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후 “찾아보면 삶의 어둠 속에는 한 가닥 숨은 빛이 있어요...그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이요”
이근후 “찾아보면 삶의 어둠 속에는 한 가닥 숨은 빛이 있어요...그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이요”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1.02.24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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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후 이화여대 의대 정신과 명예교수 인터뷰
행복이라는 건 똑같은 방식으로 정의내릴 수 없어
정년퇴임하고 공부한 게 내 생애에서 제일 재미있어
과거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현실이 보이지 않아 정신질환 와
과거는 과거...미래를 불안해 하지 말고 현실에 충실해야
실패를 거듭하면 쇠를 담금질하듯 단단해지고 성숙해져
용서는 화를 낸 나 자신을 먼저 용서하는 것
고통스러워도 죽음이 찾아오면 순리대로 받아들여야
가보지 않은 미래기에 불안해...불안 피하지 말고 경험해야
범사에 감사는 따지지 말고 감사하라는 의미
정신장애인은 가진 만큼의 능력으로 사회 기여하겠다 생각해야
부모가 허락하는 울타리가 넓어야 자식이 성숙해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유하면 길을 찾을 수 있어
코로나 이후 심리적 대폭발 일어날 것...심리 백신 스스로 만들어야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팔순의 선생은 꼿꼿하게 서서 기자를 맞았다.

기자가 선생 계신 곳으로 가는 차창 너머로 진눈깨비가 내렸다. 크나큰 무엇을 얻기 위해서 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노옹(老翁)의 삶의 지혜를 들을 수 있겠다는 마음의 소망이 조금은 있었다고 해야겠다.

이근후(86) 선생은 정신과 교수로, 전문의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했다.

1935년 대구에서 출생해 한국전쟁을 거친 이후 경북대 의대에 진학했다. 레지던트 시절이던 1960년 4·19 시위 때 학생회장 지위로 10개월간 감옥 생활을 했다. 전과자가 되면서 자신을 받아주는 수련 기관이 사라졌다. 1968년 박정희 정권이 사면령을 내려 한숨 돌리려 했는데 다시 군입대 영장이 날라왔다. 선생은 그랬다. “중고등학교하고 대학에서 제대로 공부해 본 적이 없다”고.

당시 의대에서 정신과를 선택한다는 건 덤으로 정신과 전문의까지 ‘정신장애인’ 취급 받을 때였다. 연세대에 잠시 있다가 이후 이화여대 정신과로 와서 의사와 교수로 후학을 가르쳤다. 삶이란 참으로 위대하고 거대하면서도 어떻게 보면 가장 허약하고 그래서 더 안타까울 때가 있다. 선생이 그렇다.

기자는 인터뷰를 하면서 그가 정신과 진료를 하면서 깨달은 것들인 삶의 지혜 앞에서 잠시 멍했던 기억이 난다. 채플린이 말한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전언이 머리를 치고 달아났다.

그래서 너무 긴 글이 오히려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그의 저서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2013년) 라든가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2019년) 라든지 ‘마음먹은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다’라는 저서들을 읽는 게 그의 생의 지혜를 깨닫는 데 더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한 채의 빌라에 자식들과 모여 살고 있다. 그러나 4층에 사는 그와 아내는 결혼한 성인인 아들들과 며느리들이 사는 아래층 집안의 비밀번호도 모르게 했다. 정년 퇴임 무렵, 큰아들의 제의로 그렇게 17년 넘게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였을까. 그와의 인터뷰에서 자식을 방법론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 성장한 자식을 놓아줄 수 있을 때, 자식은 더 성숙하고 건강한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을 기꺼이 수용할 수 있었다.

기자는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없지만 인터뷰를 하면서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이 세계를 보고 어떻게 세계와의 갈등을 줄이며 건강하고 이타적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되묻는 시간이기도 했다. 선생의 삶의 철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것도 어렴풋이 이해가 됐다.

그는 2000년대 초 한국말이 서툰 네팔 여성이 주인과 음식값 문제로 싸우다 경찰에 잡혀가 6년간 한국의 정신병원에 있던 그를 구출해 낸 적도 있다. 책으로도 잘 알려진 찬드라 씨다. 1980년대부터 매년 선생은 네팔을 여행했다. 이화여대생들로 구성된 의료봉사단을 꾸렸고 네팔에 병원을 지었다. 의료봉사 활동은 코로나19로 세계가 멈춰버린 현재를 빼고 매년 다녀왔다.

현재는 가족아카데미아 공동대표로 일을 하고 있다. 사회적 문제와 법, 인문학, 정신장애를 연구하는 그 공간을 만든 게 1995년 회갑 때였다. 그곳에서 이타적 삶을 지향하는 ‘정신들’이 모여 삶을 해석하고 있다.

선생을 만나기 위해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의 자택을 찾았다. 뿌옇게 흩어진 진눈깨비가 기자의 눈을 흐리게 만들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이근후 명예교수 (c)마인드포스트.
이근후 명예교수 (c)마인드포스트.

-꿈이 없는 사람은 연료가 없는 자동차와 같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나이 들어감은 이루지 못할 꿈을 하나씩 버리는 과정 아닐까요.

“버린다는 말은 별로 좋지 않아요. 그래도 아직 실천할 수 있는 꿈을 쫓는다는 표현이 좋겠죠. 그럼 실천할 수 없는 건 버린다는 게 내포(內包)가 돼요.

버린다는 걸 앞세우면 사람에 따라 부정적인 말에 함몰돼 버리는 거죠. 같은 말이라도 내가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꿈은 실현한다 이러면 할 수 없는 걸 버렸다는 말이 되는 거죠. 같은 값이라면 긍정적인 말로 하자 그래서 그런 말을 했죠.”

-선생님의 행복론은 길거리에서 폐지를 줍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의미가 없지 않을까요.

“사람한테는 누구한테나 의미가 있는 거요. 의미의 정도라든지 농도가 다를 수는 있어요. 박 선생(기자를 지칭)에게 폐지 줍는 사람이 불행한 것처럼 보이죠. 그렇죠. 그런데 내가 보는 시각은 그 사람이 행복할 수가 있다는 거예요. 행복이라는 건 똑같은 정의의 행복이 아니에요. 그분이 어떨 때 행복할 거 같아요. 생각해 봐요.”

-돈이 있을 때요?

“폐지가 많을 때 행복한 거죠. 폐지가 많으면 수거해서 돈이 많이 나오니까. 우리가 보기에 그분이 불행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분 기준에서 보면 그분한테도 폐지가 많으면 행복하다는 얘기요.”

-76세의 연세에 고려사이버대학 문화학과를 최고령 수석 졸업했습니다. 무엇이 선생님을 열정과 공부의 길로 이끌었을까 궁금합니다.

“열정이라기보다는…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때까지는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공부했어요. 그게 목적이라. 공부를 잘하면 부모가 즐거워하고 내가 인정을 받는 거니까 즐겁잖아요. 그건 자기를 위한 공부가 아니잖아요.

고등학교 때는 6·25 전쟁 때니까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공부할 여가가 없었어요. 지금의 젊은 사람들이 그때의 전쟁을 연상할 수 있겠어요. 못 하죠. 나는 체험한 사람인데 그건 말로 해 봐야 가슴에 가 닿지를 않아요. 젊은 사람들이 전쟁 영화를 보면 재밌으니까 전쟁도 해볼 만하죠.

그러나 전쟁이라는 건 그런 게 아니거든. 최악의 불행한 경험이에요. 전쟁판에 학교에 모일 수가 없으니까 공부가 부실할 수밖에 없는 거야. 학교도 군인들이 전부 병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공부할 장소가 없어. 공부가 되겠어요. 내가 대구서 공부했는데 동촌비행장에 전폭기가 출격하고 돌아오고 출격하고 돌아오고 그래. 그 폭음 때문에 선생님 말씀이 들리지가 않아. 진도도 안 나가.

선생님도 너무 괴로우니까 열심히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없는 거야. 영어도 일년에 레슨 파이브 정도만 공부했으니 실력이 붙을 수가 없잖아요. 그러다가 의과대학에 들어갔는데 공부가 너무 어렵고 시험도 많아. 그러니 시험에 쫓기다가 공부다운 공부를 할 수가 없어. 낙제 안 하려고 아등바등한 거지.

그 다음은 수련의인데 아주 즐겁지 않게 보냈어요. 그때 수련의 제도가 처음 생겼는데 봉급이 없어. 거기다가 내가 4·19세대라 그때 학생회장을 했는데 데모 선두에 서다가 5·16(군사 쿠데타)까지 연결돼서 내가 처벌을 받았어요. 전과자가 된 거지. 수련의를 할 수가 없어. 월급도 없지, 고통스러웠어.

1967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사면령을 내렸어요. 죄가 없어지고 보통 사람으로 돌아간다 했는데 군대에서 또 오라는 거야. 그래 늦은 나이에 군대 가서 복무하고.”

이근후 명예교수 (c)마인드포스트.
이근후 명예교수 (c)마인드포스트.

-그때가 몇 살 때였습니까.

“20대 후반 정도. 제대를 했는데 그때 의과대학이 전국에 여덟 개밖에 없어. 그 중에 정신과가 있는 학교는 4개뿐이었어요. 나는 제일 하고 싶었던 게 학교에 남아서 교수가 되는 거였어. 그런데 공부를 잘했나, 수련의를 정상적으로 받은 것도 아니니 (교수 꿈과는) 거리가 멀어져버린 거야.

그랬더니 연세대학에 계시는 과장 선생님이 와서 일을 좀 하라고 그래. 요새는 경쟁이 심할 건데 그때는 숫자도 적고 해서 나한테 기회가 왔지. 그때부터 내가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수련의를 가르치려면 내가 알아야 되잖아요. 연세대에 있을 때 엄청 공부를 집중해서 했어요. 거기 3년 있다가 이화대학(이화여대)으로 옮겼지.

수련의를 가르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뭐라 할까, 그 일은 의무적으로 부여된 거잖아요. 그러니까 재미있는 것도 있고 재미없는 것도 있고 그렇잖아. 그렇게 하다가 정년퇴임을 하고 이 의무에서 벗어난 거예요. 이제는 잘 가르칠 필요도 없고, 더 열심히 할 필요도 없어진 거지.

그러면 공부를 하지 말라는 얘기인가. 그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해도 된다는 거죠. 사이버대학 문화예술학과는 내가 하고 싶었던 건데 기회가 없어서 못 한 거죠. 내가 하고 싶은 데를 들어갔단 말이야. 그러니 내가 점수를 잘 따나 못 따나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어. 또 공부하면서 남들을 가르쳐야 할 의무도 없어. 자유롭잖아. 그러니까 제일 재미가 있는 거야.

이렇게 길게 설명해 줘야 이게 왜 재미있는가를 알 수가 있잖아요. 정년퇴임하고 공부한 게 내 생애에서 제일 재미있었어. 재미있게 공부하니 성적이 좋아. 나는 일등을 한 게 중학교 때 한 번밖에 없었어요.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나보다 공부를 잘하는 애가 있는데 얘는 조숙했는지 영어를 공부 안 해.

영어 선생님이 불러다가 다른 건 다 하면서 왜 영어는 공부 안 하냐고 하니까 걔가 하는 얘기가 ‘자기 나라 말도 다 못하는데 외국어까지 공부해야 됩니까’ 그래. 이게 중학교 일 학년이 할 소리야. 그래 걔가 성적이 떨어지니까 내가 밀려서 일등을 한 거야.

사이버대학에서 내가 일등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안 했어.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한테 좀 미안해. 미안한 뜻은 나이가 그 정도 돼서 얼마나 아득바득하게 했으면 일등을 할까(웃음). 오해를 하자면 그런 거죠. 다른 사람들은 직장에 나가거나 가정주부로 일하면서 틈을 내서 몇 시간 공부하지. 나는 하루종일 공부한 거요. 그러니까 내가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재미있게 집중했기 때문에 그런 거야.

다른 사람들은 직장일 다 하고 얼마나 피곤하겠어. 집에서 짬을 내서 공부하고.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즐겁게 하고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이게 제일 좋았다는 뜻이에요.”

-86년의 인생에서 선생님께서 가장 크게 깨달은 교훈이 있을까요.

“내가 의과대학 다닐 때 생각은 정신과 환자들은 완전히 돈 사람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고 가르치는 선생님도 그렇게 가르쳤어요. 그런데 오래 환자를 보다 보니까 그게 틀렸어. 편견이야. 뭐냐 하면 그 사람이 괴로워하는 한 가지가 정신병적인 거야. 그 이외에는 건강한 사람보다 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아요.

쉽게 얘기하자면 이 손가락이 정신이라고 한다면 요 손가락이 하나 없는 거지. 다른 신체적인 거는 다 활발하게 움직이는 거죠. 그렇게 환자를 보면서 정신과 환자라고 하면 폐인이다, 미쳤다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럼 이 사람은 왜 환자가 됐을까. 이유는 많은데 내가 느낀 건 이 사람들이 지나간 과거에 대해서 너무 집착해. 본드를 붙여놓은 것같이 생각을 많이 해요. 그러면 거기에 집착하고 있는 한은 현실이 보이지가 않아. 우리는 지금 현재에 살잖아요. 나하고 박 선생하고 인터뷰하고 있잖아요. 이게 현실인데 이거를 제쳐놓고 어릴 때 누가 나한테 나쁜 소리를 했는데 그 원한 때문에 어금니나 우두둑 갈고 집착하고 있다면 나하고 인터뷰가 잘 될 리가 없잖아요.

환자를 보다 보니까 그런 분들이 너무 많아. 그런데 그게 객관적으로 듣기에는 별것이 아닌 게 많아요. 그러나 그 자신에게는 굉장히 큰 거죠. 우리는 과거는 추억으로 떠오르잖아요. 좋은 추억이든 나쁜 추억이든. 그러나 집착이라는 것은 거기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잖아. 지나치게 과거에 집착하는 거지. 그리고 미래는 아직 닥쳐오지 않았잖아요. 지금 10년 뒤에 박 선생은 뭐 하실 거에요.”

-모르겠습니다.

“모르잖아요. 아직 닥치지도 않은 것, 모르는 것, 이것을 지나치게 걱정하는 거야. 그러니까 내 결론은 현재에 충실하라는 거죠.”

이근후 명예교수 (c)마인드포스트.
이근후 명예교수 (c)마인드포스트.

-성공한 이들보다 실패한 이들에게서 더 많은 인생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누군가 얘기하더군요.

“정신과에 오는 사람들은 정신적인 면역력이 적다고 표현할 수가 있어요. 신체적인 면역력이 아니고 정신적인 면역력이죠. 예를 들면 박 선생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모욕적인 말이 있을 거예요. 그럼 내가 그 말을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견디겠어요. 분하든지, 내가 나를 자책하든지, 방어를 못 하는 거예요.

바이러스에 전염되듯이 면역력이 없으니까 그것 때문에 자기가 고심하는 거죠. 비유하자면 대장간에서 쇠붙이를 망치로 불에 달궈가지고 두들기잖아요. 많이 두들긴 쇠가 단단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마음이라는 것도 그런 두드림을 많이 받아요.

두드림을 많이 받는다는 거는 실패잖아. 실패를 거듭한 사람이 좌절해서 포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단단해져 가지고 면역력이 더 커지고 정신적으로 더 성숙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실패를 실패로 끝내지 말고 그걸 쇠를 담금질하듯이 나를 담금질해주는 스스로 만든 정신적인 백신이라.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라는 것이 이해가 될 겁니다.”

-왜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누구는 부귀영화를 누리고 누구는 가난하고 볼품없이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생명체의 존엄성으로 말하면 그건 평등해요. 그런데 지금 질문하듯이 다르거든. 왜 다를까를 생각하면 그건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카르마)이에요. 내가 가꾼 대로 받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태어날 때는 내가 가꾼 것도 아닌데 왜 기질을 받고 나왔나. 그건 내 조상들이 쌓아놓은 경험이고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피할 수가 없는 거죠.

내가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면 아프리카에 적응하는 DNA가 있을 거고, 또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미국에 적응하는 DNA가 있겠죠. 한국은 또 한국이고. 다르잖아요.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 다음은 학습이라. 출발점은 같아도 어떻게 배웠는가, 어떻게 적응했는가, 어떻게 습득했는가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는 거예요.”

-용서한다는 건 한쪽 뺨을 치면 다른 쪽 뺨을 내주라는 기독교적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나는 종교가 없어요. 그건 내가 무신론자라는 뜻이 아니고 종교하고 인연을 맺을 기회가 없었다는 뜻이죠. 저는 기독교나 불교를 부정하지 않아요. 그런데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을 대라는 건 성경에 나오는 얘기인데 나는 그건 용서라고 생각을 안 해요.

정신과적으로 선의(善意)로 해석하면 용서일 수도 있지만 한쪽 뺨 때리니까 오기가 생겨서 이쪽도 때려 봐 하는 저항일 수도 있단 말이죠. 그건 종교적으로 생각해야지 달리 해석할 수는 없어요. 내가 생각하는 용서는 우리 둘이 다퉜어. 박 선생이 나한테 뭘 잘못했어요. 그러면 나한테 사죄를 해. 그럼 내가 용서해 줄게.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되는 거지.

나는 그게 틀렸다고 생각해요. 용서는 박 선생이 나를 화나게 만들었지만 내가 그 화를 성숙하게 다스리지 못하고 화를 낸 것이 잘못이야. 화를 낸 나를 먼저 용서하는 거지. 그리고 나서 박 선생에게 이야기를 하는 거지. 그게 순서지. 나만 잘못됐다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 둘이 다툰 건 박 선생도 잘못이 있고 나도 잘못이 있기 때문이잖아요. 그러면 나는 마음이 편안해져요.

그런데 사람들은 원인을 상대방한테서 먼저 찾아요. 당신이 잘못했다고 하면 내가 용서해 주겠다(웃음). 그렇게 되는 거거든. 용서라는 건 그렇게 되지 않아요. 화를 내는 걸 다스리지 못한 너 자신을 먼저 용서하라는 거죠.

용서하면 보여요. 용서하지 않으면 안 보여. 박 선생이 잘못했다면 그것만 보여. 그러나 내가 나를 용서하면 박 선생도 보이고 주변도 보여요. 나는 용서를 그런 식으로 해석해요.”

-인간의 삶과 운명은 개척되는 걸까요.

“우리 속담에 팔자 고친다는 말이 있잖아요. 내가 생각하는 팔자 고친다는 말은 운명을 바꾼다는 거죠. 그런데 운명이라는 건 의학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타고나는 DNA, 즉 기질이란 말이거든. 그건 유전자가 그렇게 돼 있기 때문에 바꿀 수가 없어요.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주인은 나거든. 내가 선택하는 거예요. 일일이 수학 계산하듯이 해서 선택하고 행동하는 건 아니거든. 내가 한국에 살고, 자연에 접해서 살고, 아니면 아파트에 산다고 할 때 그 사는 환경에 따라서 내가 거기에 적응하는 습관이 달라지는 거예요. 그 습관이 팔자야. 팔자는 내가 고칠 수가 있어요.

아파트가 싫으면 시골 가서 조용한 데서 살면 되잖아요. 그건 내가 선택하는 거잖아. 그러나 선택할 수 없는 건 내가 타고난 DNA라는 거죠. 팔자는 고칠 수 있어요.”

이근후 명예교수 (c)마인드포스트.
이근후 명예교수 (c)마인드포스트.

-인간은 유한자(有限者)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죽음에 대해서 나도 많이 생각했어요. 젊을 때는 가르치기 위해서 하고 뭣도 모르고 살았지. 그런데 자꾸 죽음에 가까워 오는 나이로 오니까 오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어. 오면 받아야지. 이걸 아득바득해서 어떻게 연기한다든지, 내 식대로 어떻게 한다든지 그런 건 적합하지 않을 거 같아.

오면 오는 대로 받아야지. 그게 겸손일지는 모르겠어요.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걸 거부하려는 사람도 있고, 또 우울에 빠져서 맨날 죽음만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그걸 못 기다려서 자살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좀 고통스러움이 오더라도 순리대로 따라가는 게 좋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해요.”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배우 찰리 채플린의 말이 떠오릅니다.

“동의해요. 왜 동의하냐면 그 사람은 코미디언이기 때문에 코미디언 시각으로 보니까 코미디라 그 말이죠(웃음). 코미디언 이주일 씨가 국회의원을 한 적이 있죠. 국회의원을 그만두면서 하는 말이 ‘코미디언 할 필요 없더라, 국회에 가니까 전부 코미디언’이라고 해요(웃음).

채플린 같은 어록을 남겼는데 그도 코미디언이기 때문에 코미디언의 시각으로 국회의원들을 보니까 코미디언보다 더 코미디언인거야. 그러니까 자기가 어떤 안경을 끼고 보는가에 따라서 그건 결정이 되는 거지. 반드시 희극이다, 혹은 비극이다 그렇게 얘기하기는 어려울 같아요. 그러나 채플린이 한 그 말은 코미디언으로서 본 시각이므로 맞는 말이죠.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시각에서 말하겠지.”

-아르헨티나 시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50대에 실명을 하면서 쓴 시에서 “신이 내게 책과 밤을 동시에 주셔서 경이로움과 아이러니를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시력을 잃으면서 어떤 마음이 드셨습니까.

“그분 말에 동의해요. 동의를 하는데 저런 말을 하자면 엄청 고통스러워야 하는 거에요. 남이 읽으면 굉장히 성숙해서 이런 말이 나오는구나 생각하지만 내가 시력을 잃어보니까 이건 발버둥치는 거란 말이야. 발버둥을 쳐야 자기 불안이 없어지는 거야.

세상이 온통 암흑이라고 생각해봐요. 즐거울 게 뭐가 있겠어요. 보르헤스와 내가 통하는 게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내가 잘 써요. 시력이 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이러면 답이 나와요. 어둡다는 여기에 매몰돼 버리면 깜깜한 거요. 그렇잖아요. 발버둥친다는 말은 아주 극단적인 건데 어둡더라도 그 틈새에 밝음이 있다는 얘기요.

그게 꼭 빛이 아니더라도 상상이나 생각, 시인이면 시이고 화가면 그림이죠.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찾아보면 모든 어둠 속에는 한 가닥 숨은 빛이 있어요. 내가 주장하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거예요. 사람마다 그런 고통이 있을 거 아니요.

어디 시력뿐이겠어요. 장애인은 장애를 갖고 있는 게 엄청 불편할 거예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하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어요. 내가 수련의를 할 때만 해도 장애인들은 밖에 나오지를 못했어요. 우선 가족들이 숨기고, 나오면 조롱감이 되니까 나오지를 못해요. 지금은 장애인을 폄하하는 단어를 써도 안 될 정도로 사회가 달라졌잖아요. 발전된 거죠.

그건 사회가 발달된 것이기도 하지만 장애인 스스로, 아니면 장애인 부모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뜻으로 키웠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다리가 불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뭘 해야 하지. 휠체어 타고 가면 된다는 거죠. 보르헤스의 얘기가 옳은 말이요. 그런 뜻을 장애인들은 잃지 말아야 해요.”

-삶의 고통은 미래의 불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미래를 불안해하는 건 인간의 고유한 존재론적 질문이 아닐까요.

“그건 누구나 갖는 거지. 내가 안 가본 길을 가자면 불안하잖아요. 나보고 지금 서울 강남의 어디서 만나자고 하면 안 가봤으니까 좀 불안해. 그러나 내가 사는 이 근방 어디서 만나자고 하면 눈이 어두워도 상상해 가니까 별로 불안하지 않아. 그러니까 단지 가보지 않은 미래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불안이 있는 거예요.

불안이 있지만 건강한 사람은 그 불안을 피하지 않고 직접 경험해 보는 거죠. 첫 번째 경험이 중요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두 번, 세 번은 찾아가기가 쉬워요. 그래서 장애인들도 첫발 내딛기가 참 어려워요. 남이 나를 멸시하지 않을까, 또는 내 능력이 비장애인에 비해서 떨어진다고 하면서 자격지심을 갖고 안 나서는 거에요.

그러지 말고 서툴더라도 나서야 돼요. 그게 출발점이 되면 거기서부터 한 단계, 한 단계 발전을 하는 거에요. 그건 내가 생을 마칠 때까지 발전을 하는 거요.”

-여성 정신분석학자 카렌 호나이가 분석했듯이 인간은 인정받고자 하는 신경증적 욕구가 있지 않습니까. 이를 어떻게 긍정적으로 승화시켜야 할까요.

“그건 다 갖고 있는 거예요. 승화시킬 필요가 없어. 갖고 있는 거야. 무슨 뜻이냐면 이것이 병이 되자면 ‘지나친’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돼.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누구나 다 있죠. 박 선생이 여기 왔는데 내가 인정을 안 해 주면 어떠세요. 그리고 박 선생이 나를 찾아준 거는 나를 인정해주니까 찾아온 거 아니에요. 그래서 사람은 자기 존재를 인정받는 게 즐거움이에요.

그런데 이것이 병이 되자면 ‘지나친’이라는 단어가 반드시 들어가죠. 그런데 살다 보면 꼭 그런 공식대로 가는 게 아니요. 지나치기 때문에 성공하는 사람도 있어요. 승화라는 말을 썼는데 지나친 것도 내가 잘 활용해서 나에게 이롭고 타인에게도 이롭게 만들면 그게 성공한다는 거예요.

신경증적으로 인정받고 권력을 갖고자 하는 의지 등의 인정받음이 있어요. 정상적인 사람도 갖고 있는데 지나치면 병이 되는 거죠.”

이근후 명예교수 (c)마인드포스트.
이근후 명예교수 (c)마인드포스트.

-나이 들수록 성경의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가장 좋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감사해야 할까요.

“덮어놓고 감사해야죠(웃음). 따질 것 없이 감사해야 돼요. 내가 젊을 때는 성경이 단편적으로 감사하라고 강조하니까 어떤 저항이 생겼냐면 감사할 일도 있고 감사하지 못할 일도 있는데 범사에 감사하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말도 안 된다. 내가 그렇게 생각했어요. 박 선생은 젊으니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감사하지 않을 일이 없어요.”

-애매하네요 선생님.

“남이 나한테 싫은 소리를 하면 감사할 게 뭐가 있어. 내가 하던 일을 못 하게 하면 그것도 감사할 일이 아니잖아요. 그게 도처에 있어요. 감사하지 못할 일이 있다는 말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해야 한다, 이 말씀이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놓고 보니까 그 일조차도 감사하더라 이 얘기죠. 예를 들면 누가 나를 ‘왕따’시켰다. 감사할 일이 아니잖아요. 왕따가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걸 택했더니 성공을 했다. 그러면 당연히 감사하지. 그때는 감사하지 못할 일이었지만 말이요.

나이 들어서 생각하니까 범사라는 이 말이 꽂히는 거야. 범사라는 건 따지지 말라는 거죠. 다 감사하라는 말이거든. 이 말이 참 좋아요. 내가 아침에 눈을 뜨면 감사해요. 감사할 이유도 없지만 그래요. 누가 나한테 잘해줘서도 아니고. 그런데 눈 떠서 숨쉰다는 게 감사한 거요.

이렇게 생각이 드니까 범사라는 말이 이해가 돼요. 내가 젊었을 때부터 감사 못 할 일이 있으면 달라붙어 싸우기도 하고 감사 못 할 일도 너무 많았는데 나이 들어 보니까 그 일조차도 결과론적으로 나한테 감사한 자극이 되었더라는 그런 뜻으로 얘기한 거요.”

-인간이 서투름을 인정하지 않고 완벽만을 추구할 때 어떤 오류가 발생합니까.

“인간이 완벽하지 않는데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게 병이에요. 완벽할 수가 없지. 왜 완벽할 수 없는가. 우선 박 선생은 한국이라는 온대 지방에 사는 거예요. 갑자기 북극에 갖다 놓으면 살 수 있겠어요. 못 살죠. 그러니까 북극에서도 살고 남극에서도 살고 적도에서 살고 한국에도 살고 이런 전천후 사람이 있느냐 이 말이죠. 따지자면 없잖아요.

탐험가가 잠깐 갔다 올 수는 있지만 어디 갖다 놓아도 완벽하게 사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것은 미완성품이에요. DNA를 갖고 나오는 미완성품을 가지고 자기에게 부여된 삶만큼 살면서 자기를 다듬어가는 거예요. 다듬어가는데 그 목표가 완벽하고 싶다는 거죠. 완벽하다는 건 없어요.”

-그렇게 하면 신경증에 걸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완벽하다는 게 신경증이요.”

-완벽하고 싶다는 의지는 신경증이 아니고요?

“그건 소망이에요. 완벽하다는 게 뭐겠어요. 실수도 하나도 안 하고 모양도 팔등신이 돼야 하고 하나의 흠도 없어야 될 거 아닙니까. 내 생각은 신(神)도 흠이 있을 거 같아. 종교인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도 신도 만물을 창조했다면 좋은 사람들을 창조를 하지 말이지,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건 왜 만들어가지고 애를 먹이냐(웃음).

짓궂은 어린애 같은 생각인데 그렇게라도 생각해 보면 신도 완벽하지 않아요. 완벽이라는 건 이렇게 생각하면 좋겠어요. 완벽이라는 말은 쓰지 말고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쪽으로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거. 내가 처한 환경과 내 성격과 행동이 나 자신을 위해서나 타인을 위해서 조금 더 나은 수준으로 발전했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거죠.”

이근후 명예교수 (c)마인드포스트.
이근후 명예교수 (c)마인드포스트.

-선생님은 정신병원 쇠창살을 최초로 없앤 의사입니다. 그런데 아직 일부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시설에는 쇠창살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시대를 앞서간 걸까요.

“앞서 왔다기보다는 내가 체험을 해보니까 그래요. 5·16(군사 쿠데타)때 고난을 당하면서 갇혀 있어 보니까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은 잊어버리고 간수들이 나한테 어떻게 하는가만 생각해. 그때 간수들은 지금하고 달라서 폭력이 심하니까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 그들과 싸우는 거야.

그 경험을 생각해 보니 정신과 환자도 개방을 해 놓으면 그런 다툼이 좀 줄겠구나 싶었어요. 내가 수련의 할 때는 전부 폐쇄병동이니까 간호사들하고 보조원들, 환자하고 싸움이 굉장히 잦았어요. 아주 작은 걸로도 다투고. 그런데 병원 문을 열어놓으니까 그 싸움이 없어졌어.

정신과 의사가 치료를 하자면 그런 싸움이 일단 없어야 되는 거요. 싸움이 일어나면 진정시키는 데 몇 달이 걸려. 그게 진정이 돼야 비로소 치료가 시작되는 거요. 개방병동을 해 놓으면 싸움이 생략이 되니까 처음부터 치료를 할 수 있잖아요. 굉장히 이상적인 생각이었어요.

이화대학 갔을 때 그때는 정신과 병실이 없었기 때문에 선배들을 설득했고 그들이 허락해줬기 때문에 된 거에요. 만일 거기에도 전통적인 정신과가 있었다면 폐쇄병동이 됐겠죠. 그런데 개방병동이 이상적인 건 사실이지만 그걸 뒷받침할 만한 경제력이 없어요.”

-누구 경제력요?

“국가나, 그 병동을 경영하는 병원 오너(소유자). 내 생각에 울타리가 없는 넓은 장소에 병동이 있으면 마음대로 나갔다가 때가 되면 와서 밥 먹고, 면담할 일이 있으면 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서 얘기하고 하면 훨씬 좋아져요. 그런데 우리가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야죠. 우선 땅을 그만큼 차지하려면 경제력으로 따지면 거기 아파트를 지어야 한다고 해요. 여건이 안 되는 거지.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내건 이슈가 있어요. 정신병 환자는 그 지역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때 스테이트 멘탈 호스피탈(state mental hospital·주립정신병원)에 많을 때 만 명도 수용할 수 있었어요. 의사는 모자라지 그러니까 한 번 진단받은 것으로 죽을 때까지 계속 투약을 받는 거야.

그때 연구논문을 보면 (그 병원에서) 죽은 사람을 부검해 보니까 정신병이 아니고 뇌종양이 굉장히 많았다는 거야. 수용 환자는 많고 의사는 적으니까 한 번 진단 받으면 그 진단으로 죽어서 나가는 거예요. 케네디가 이걸 없애야 한다고 했어요. 대량 수용은 치료가 아니라는 거야. 정신장애인도 재활을 통해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공동체가 함께 돌봐야 한다는 주장이지.

이 이슈를 내걸어서 만 명 수용 인원을 천 명으로 줄이자면서 멘탈 헬스 케어 센터(mental health care center·정신건강복지센터)를 세운 거요. 그때 국회의원들의 이슈가 뭐였냐면 ‘케네디 말이 맞다. 하지만 풀어놨는데 지금 그 환자들이 어디에 있는가’가 캐치프레이즈가 됐어요.”

-어디에 가 있었습니까.

“길거리에 다니면서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다 이거지. 케네디가 내건 이슈의 후속 조치가 없고 케어(돌봄)가 부족하니까 그런 거예요.

나는 정신건강복지센터를 더 확대해서 재활에 힘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환자를 완벽하게 건강하게 만들 수는 없어도 어느 수준까지는 만들 수 있어요. 그럼 그 수준만큼 타인에게 기여할 능력이 있는 거예요. 정신과 환자라서 해서 사회에 폐만 끼치는 존재들이 아니에요.

사회는 그런 편견을 없애야 되는 거고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은 건강한 사람들하고 경쟁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내가 갖고 있는 만큼 사회에 기여하겠다고 생각하면 훨씬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어요.

지금은 과도기이기 때문에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보는 시각을 반듯하게 만들 필요가 있고 장애인은 자격지심을 버리고 용감하게 ‘나는 나다’, ‘비장애인보다는 능력이 떨어질지 몰라도 내가 가진 능력만큼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 이 자신감을 가져야 해요.”

-정신장애인들은 정신병원이 주는 폭력성 때문에 트라우마를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폐쇄병동에 가둔다는 게 폭력이에요. 그러나 지금 방법이 없잖아요. 차선의 선택을 한 거거든. 그러니까 폐쇄병동에 넣는 것도 치료다. 이걸 이해해야 해요. 개방병동만이 능사가 아니에요. 폭력이라는 말은 환자에게도 있고 치료진에게도 있어요. 그런 것을 줄이려면 치료적으로 접근해야 되고 환경적인 부분도 개선을 해야겠죠.

제일 중요한 건 언어적이든, 비언어적이든 환자를 멸시한다든지 하는 편견을 불식시켜야죠. 그래서 정신장애인이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이 폭력을 없애는 거죠.”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시설을 궁극적으로는 모두 폐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일 좋죠. 노벨상을 받은 솔제니친(구 소련 소설가)이 미국에 망명을 했어. 그러면서 이 사람이 한 얘기가 있어. 자기 조국인 소련은 거대한 정신병동이라고 그랬어. 굉장히 좋은 표현이죠.

나는 우리 사회가 지금 그렇다고 봐요. 그런데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시설을 다 해체하면 거대한 정신병동이 되는 거야. 정신을 연구하는 어떤 학자는 정상인이고 정신장애인이고 구분이 없다는 그래요. 지체가 부자유하면 우리가 보면 알 수가 있죠. 정신은 보이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분들은 사람들이 다 정신장애가 있다고 주장해요.

그럼 정신장애가 진짜 있는 거 하고 없는 거 하고 어떻게 구분하는가. 재밌게 표현했어요. 정신과 의사에게 가서 진단 기준에 따라 박 선생은 무슨 병이다 이렇게 라벨링(labeling·낙인)을 하면 환자가 되는 거야. 딱지를 붙여주는 거지. 그런데 환자지만 정신과 의사에게 안 가고 돌아다니면 라벨링이 안 되니까 환자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분들이 분류하는 게 컨펌드 페이션트(confirmed patient·확인된 환자)와 언컨펌드 페이션트(unconfirmed patient·미확인된 환자)가 어울려 사는 게 사회다, 이렇게 생각하거든.

저는 라벨링을 다 없애는 데는 반대해요. 치료를 받으면 좋아질 사람인데 미확인된 환자라고 해서 사회에 섞여 있으면 본인도 불행하고 사회도 불행한 거예요. 그건 사회든, 가족이든, 개인이든 도울 의무가 있는 거야. 우리가 문제가 있으면 그걸 없애버리라는 말을 너무 많이 해요.

텔레비전을 보면 정치적인 얘기밖에 없어. 검찰을 개혁해야 한다고 하는데 개혁이 검찰뿐이겠어요. 그런데 누군가 나서서 검찰을 없애자. 그 논리가 이 논리랑 같은 거예요. 수사를 할 사람이 있어야 질서가 잡히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사회적으로 부당한 행동이 나오면 그런 짓을 못 하도록 계도를 해야지 ‘없애라’는 건 아닌 거 같아.

수학여행을 가다가 차가 뒤집어지고 사상자가 생겼어. 그러면 문교부에서 제일 먼저 내리는 게 수학여행 금지야. 도로가 정비가 잘 안 돼서 고치고 계도할 생각을 해야지 수학여행 가지 말라고 하면 그건 방법이 아니잖아요. 그렇듯이 정신병동을 없애라는 건 방법이 아닐 거 같아요.”

이근후 명예교수 (c)마인드포스트.
이근후 명예교수 (c)마인드포스트.

-자녀의 자발성은 부모가 용납하는 수준만큼 자란다고 했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예를 들어 박 선생이 요 방안에서만 행동하도록 법적으로 허용이 됐다하는 거 하고, 박 선생은 한국 내 어디든지 돌아다녀도 괜찮다 이 생각하고, 또 세계 어디든지 가고 싶으면 가도 된다는 이 세 가지 중 어느 걸 택하겠어요.”

-저는 세계를 택하겠습니다.

“그렇지. 그러니까 그것이 허용된 범위다 그 얘기야.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 자녀가 어리니까 조심스럽잖아요. 사고를 당할 수도 있으니까 부모가 안심하기 위해서 자꾸 허용 범위를 좁히는 거에요. 그걸 극복하고 부모가 허락하는 울타리의 넓이가 넓을수록 애들은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거죠.

그런데 꼼꼼한 부모들은 노인이 돼 가지고도 이래라저래라한다고. 부모 마음이지만 그렇게 하면 자녀가 클 수가 없지. 우리나라 속담에 나무가 크면 밑에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해요. 나무가 크다는 건 부모가 너무 크다는 거고 부모의 아집(我執)이 커버리면 자녀가 안 돼.

내가 경험한 환자가 있어요. 대학 총장도 지내고 문교부 장관도 지낸 선생인데 그 아들도 의과대학 교수라. 그런데 아들이 맨날 정신과에 입원을 해. 그래서 내가 맡았어. 이래 치료해도 잘 안 되고 저래 치료해도 잘 안 되고. 교과서에 있는 대로 다 해보고 성심성의껏 해봤는데 다 안 돼가지고 선배인 주임교수를 찾아갔어.

내가 이런 환자를 맡고 있는데 치료가 잘 안 된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랬더니 그 선생님 대답이 ‘그건 아버지가 죽어야 낫는 병’이라고 해. 내가 젊을 때니까 아버지가 죽어야 낫는 병이라고.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한참 생각했어요. 경험을 쌓다가 보니까 직설적이지만 그 말이 맞는 거예요.

안 죽더라도 자식이 부모를 뛰어넘어야 돼. 뛰어넘을 수가 없으니까 병이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달리 말하면 그 울타리를 많이 만들어 주는 게 건강하게 키우는 거다, 그런 논리로 말한 거예요.”

-부모가 아이를 사랑으로 키웠지만 아이가 정신질환에 걸리면 이는 부모의 잘못인가요.

“한때 엄마들이 굉장히 섭섭해 할 때가 있었어요. 무슨 이론이 있었냐면 정신병을 만들고 안 만들고는 엄마한테 달렸다. 그래서 처방도 마더링(mothering)이라고 해서 엄마 노릇 잘 하라는 처방이 있었어요. 그 처방을 받아든 엄마들이 엄청 분개했어. 남편도 키우고 나도 키우는데 왜 애가 잘못되기만 되면 내가 뒤집어써야 하냐. 한때 그런 이론이 있었어요.

그런데 엄마가 사랑으로 키운다고 하지만 그 사랑은 자기식 사랑인 거지. 이해가 될는지 모르겠는데 예를 들면 옛날에 장한어머니상 표창식에 내가 심사위원을 한 적이 있어요. 주로 어떤 엄마들이냐면 장애인 아이를 둔 어머니들이야. 그때 심사에 올라온 한 분이 소아마비 아들이 있는데 잘 걷지를 못하니까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 때까지 업어서 날랐어. 그러니까 장하다고 하면서 장한어머니상으로 뽑으려 해.

내가 반대했어요. 절대로 장한 어머니가 아니다. 아들이 못 걷기를 하지만 아들이 갖고 있는 역량만큼은 기든지 서든지 그것까지는 훈련을 시켜야 될 거 아니냐. 그게 장한 어머니지 않냐고 했어. 소아마비 아들이 애처롭다고 매일 들쳐업고 말이지. 그렇게 주장했는데 표결에서 그분이 상을 받았어.

나는 내 생각이 아직도 옳다고 생각해. 어머니의 사랑을 내가 부정하는 게 아니오. 사랑을 어떻게 줄 것인가라는 방법이 문제라는 거지. 엄격하게 주는 사랑도 있어요. 그죠. 그런데 덮어놓고 들쳐업고 말이지.”

-한 사람의 정신건강 척도는 ‘남의 말을 듣는가?’와 ‘타인을 사랑하는 능력’에 두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환자를 입원시켜보면 자기 생각에만 몰두해가지고 곁에 누가 있는지, 뭐가 있는지를 몰라요. 사고체계가 공상하는 시스템이 있어요. 그것만 딱 보고 있기 때문에 안 보여. 그래서 수련의가 언제 퇴원시키면 좋겠습니까 나한테 물어요. 그건 교과서에 나와 있어요.

교과서에 없는 걸 내가 가르쳐준 적이 있어. 첫 번째는 타인한테 관심을 갖게 되면 퇴원을 시켜라. 두 번째는 얼굴이 예쁘지면 퇴원시켜라. 무슨 말이냐면 긴장을 하고 있으면 얼굴 표정이 없어져요. 얼굴에는 수많은 근육 파이버(fiber·섬유)가 뭉쳐져서 하나의 근육이 되는 거거든.

그러니까 자극에 의해서 두 개가 움직이고 세 개가 움직이고 그런 거예요. 건강한 사람은 표정이 살아나잖아요. 그런데 자기에게만 빠져 있는 사람은 자극이 가도 안 움직여요. 그러니까 근육이 풀리면 얼굴이 예뻐지는 거야.

내가 실험적으로 한 게 입원을 하면 보호자에게 화분을 하나 사오라고 그래요. 큰 거 말고 작은 걸로. 그걸 입원실 머리맡에 나둬요. ‘이건 네 거다’ 그 말만 하고요. 그러면 화분을 말라죽게 하는 사람도 있고 물을 줘서 살리는 사람도 있다고.

내가 레지던트한테 ‘잘 보고 물 주기 시작하면 퇴원시켜도 괜찮다’고 말해요. 화분에 물을 주는 건 주변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거거든. 우리 정신과 환자는 주변에 대한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타적(利他的)일 수가 없는 거죠.”

-인간은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까.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되느냐가 아니라 이타적인 삶을 살게 돼요. 살아야 됩니까를 영어로 하면 머스트(must)야. 그게 아니에요. 사람은 자연적으로 순리적으로 살게 돼 있어요. 이기적이라고 하는 건 나만 아는 거잖아요. 어릴 때 나만 알아야 살지 남 배려한다고 하면 살겠어요.

어린애가 배가 고파서 젖을 빠는데 옆에 애가 운다, 그러면 젖 빨던 어린애가 엄마 쟤가 배고파서 우는 거 같으니까 제 젖을 주세요. 그 말 하면 그게 어린애겠어요. 그러니까 어릴 때는 에고 센트릭(ego centric·자아중심적)한 이기심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살다가 형제가 생겨. 또 밖에 나가면 친구도 생겨. 그럼 내 맘대로 하고 싶은데 안 되잖아요. 다툼도 생기고. 그러면서 이기든지 지든지 해서 질서가 생기는 거지. 둘이 있을 때는 어떻게 적응해야 되고 하는 게 이타심이에요. 그건 크면서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생겨요.

그런데 그게 안 생기는 사람이 있어요. 성격장애 중에 히스테리 같은 건 자기중심적이에요. 우리 속담에도 그런 사람은 죽어서 관 뚜껑을 못질해도 철이 안 든다고 해요. 그 말이 그 말이에요. 그런데 대부분의 정신과 환자들은 이타적이에요. 어느 하나가 정신병리적인 것이지 이타적이에요.”

이근후 명예교수 (c)마인드포스트.
이근후 명예교수 (c)마인드포스트.

-인간은 본성상 이타적인 겁니까.

“아니, 본성은 에고 센트릭(ego centric)한 거죠. 하지만 같이 살다 보니까 이타적이 아니 될 수가 없는 거야. 둘이 사는데 내 맘대로 되나요. 그러니까 이타심이 자연적으로 되는 거예요. 그걸 통찰하고 ‘이타심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구나. 소통하는 데 중요한 것이구나’ 그렇게 깨달은 사람은 더 잘하는 거죠. 자연적으로 생기는 이타심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사회생활을 할 수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어떤 정신입니까.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이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많아요. 그것을 인정하라는 뜻이에요. 가령 내가 실패를 했다, ‘왜 나한테만 실패를 해’하고 매달리면 왜 실패했는지 보이지가 않아요. 그럼 실패했다는 걸 인정해야죠. 인정을 하면 대책이 나와요. 인정을 안 하니까 대책이 안 나오는 거요.

인정을 하게 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면 찾을 수 있는 게 많아요. 실패에 매달리기 때문에 안 보일 뿐인 거요. 누구에게나 다 기회가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은 내가 인위적으로 해서 해결이 안 될 문제, 결국 내 밖의 일에 대한 통찰이야. ‘아, 그렇다면’ 하고 하는 게 ‘그럼에도 불구하고’지.”

-돌다리는 두들기지 말자. 정 두들기고 싶으면 일단 건너고 나서 한 번쯤 두들겨 보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는 말과는 대조됩니다.

“매사에 조심하다 보면 어디 길 가겠어요(웃음). 요새 애들한테 핸드폰 줘 놓으면 영상 찾아가지고 알아서 잘 하잖아요. 글자도 모르고 뭘 누르면 나온다는 것도 모르고 덮어놓고 눌러보니까 나오는 거예요. 나오니까 또 누르고.

어른이 컴퓨터를 잘 못 배우는 이유가 매뉴얼부터 읽어보고 두드리려고 하니까 그래요. 애들은 매뉴얼을 읽어볼 필요가 없어. 두들겨보고 나오면 또 그거 두드리는 거지. 그래서 내가 젊은 사람들한테 하는 소리예요. 나 같은 노인들에게 돌다리는 두드려보면서 건너야지. 한번 자빠지면 못 일어나니까.

그러나 젊은 사람들은 기회가 있어요. 넘어지더라도 넘어진 게 바탕이 돼서 또 일어날 수 있는 기회라는 게 얼마든지 있어요. 그걸 젊은 사람들에게 권해본 거예요.”

-정신분석을 공부하면서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합니다. 모든 게 인과(因果)에 의해, 혹은 필연성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의미일까요.

“정신분석 이론에 가장 기초적이 이론이 있어요. 정신결정론이라는 거요. 그게 사이킥 디털미내이션(psychic determination)이라고. 쉽게 얘기하면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는 거야. 우연히 만나는 것도 많잖아요. 그건 우연이 아니라는 거예요. 원인은 있는데 너무 깊이 숨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찾지를 못해서 모르는 거죠.

우연이라는 건 절대로 없다는 거요. 이런 이론이 불교의 인과론이 있잖아요. 정신분석보다 더 정교하게 있어요. 나는 그건 맞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찾을 수 없어서 없다고 그러는 거지.

그러니 박 선생이 여기 온 것도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해 봐요. 왜 왔어요. 무슨 신문 기자이기 때문에 온 거잖아요. 기자는 왜 됐어. 학교를 졸업해서 내가 직업을 찾다보니까 그게 좋아서 했다. 양파 껍질 벗기듯이 자꾸 벗겨나가면 아주 핵심적인 게 나올 수도 있는데 그것까지 우리가 벗길 기술이 없다 그 말이야.”

-사람과 사람의 만남도 필연이라는 말씀입니까.

“물론이지. 그러니까 불교에서 하는 얘기가 옷자락만 스쳐도 몇 겁의 인연이 있다고 그러잖아요. 그건 과장될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네팔에는 언제 가실 계획이십니까.

“코로나 풀리면 가야지. 작년에 코로나 때문에 처음으로 못 갔는데. 1982년부터 네팔을 찾았어요. 가면 한 2~3주 머물죠.”

-찬드라 씨도 만납니까.

“찬드라는 시골에서 와요. 내가 매년 만났어요. 내가 네팔 가는 게 항상 구정을 끼고 2월에, 대학교 방학일 때 움직이죠. 그러니까 내가 가는 날짜를 대략 알아요. 그럼 그때 와서 만나고 하죠.”

이근후 명예교수 (c)마인드포스트.
이근후 명예교수 (c)마인드포스트.

-정신장애인들과 그 가족들에게도 네팔 여행을 권하고 싶으신가요.

“같이 간 사람도 있어요. 나는 정신장애는 정신과 의사만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선 가족이 이해해야 돼요. 또 치료에 관여하는 사람이 엄청 많잖아요.

나는 무엇을 권하느냐면 어떤 영화 내용이 이 사람한테 비슷한 게 있으면 영화를 보라고 권해요. 그러면 통찰력이 없는 사람은 그냥 영화가 재밌다 하고 말지만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이건 나하고 비슷한데, 그렇다면 내가 저런 평가를 받을까 하는 통찰을 하게 돼요.

또 이런 사람도 있어요. 나하고 인터뷰할 시간은 짧은데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울지도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럼 그는 어딘가 가서 실컷 울고 와야 나하고 얘기가 돼요. 우스운 얘기지만 내가 순복음교회에 좀 갔다 오라고 해요. 거긴 기도를 해도 통성기도를 하니까(웃음). 그럼 거기서 분노가 다 빠지잖아요. 빠지고 나면 나하고 진정한 치료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거예요.

또 내가 재직 시에는 평생교육원이라는 게 이화대학에 있어요.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작한 거죠. 나는 환자들에게 내가 강의를 하는 거나 정신과와 관계있는 강의는 수강 신청을 해서 들으라고 그래요.

운영하는 가족아카데미아에도 회원 중에 정신장애인이 많이 있어요. 그럼 꼭 면대면하지 않더라도 소통할 수 있죠. 또 내가 강연 나가보면 내가 치료했던 환자들이 많이 찾아와요. 또 자기 친구들도 끌고 오고. 꼭 일대일이 아니더라도 그런 데서 통찰하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그런 걸 많이 활용하면 좋을 거예요.”

-코로나19로 세계가 단절과 비대면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코로나19의 세계사적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코로나 이후에 또 코로나가 와요. 또 온다는 건 바이러스 코로나가 아니고 심리적인 코로나 신드롬이죠. 지금은 코로나가 있으니까 기존의 불안 신경증, 공포, 공황장애, 우울증, 히스테리 가진 사람들이 좀 잠잠해졌어. 왜 그러냐면 그 불안보다 더 큰 불안을 가지고 있으니까 기를 못 펴는 거야. 그래서 환자 수가 오히려 줄어요.

그런데 바이러스를 예방접종하고 치료제가 나오고 해서 정복했다 그러면 이게 폭발하는 거야. 그럼 기존의 정신과 환자와 정상적인 사람이 불안을 안고 살았던 그 모든 게 플러스 알파가 돼요. 내 생각은 포스트 코로나의 대폭발이 심리적으로 일어날 거라 봐요. 그게 더 무서워요. 지금부터 대비해야 돼.

정신과 의사들은 대게 그런 생각을 갖고 있을 거예요. 바이러스에 걸리면 죽잖아요. 그러나 심리적인 포스트 코로나 트라우마는 죽지는 않아요. 불안하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못 하는 거야. 사회생활을 못 한다면 생산성이 떨어질 거고 그럼 그게 무서운 거야. 이게 하루 이틀에 해결도 안 돼요. 만성적으로 가 버리는 거야. 그러니 얼마나 무서운 거야.

심리적인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은 백신이 필요해요. 그런데 그 백신은 이 바이러스 백신하고 달라가지고 자기가 만들어야 돼요. 자기가 자기를 단련시켜야 되는 거지 일괄적으로 한 방씩 맞는다고 생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더 무섭다는 거죠.

그리고 세계 의학사적으로 보면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번진 재앙이 없어요. 우리가 전염병의 경우 14세기의 페스트 예를 많이 드는데 그건 유럽에 국한돼 있었어요. 그때 유럽의 인구가 1억 명 정도 됐다고 하는데 인구의 25%가 죽었으니까 4분지 1이 죽은 거지. 단지 통계 숫자로 말하면 지금 세계 인구가 75억 명이라면 75억의 4분지 1은 아직 더 남아있잖아요.

그래도 지금이 더 무서운 게 이건 세계적인 거라. 안 간 곳이 없다는 거지. 그러니까 코로나가 진정되고 난 다음에 폭발적으로 일어날 심리적인 전염에 대한 대비를 우리가 단단히 해야 해요.”

이근후 명예교수 (c)마인드포스트.
이근후 명예교수 (c)마인드포스트.

-하실 말씀이 더.

“지금 내가 나 혼자 앉아서 떠들면 박 선생밖에는 알아듣고 가는 사람이 더 있겠나. 그런데 신문에 이렇게 내면 읽는 사람도 있을 거고 맞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생각도 하겠죠. 어쨌든 심리적인 담금질을 많이 해서 자기 백신을 만들어놓아야 해요.”

인사를 하고 나오자 선생은 “재미있게 살아야 돼요”라고 말했다. 아득했다. 오후의 날리던 진눈깨비는 그쳐 있었다. 대신 구름 사이로 태양이 환하게 세계를 비추고 있었다. 기자는 어떤 깨우침을 얻은 듯 풍경 속을 허우적거리며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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