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엄마를 위하여...조현병 당사자인 내가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
[기고] 엄마를 위하여...조현병 당사자인 내가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
  • 이상석
  • 승인 2023.05.07 20: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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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 이상석 씨 “엄마의 울타리를 벗어나 내가 엄마를 지킬 수 있도록”
사진=이상석 씨 제공.
사진=이상석 씨 제공.

1990년, 고등학교 3학년이었을 무렵 교통사고로 많은 일상을 잃었다. 오로지 국·영·수만을 외치며 대학 생활을 꿈꾸었을 때, 불현듯 찾아온 사고는 나의 발길을 학교 대신 병원으로, 빛나는 졸업장 대신 재수학원 등록 영수증을 손에 쥐도록 만들었다.

사고 당시 구체적인 기억은 없으나, 신경외과 수술로 머리에 수술 자국이 남았다는 점이 나의 상태를 확인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사고의 후유증인지, 기억력이 나빠진 것 같고 복잡한 말과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석 달간의 병원 생활 중 나는 잠을 잘 때마다 이것이 꿈이라고, 환상 같은 현실을 사는 것이라 자기암시를 했다.

그런데도, 내게 생긴 일은 이미 벌어진 것이었고 퇴원 후 매일같이 대구 거리를 자전거로 활보하며 현실의 돌파구를 찾았음에도, 나는 예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었다. 내게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만 더 명징하게 느껴졌다.

나는 사랑하는 엄마의 아들이자, 아빠, 조현병 당사자다.

엄마, 나의 기둥

엄마는 어릴 적부터 나의 숙제, 일거수일투족을 챙기며 확인해줬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그랬고 사고를 겪은 이후에도 그랬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에도 엄마는, 나를 데리고 다니며 높은 세상의 벽을 낮추기 위해 많은 것들을 경험하게 해주었고 내가 학원에 갈 때면, 수업 시간 내내 엄마는 학원 근처에서 나를 기다렸다. 처음 가는 곳도, 엄마가 있기에 낯설지 않았고 재수와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과정도 엄마가 있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대구에서 태어나 오랜 시간을 대구에서 치료받았지만 엄마는 장애를 얻은 나의 치료와 안전한 삶을 위해 광명으로 이사를 결심했다. 수십 년 지켜온 삶의 터전을 내려두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엄마는 서울에 와서도 특유의 붙임성으로 많은 친구를 만들었다. 나에게 그랬듯, 손주(나의 아들)에게 그랬듯 뭇사람들에게 쉽게 사랑을 주는 엄마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정성과 사랑을 주었다.

안녕, 나의 주치의

엄마는 평생 나의 치료를 도왔다. 엄마는 나의 전문가이면서 어떨 땐 주치의 같다. 직접 진단을 내리거나 처방하지는 않지만, 내가 느끼는 불편감을 가장 가까이서 알고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소통에 앞장선다.

오랜 기간 조현병 치료를 받고 있지만, 병원에서 접하는 용어들이 어려울 때가 많은데 엄마는 늘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말들로 바꿔 전달해준다. 진심으로 나를 알고 이해하기에 가능한 역할들이다. 대단한 요법과 약이 아니어도 엄마는 있는 그대로 나를 나아지게 만든다.

할머니가 된 엄마

엄마는 최근 홀로 과일을 사러 가다 미끄러져 골절상을 입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생활할 수 없어, 지금은 2명의 요양보호사분이 오전과 오후를 오가며 엄마를 지원한다. 예전처럼 많은 음식을 먹지 못하고, 운동도 할 수 없으니 엄마의 일상은 단조로워졌다.

고통에 신음하며 진통제를 찾고 휠체어를 이용하는 엄마의 모습에 맘이 이상하다. 나보다 더 등이 굽었음에도 나에게 ‘등이 굽는다’라며 자세를 고쳐 앉으라 잔소리하는 엄마. 반 세기를 붙어살았어도 엄마는 나밖에 모른다. 외할머니는 93세까지 사셨지만 굽은 등으로 지팡이를 짚고 사셨다. 장수는 유전이어도, 엄마의 굽은 등만큼은 물려받은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사실 엄마는 손주를 두었기에 할머니가 맞다. 백일잔치에 기뻐하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엄마가 없는 삶

엄마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엄마의 엄마(외할머니)가 돌아가셨듯, 나의 엄마가 사라지면 어떻게 하지? 혹여 그런 순간이 왔을 때 정신적 공허함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나. 나의 종교, 나의 신이 그 자리를 채워주기를 바라지만.

엄마가 살아있는 동안, 좋은 기억을 많이 만들고 함께한 시간을 빛내고 싶다. 시간이 흐를수록, 엄마도 나를 챙기는 게 힘들 테니. 조금씩 거리를 두며 자립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홀로서기 한 나를 보며 엄마가 웃을 수 있기를. 난 엄마의 짐이 아니다. 디딤돌이 될 거다.

엄마에게

엄마는 내 삶의 기둥, 소중한 분신이자 멘토다. 가깝다는 이유로 생각 없이 많은 말들을 뱉어낸 것이 때론 후회스럽다. 올곧지 못한 생각으로 상처를 만들고, 잘못된 효를 해왔으니. 두 번 다시는 엄마가 나 때문에 울지 않도록, 내가 변해갈 테다.

물론 지금의 내가 많은 것들을 한순간에 바꿀 수 있다면 그건 마법일 거다. 거창하지 않아도 집안일이나 청소를 돕는 것, 엄마의 말벗이 되어 소소한 기쁨을 주는 것부터 계획하고, 단계적으로 엄마의 울타리를 벗어나 내가 엄마를 지킬 수 있도록 나아갈 생각이다.

엄마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 고통은 함께 느끼고, 아픔은 연대 되니 아픔은 줄이고 기쁨을 늘릴 수 있도록 밝게 살아야지. 엄마의 근심은 뭘까, 늘 궁금하지만 잘 알 수 없어 어렵다.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우리 엄마가 뭘 좋아하고 어떤 걸 힘들어할지. 아는 사람이 있겠느냐마는, 부족한 나를 용서하고 더 엄격하게 나를 옳은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짚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었으면 좋겠다. 사랑스러운 엄마의 아들, 당당히 살아가는 한 아이의 멋진 아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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