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언니의 책방] 이별엔 더 많은 연필이 필요하다
[삐삐언니의 책방] 이별엔 더 많은 연필이 필요하다
  • 이주현 기자
  • 승인 2023.05.08 2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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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언니의 책방 (16) 상처입은 당신에게 글쓰기를 권합니다
박미라 지음·그래도봄 펴냄

얼마 전 연필을 샀다. 존 스타인벡이 처음 써보곤 “종이 위에서 활강하며 미끄러진다”고 표현했던, 한 자루에 3천 원쯤 되는 좀 비싼 연필이었다. 검정, 회색, 흰색을 놓고 한참 고민하다가 좋은 숙소의 깨끗한 침구류를 떠올리며 흰색을 택했다. 연필을 줄 사람이 있었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 

 H는 어디서나 눈에 띄던 친구였다. 총명하고 씩씩했다. 명쾌한 논리로 짜임새 있게 직조된 그의 글엔 풍부한 감수성이 배어났다. 그런데 얼마전 위기가 찾아왔다. 불의의 사고로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것이다. 빈소에서 만난 그는 충격으로 영혼이 하얗게 얼어붙은 듯했다. 후회는 기억을 짜깁기해 그를 괴롭혔다. 나는 왜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해주지 못했을까. 나는 왜 더 사랑한다 말해주지 못했을까. 그는 입술을 깨물며 소주잔을 들이켰다. 

박미라, 상처 입은 당신에게 글쓰기를 권합니다, 그래도봄, 2021.
박미라, 상처 입은 당신에게 글쓰기를 권합니다, 그래도봄, 2021.

상을 치르고 오랜만에 다시 만난 H는 다소 풀기가 빠진 모습이었다. 반가워하며 웃었지만 입가에 쓸쓸함이 감돌았다. 뭔가 건네고 싶어 며칠 동안 궁리하다가 연필을 떠올렸다. 핼쑥한 그에게 메모와 함께 연필을 건넸다. “쓰다보면, 쓰다보면…. 힘내라.”

사실, 연필 이전에 그를 생각하면서 떠올린 책이 있었다. <상처 입은 당신에게 글쓰기를 권합니다>. 다만, 아직 아픔을 돌아보고 곱씹을 단계에 이르지 못했을 그에게 너무 직설적인 메시지가 될 수 있어 좀 미뤄야겠다 싶었다. 

이 책이 나온 때는 내가 조울병의 이력을 적은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를 낸 이듬해였다. 20년 투병의 기록을 책으로 엮어냈으므로, 글쓰기를 통한 회복 과정에 대해선 어느 정도 잘 안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그런데 막상 이 책을 펼쳐들자 밑줄을 마구 그어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새겨둘 말이 정말 많았다. 책을 다 읽은 뒤 도움이 될 만한 문장을 아예 적어놓았다.   

이 책을 쓴 심리치유 글쓰기 전문가 박미라는 좋은 선생이 그러하듯 친절하면서도 엄정하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가령 상처를 털어놓는 글쓰기를 통한 표현의 힘을 말할 떄도 자신이 말하고 싶지 않은 것엔 입을 다물 권리가 있음을 강조한다. “침묵으로써 보여주는 자기 표현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글쓰기는  나쁜 기억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힘을 길러준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던 일들도 글로 쓴 뒤에 읽어보라. 어느새 나에게서 좀더 멀어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멀어진 만큼 견딜만해졌다면 이번에는 같은 일을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글을 써보라. 좀더 자세히, 구체적으로 묘사해서 늘려쓰기를 몇번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일에서 초연해진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때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저 종이 위에 기록된 사건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H에게 이 책에 실린 카자흐족의 사냥꾼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상처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 그가 글쓰기를 통해 온전한 이별의 과정을 겪으면 좋겠다. 

“카자흐족은 독수리를 길들여 맹수를 사냥하도록 훈련한다. 이렇게 독수리 사냥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베르쿠치라고 한다. 베르쿠치가 한 마리의 독수리를 길들이고 훈련하는 기간은 6개월 가까이 걸리며 10여년을 그 독수리와 함께 살아가다가 시간이 흐르면 떠나보낸다. 떠나보낼 때 베르쿠치는 자기들만의 의식을 거행한다.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높은 산에 올라가 자기 손 위에 앉은 독수리에게 몇번씩 반복해서 말한다. 그동안 너로 인해 잘 살아왔으며 이제 우리가 헤어질 때가 왔다고, 그리고 눈물을 닦으며 오랜 친구인 독수리를 떠나보낸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떠나보낼 때 충분히 슬퍼하고 정성을 들인다면 그리 오랜 미련이 남거나 괴롭지는 않을 거라고.” 

글을 쓰면서 연필을 추가로 주문해야겠다 생각했다. H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좀더 많은 연필이 필요할 것 같아서.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를 쓴 삐삐언니가 매달 첫째주 <마인드포스트> 독자들을 만납니다. 조울병과 함께한 오랜 여정에서 유익한 정보와 따뜻한 위로로 힘을 준 책들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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