, 나보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과 언니들이 내게 말을 걸곤 한다. 어떤 언니는 접한 지 2년 즈음 되었는데, 처음에는 나를 안쓰러워하며 좀 더 힘을 내라고 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좋아지고 있다며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리고 어떤 어르신은 내가 힘없이 걷는다고 호통을 쳤다. 자기는 암 투병 중인데도 이렇게 힘있게 걷는데 젊은 사람이 왜 그리 힘이 없어 보이느냐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내 자세를 점검하게 되었다. 약간 구부정한 가슴을 젖히고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다리에 힘을 주어 걷는다. 그렇게 나는 변했다. 아직도 멍하게 생각에 빠져들었다가 정신이 들면 가슴이 구부정하게 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버릇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 계속 알아차리고 고쳐가야 할 것이다.

2023년 올봄은 참 신기하게 왔다. 이제 진달래가 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2~3일째 산 이곳저곳을 살폈는데 하룻밤 사이에 진달래가 산 가득히 핀 것이다. 그리고 그날 도로변 가로수 길을 걷는데, 목련도 조팝나무도 벚나무도 개나리도 심지어 라일락까지 꽃이 피었다. 마치 나무들끼리 오늘 꽃 피우자고 약속이나 한 듯이.

사진=정송희 씨 제공.
사진=정송희 씨 제공.

내가 알고 경험한 바로는 꽃이 피는 순서가 있다. 제일 먼저 산수유에서 시작해서 진달래, 목련, 개나리, 조팝나무, 철쭉, 벚나무, 라일락 순이다. 심지어 라일락이 피는 시기는 초여름인데 초봄에 핀 것이니까 한 계절이 앞당겨진 것이다. 나는 그날 하루, 꽃들의 잔치를 즐기며 춤추듯이 꽃들 사이를 걸었다.

그런데 비가 오지 않고 날이 가물어서인지 순식간에 만개했던 꽃들이 또한 순식간에 지고 있다. 메마른 흙에 뿌리를 내리고 어디서 그 힘이 나왔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활짝 핀 꽃들이 꿀벌들의 방문도 받지 못하고 져버리는 광경은 안타깝고 슬프다. 벌이 수분을 하지 못하는 것은 꽃들의 개화 시기와 기간이 이르고 짧기 때문이다.

오늘 저녁부터 비가 온다고 한다. 땅을 듬뿍 적셔주고 스며들어서 나무들의 뿌리로 스며들기를 기원한다. 그래서 꽃들의 때 이른 개화를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꽃의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길 바란다.

오늘도 나는 산에 오른다. 진달래꽃이 지고 연둣빛 이파리가 돋아나 활짝 피우는 풍경을 보며 새로운 내일을 꿈꾼다. 몇 주 후에는 이파리가 커지고 초록빛으로 진해져서 햇빛으로부터 듬뿍 아낌을 받아 한 그루의 나무가 살아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때 나는 단단한 땅을 밟으며 한 그루의 나무가 전해주는 에너지를 들이마시며 더 성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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