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오, 음악으로 인한 상처와 위로…“콩나물밴드로 삶의 위로를 얻어요”
이경오, 음악으로 인한 상처와 위로…“콩나물밴드로 삶의 위로를 얻어요”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1.04.19 21: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콩나물밴드 바이올린 연주자 이경오 씨 인터뷰
오스트리아에서 음악 공부 중 위층 소음 스트레스로 환청 시작
실패 후 삶의 의미 재정립..비우면서 동시에 채워야
정신장애인은 고립되지 말고 울타리를 형성할 동료 있어야
클래식이나 트로트 구분 말고 좋은 음악 많이 들어야
10년간 손놓았던 바이올린 다시 시작..음악 동료들 만나는 계기
10개월간 음원 제작으로 ‘틈’ 발매...정신장애 아픔 경쾌하게 표현
공연서 돈 버는 것보다 함께 즐기는 것이 중요한 의미
지역사회에서 당사자가 살아갈 수 있게 촘촘한 케어 필요
일주일에 두 차례 연습...관심 있으면 누구든 밴드 참여할 수 있어
올해 5곡 정도 곡 만들려고 진행 중...집단 토론으로 가사 구성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음대를 나온 그는 삼십대 초반이던 1991년, 아내와 함께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을 떠났다. 빈 도시는 아름다웠다. 인종적 차별을 느끼기는 했지만 예술의 도시는 그에게 벅찬 풍경이었다.

그는 집에서 전공인 바이올린을 연주하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위층에서 ‘우당탕탕’하는 소리를 냈다. 소리에 민감한 사람이 위층에 살고 있는 거 같아 올라가서 얘기하면 위층 사람은 “괜찮다. 음악 연주하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연주만 하면 다시 위층에서 쿵쾅거렸다. 그 경험은 그에게 놀람과 두려움, 노여움을 안겼다.

일 년을 그렇게 버티다가 마침내 무너져내렸다고 한다.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견딜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1999년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갈 곳이 없었다. 소설 ‘목민심서’에 나오는 정약용 선생이 수원에서 살았다는 내용이 떠올라 연고 없는 수원으로 와 원룸에서 살며 하루 종일 시내를 배회했다.

환청과 불면은 여전히 떠나지 않았다. 음악을 공부하러 갔을 뿐인데 나의 잘못도 아닌 타인에 의해 병이 들었다는 것. 그 분노는 그를 오래 지배하게 된다. 그 분노는 또 다시 그의 정신적 어려움을 더 건드리는 상처가 됐다.

2005년까지 그는 계속 배회했다. 일본에서 사업을 하던 어머니가 귀국하면서 함께 수원에서 살게 됐다. 어머니의 권유로 수원정신건강복지센터에 등록했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후 센터에 출퇴근하면서 살았다.

바이올린은 오래 손을 놓았다. 센터 담당자가 그에게 음악을 다시 권했지만 그는 싫다고 손을 저었다. 갖고 있던 바이올린은 10년 동안 주인의 손길을 받지 못하고 습기를 먹으며 해체됐다.

그런데 우연처럼 그는 다시 음악을 하게 된다. 인터넷으로 30만 원에 구입한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다. 운명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는 센터에서 음악을 하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통기타 동아리 리더가, 베이스 연주자가, 일렉 기타 연주자가 모이기 시작했다. 그룹 이름은 ‘콩나물밴드’로 정했다.

일주일에 두 차례 연습을 하면서 많은 곳으로 다니며 연주를 했다. 지역사회 행사, 사회복지기관 행사에 가고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서울로 가서 연주를 했다. 기성곡들을 연주하면서 자신들이 직접 작사·작곡한 음악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맞춤하게 임상심리사이자 인디밴드 베이시스트인 문현호 씨가 그때 그룹으로 들어왔다. 함께 10개월에 걸쳐 음악을 만들었다. ‘틈’이 음원으로 탄생하게 된 사연이다.

기자는 이십대 후반, 브라질에서 4년 정도 유학생활을 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나라의 모순에 분노했고 옆집이 일부러 내는 듯한 소음에 시달리다 정신적 어려움을 겪게 되고 결국 빈손으로 김포공항에 내린 기억이 있다. 그때, 저물어가던 조국의 풍경 앞에서 참담함과 실패자로서의 패배감을 극도로 느꼈던 기억이 난다. 이후 20년이 지났다.

콩나물밴드의 이경오(64) 씨와 인터뷰하며 그의 구술(口述)에서 정신적 고통의 시작이 기자와 너무나 비슷한 것에 잠시 놀랐다.

시인 김수영의 말처럼 십 년이란 한 인간의 상처를 아물게 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그는 귀국 10년 후부터 상처에서 벗어나는 풍경을 얻게 된다. 동료들과 밴드를 꾸린 이경오 씨는 음악을 통해 위로받았고 역시 음악을 통해 사람들을 위로했다. 삶의 의미란 거창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작업에 최선을 다하고 그 작업이 자기 자신과 타인을 위로할 수 있다면 삶이란 분명 아름다움일 것이다.

이경오 씨를 만난 건 지난 16일 수원 팔달문 인근의 ‘콩나물밴드’ 작업실에서였다. 지하에 꾸려진 공간에서 밴드 구성원 4명이 앉아 이경오 씨와의 인터뷰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참여자는 박찬기(41) 씨, 조장현(53) 씨, 유주한(59) 씨, 이기탁(54) 씨다. 다음은 일문일답.

이경오 씨 (c)마인드포스트.
이경오 씨 (c)마인드포스트.

-오스트리아 빈에서 정신질환을 겪게 된 겁니까.

“집에서 (바이올린) 연습을 하는데 위층에서 우탕탕쿵쾅하는 거예요. 혹시 연습 소리 때문에 그런가 해서 올라갔더니 (위층 사람이) 괜찮다고, 연습하라고 그래요. 그래서 연습을 하면 또 우당탕탕하는 거에요.

그렇게 일 년이 지나면서 힘이 들어서 또 위층에 갔어요. 갔더니 방에 무슨 장비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나서 허공에서 소리가 들려요. 하루종일 들리니까 불면의 밤이 이어지고 숨쉬기도 힘들고 가슴에 통증을 느끼면서 괴로웠어요.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연고도 없는 수원에 와서 방 하나 얻어서 대충 살았어요. 혼자 수원 시내를 배회하고.”

-수원으로 간 연유가 있었을까요.

“오스트리아에 있을 때 지인이 준 한국 소설책 ‘목민심서’를 읽고서 (주인공) 정약용이 참 훌륭하다고 생각했어요. 한국 와서 처음에는 안양으로 갔는데 20년 전이니까 그때는 그 역 쪽이 을씨년스러웠어요.

그래서 무조건 버스 타고 수원으로 왔죠. 수원·화성이 정약용 선생이 있었던 곳이기도 해서 왠지 끌렸어요. 여관에서 이틀 보내고 방 하나 얻어서 5년 동안 맨날 쏘다녔어요. 연습도 못 하고 잠도 못 자고.”

-빈에서는 어떤 걸 전공한 겁니까.

“우리나라는 유니버스티라고 해서 음대인데요. 빈에서 호흐슐레는 국립음대, 콘서바토리는 음악원입니다. 우리나라 학원하고는 다른 개념이에요. 유럽은 시스템이 그래요.”

-콘서바토리에 들어가면 석사를 따는 겁니까.

“거기는 음악으로 전문적으로 하는데 학사나 석사 개념이 아니에요.”

-몇 년 정도 공부해야 하는 겁니까.

“5년 만에 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8년도 걸리고 10년도 걸리죠.”

-기자는 브라질에서 잠깐 유학을 했었습니다. 그 나라에서 발병하고 한국의 공항에 발을 디뎠을 때 처참한 기분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은 어땠습니까.

“한국 와서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제가 실패했잖아요. 참담했죠.”

-오스트리아에서 발병하고 이후 치유와 재활은 한국에서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귀국하고) 한 5년 동안은 이게 뭐지 하면서 보냈죠. 병식이 없었으니까. 아침 7시에 수원 시내에 나가면 밤 11시까지 쏘다녔어요. 당시에는 비디오방이 있었는데 거기서 전쟁 영화를 봤어요. 팔달산에도 가고 하루 종일 배회했어요.”

-오스트리아에서는 총기 사건으로 죽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위층에서 내는 소리 때문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잖아요.

“언젠가부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잠도 못 자고, 집에 오면 우당탕하는 거예요. 쫓아올라가면 연습하라고 그러고. 또 내려오면 계속 소리가 들리고.”

-굉장히 분노했을 거 같습니다.

“그렇죠. 엄청 분노했죠.”

이경오 씨 (c)마인드포스트.
이경오 씨 (c)마인드포스트.

-오스트리아 자체가 미웠겠습니다.

“아니요. 오스트리아 자체는 매우 아름다워요. 거기서 관광 가이드 아르바이트도 했고 상사 주재원 자녀들에게 바이올린 레슨도 하고.”

-선생님은 바이올린 전공을 하고 나서 무엇을 하려고 하신 겁니까.

“누구나 음악을 시작할 때는 연주를 하고 싶어하죠.”

-몇 번 입원했습니까. 강제입원이었습니까.

“입원은 두 번 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약간 그런 증세가 있었던 같아요. 그때 병원에 잠깐 다녔는데 그러고는 괜찮았어요. 그리고 결혼하고. 견딜 만하다고 해서 갔는데 빈에서 그렇게.”

-병명이 조현병인가요.

“네. 극심한 우울증에도 시달렸습니다. 공부하러 갔는데 이렇게 됐다는 감정에다가 딸을 두고 돌아와야 했으니까요. 여기 와서는 팔달산을 5년간 배회했어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명치 끝이 엄청나게 아파서.”

-소음이 들리면?

“네. 엄청나게 통증을 느끼죠. 그리고 울화 같은 것도 치밀고.”

-지나온 시절을 많이 원망했을 거 같아요.

“(긴 한숨) 그렇죠. 엄청 원망하면서 살았죠.”

-오스트리아 빈을 용서하게 됐습니까.

“사실 오스트리아는 아름답습니다. 문화의 도시고요. 좋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위층에 사는 그 친구를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이혼하고 딸도 잃고.”

-오스트리아에서 생활비는 어떻게 충당하신 겁니까.

“아이 엄마도 아르바이트를 했고 저도 가이드하고 레슨을 했는데 어머니가 일본에서 일하시면서 많이 지원을 해주셨어요.”

이경오 씨 (c)마인드포스트.
이경오 씨 (c)마인드포스트.

-그 고통의 시간을 건너오면서 깨닫게 된 삶의 의미가 뭘까요.

“삶의 의미요? 음악하는 사람들은 연주를 통해 이름을 날리고 싶어 해요. 목표가 그래요. 저의 경우는 힘들었죠. 좌절하다가 우울하다가 스트레스 받고 잠도 못 자고.

요새는 삶의 의미를 꼭 그런 식으로 볼 거냐라는 생각도 들어요. 제가 국립정신건강센터 동료지원가 교육 과정을 마치고 이수증도 받았어요. 그리고 수원정신건강센터에서 좋은 동료들을 만나서 밴드도 하게 됐고요. 그게 굉장히 위로가 됐습니다. 인생 계획이 플랜 A는 아니지만 플랜 C나 D는 된다면 삶의 의미를 재정립할 수 있죠.

콩나물밴드로 음악을 하면서 즐겁고 위로가 돼요. 동료지원을 하면 약간의 교통비가 나오긴 하지만 같은 처지의 동료들을 도와주면 그게 삶의 의미가 아닐까 요즘은 그렇게 생각해요.”

-선생님은 실패한 사람입니까.

“아 (한숨). 원래의 목표에서는 완전히 실패했죠. 인정해요. 그렇지만 나이 들어가면서 마음을 비우니까 편해져요. 삶의 의미를 재정립하면서 동료지원도 하고 콩나물밴드 공연도 하고 레슨도 해서 수입도 조금씩 생기고요. 이미 지나간 걸 후회만 하면 뭐하겠습니까. 요새는 비우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열심히 살자 그렇게 살고 있어요.”

-어쨌든 실패하면서 가까웠던 친구들도 다 떠났지 않습니까.

“그렇죠. 한국 들어와서 20년 동안 거의 친구를 못 만났어요. 콩나물밴드를 하다 보니 고등학교 때 절친했던 친구가 연락이 왔습니다. 왔는데 내 마음이 좀 저거 되면(괜찮아지면) 만나겠다 해서 아직 연락은 안 해봤습니다.”

-정신장애를 갖게 되면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일반인에 자신의 정체성을 맞추는 게 아니라 정신장애인으로서의 정체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어려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체성? 글쎄요. 정신장애 당사자들은 모두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희들끼리 울타리를 형성해서 동료애를 갖고 교류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의미가 있겠죠. 회복이 되고 외부 사회와 연계가 돼서 활동할 수 있다면 나가서 하는 거고요. 저는 거기에 대해 선을 긋고 의미 부여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선생님은 자신의 패배를 위로할 음악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정신장애인은 그런 재능이 없어요. 그냥 장애를 견뎌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 이론이 기억나요. 좋은 음악은 좋게 영향을 미치고 반대의 경우는 반대가 될 수 있다는 거죠.

우리는 지금 엄청난 미디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어요. 거기서 본인이 좋아하는 음악을 찾아서 즐겨 들으면 돼요. 양질의 음악도 있지만 장르가 다른 음악이라도 찾아서 들어야죠. 클래식 전공자인 저의 경우는 트로트나 7080 음악이 약간 생소하고 덜 친하거든요. 그러나 듣다 보니까 굉장히 좋은 거예요. 그런 매력이 있어요. 아, 이래서 대중음악에 빠져드는구나 싶죠.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익숙하게 듣다 보면 새로운 매력들을 발견하게 돼요. 팝을 하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클래식을 잘 안 듣지만 듣다 보면 좋아지게 되고, 또 클래식 하는 분들이 팝이나 대중음악을 익숙하게 듣다 보면 또 좋아지고.

좋은 음악은 장르와 세대를 불문하고 열심히 본인이 찾아서 들으면 분명히 마음의 정서적 위로와 공감을 찾을 수 있다고 봐요. 전공을 하든 안 하든 별 상관이 없어요. 좋은 음악을 찾아야죠.”

-음악으로 상처가 치유되던가요.

“저는 요새 좋은 음악 발굴해서 여러 단톡에다 올립니다. 올리면 댓글도 올라오고, 좋은 음악이라고 해요. 반응이 즐겁기도 하고요. 클래식이나 팝, 뉴에이지 등 좋은 건 다 올리죠.”

-좋아하는 음악 하나만 소개해 주신다면요.

“저는 마음이 힘들 때는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를 들어요. 거기 2악장이 있는데 그걸 들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갑자기 위대해지는 느낌이 들거든요. 또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2악장은 굉장히 명상적이예요. 그럼 차분해져요. 좋은 음악들 너무 많죠. 팝송 You raise me up도 그렇고.”

콩나물밴드 멤버들. (뒤쪽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박찬기 씨, 유주한 씨, 이기탁 씨, 이경오 씨, 조장현 씨. (c)마인드포스트.
콩나물밴드 멤버들. (뒤쪽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박찬기 씨, 유주한 씨, 이기탁 씨, 이경오 씨, 조장현 씨. (c)마인드포스트.

-선생님은 음악을 통해 정신장애인을 경멸하는 사회에 저항하는 겁니까.

“예. 조현병으로 인한 사건·사고가 발생하지만 그건 극소수예요. 그게 조현병 당사자들의 전체인양 오도되는 게 아쉬워요. 그들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야죠. 탈원화라고 하는데 지역사회에서 잘 살아갈 수 있게 제도적으로 촘촘하게 케어하면 조현병에 의한 사고가 근본적으로 줄어들 거예요.

그런데 정신건강 복지 예산이 너무 적어요. 그러니 케어가 안 되죠. 좀 더 과감하게 정신건강 복지 예산을 투입해야죠.”

-콩나물밴드가 만들어진 게 10여 년 전입니다. 어떻게 결성하게 됐습니까.

“처음에 일렉 기타를 치는 박찬기 님이 있었고요. 저는 바이올린 전공하고 증상 때문에 10년 동안 쉬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악기가 와해되고 해체된 거죠. 바이올린은 나무이기 때문에 특수 아교로 제작하는데요. 장마에 방치해 두면 악기가 습기가 차서 완전히 와해가 돼 버립니다.

그랬는데 수원정신건강복지센터 상임팀장님이 3년 동안 저보고 악기를 좀 해보라고 했는데 저는 안 한다고 했어요. 그러다가 우연한 계기로 인터넷에서 30만 원을 주고 상임팀장님이 바이올린 구입을 해주셨어요. 돈은 제가 내고요.

그렇게 손가락을 풀다가 박찬기 님을 만났습니다. 박찬기 님은 그때 센터에서 기타 동아리 리더를 맡고 있었거든요. 또 베이스 기타 치는 조장현 님도 역시 센터에서 동아리 리더를 맡았어요. 센터 선생님이 한 번 (음악을) 해 보지 않겠느냐고 해서 심심풀이로 취미 삼아 시작을 했습니다. 센터 여성 사회복지사님이 키보드를 맡았고요.

처음에는 정신의료기관이나 사회복귀시설 행사에 서너 곡 준비해서 슬슬 나갔어요. 그러다가 사회복지사님 나가고 키보드 하는 당사자가 들어오고, 또 보컬하는 이기탁 님이 들어오고 통기타 치는 조장현 님이 들어왔어요.

키보드는 인원 변동이 좀 있었죠. 같이 활동하다가 취업해 나가면 인원 변동이 생기잖아요. 키보드가 있으면 좀 더 풍성해질 건데. 지금은 보컬, 일렉, 베이스, 바이올린 이렇게 하고 있어요. 가끔은 객원으로 드럼 치시는 분이 있고. 지금 새로 이주한 님이 들어와서 드럼을 배우고 있어요. 그렇게 다섯 명입니다.”

-콩나물밴드가 정식 만들어진 게 언제입니까.

“그렇게 하다가 2~3년 뒤에 만들어진 거죠. 저희 활동이 점점 알려지면서 정신보건 시설이나 지역사회 행사, 보건소나 병원, 드림 페스티벌, 자원봉사자 단체 등 여러 군데서 요청이 들어왔어요. 경상도도 가고 전라도도 가고 충청도도 가고 서울고 가고.”

-콩나물밴드 이름은 누가 지은 겁니까.

“제가 우리 밴드 만들면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하다가 장난으로 콩나물밴드라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시설장님이 ‘오, 콩나물밴드 그거 좋다, 부르기 쉽고.’ 처음에는 음표가 콩나물을 닮았다는 의미로 이해했어요.

공연을 다니다 보니까 아나운서가 어떻게 이름을 그렇게 지었냐고 물어요. 그래서 이왕이면 콩나물이 시루에서 자라듯이 우리도 음악을 통해서 즐거움도 느끼고 함께 성장하자는 걸로 의미 부여를 하게 된 거죠.”

-기성 음악만 불러서 식상하다는 비판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섭섭했겠습니다.

“저희가 각자 일들을 갖고 있어서요. 바리스타도 있고 또 대학에서 사무 일을 하고, 또 동아리 리더도 하고 저도 레슨을 하니까 일주일에 두 번씩 연습을 해요.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꾸준히 한 달에 한두 곡씩이라도 노래를 개발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이경오 씨 (c)마인드포스트.
이경오 씨 (c)마인드포스트.

-지금까지 얼마 정도 공연과 축하 무대에 올랐습니까.

“일 년에 한 40회 정도 다닙니다. 행복한우리동네의 안병은 선생님의 소개로 음악치료사로 있는 문현호 선생님(‘입술을깨물다’ 그룹 베이시스트)이 ‘틈’이라는 곡 창작에 참여해줬어요. 또 인디밴드 ‘입술을깨물다’가 저희들 실력을 향상시켜 주고 함께 창작곡도 대여섯 곡 낼 거 같습니다.

가사를 만들 때는 서로 협의해요. 아픔을 표현하되 무겁지 않고 경쾌하고 밝은 느낌으로 가자고 했어요. 그런 취지로 곡을 만들어요. 꼭 당사자라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도 대중적으로 쉽게 부를 수 있는 노래도 생각하고 있어요. 올해 5~6곡 정도 만들 계획입니다.”

-한번 축하 무대에 오르면 얼마 정도 법니까.

“저희는 처음에 즐거움을 위해서 시작했어요. 즐겁게 청중들과 소통하고 맛있는 거 먹는 것도 즐거웠고요. 뷔페 가서 엄청 맛있는 것도 먹고, 결혼식에도 가고. 그런 즐거움으로 모였습니다. 어쩌다 교통비 정도로 몇십만 원씩 주기도 하죠.

‘여럿이함께’라는 정신건강을 지원하는 시민단체가 있어요. 그 단체는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당사자 들로 구성됐는데 십시일반으로 몇만 원에서 몇십만 원씩 꾸준히 후원해 주세요. 그 기금 중에 마음사랑(수원 지역 정신장애인 인권 단체) 찻값이나 회의 시 다과 비용을 지원하고 있고요.

공연 가면 20~30만 원 주는 경우가 있어요. 저희가 재능 기부를 하러 다니기도 해요. 저희 즐거움을 위해서 만드는 거니까요. 그걸 모아서 연습 끝나면 식비로 하기도 하고요. 가끔씩 몇만 원씩, 5만 원씩 나누기도 하고. 그런 재미가 있죠.”

-'틈' 노래에 열 곡 정도가 들어가 있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한 곡만 들어가 있어요. 저희가 7080 음악은 5곡 정도가 들어가 있고요. 작년에 선생님하고 저희가 협의해서 만든 게 틈입니다. 이번에 음원 올라가고요. 앞으로 5곡 정도 만들 생각입니다.”

-자작곡 ‘틈’에서 ‘삶이 정말 아름답냐’는 소절이 나옵니다. 문득, 너는 삶이 아름다운 적이 있느냐라는 정신장애인이 쓴 시구절이 떠오르더군요.

“예를 들면 정신장애인에 대해 딱 떠오르는 단어가 뭐냐. 그럼 사랑, 고통, 아픔 등이 나와요. 그걸 취합해서 그중에 마음에 와닿는 걸 이야기하죠. 그 다음에 곡을 만들고요. 그러나 정신장애인의 아픔을 이야기하지만 너무 쳐지진 말자고 해서 좀 경쾌하게 했죠.”

-선생님의 지나온 삶이 아름다웠습니까.

“아름답기만 하고 슬프기만 했겠습니까. 섞여 있는데요.”

-밴드에 보컬, 바이올린, 베이스, 기타는 있는데 드러머는 없더군요.

“드럼은 객원으로 했습니다.”

이때 박찬기 씨가 부언을 했다. “원래 드럼은 김주식 선생이 쳤는데 여기로 지금은 유주한 씨로 넘긴 거죠. 연습하고 있어요. 지금 드럼이 필요해서요.”

-콩나물밴드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회원이 있으면 가입에 어떤 조건이 있습니까.

“안 그래도 저희가 키보드 필요하고 드럼도 필요해요. 정신장애인 당사자고 음악을 좋아하고 이왕이면 기본적인 베이스가 돼 있는 분들이라면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연습하는 요일은 따로 있습니까.

“일주일에 두 번요. 화요일, 금요일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이번 '틈' 음반 발매로 돈은 좀 벌었나요.

“(웃음) 그걸로 벌겠습니까. 대신 즐거움이 있어요. 그리고 다른 활동을 해서 수입을 얻고요.”

다시 박찬기 씨가 말했다. “거의 벌기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콩나물밴드 멤버들. (c)마인드포스트.
콩나물밴드 멤버들. (c)마인드포스트.

-새 음반을 준비할 거 같습니다.

“올해 한 5곡 정도 새 곡을 만들려고 합니다. 지금 가사 점검하고 있는데요.”

-몇 곡 정도 만들어놨습니까.

“일단 한두 개. 바이올린 기악곡으로 하나를 만들려고 하고 있고요. 행복한우리동네에 있는 회원과 함께 보컬로 작업해서 한 곡 만들 생각이고요. 기탁 님이 자작곡한 게 있어서 그걸 다듬을 생각입니다. 또 인디밴드에서 곡을 맡고 계신 분이 한두 곡 정도 생각해서 함께 연습할 예정입니다. 공동작업으로 피드백하는 거죠.”

-콩나물밴드가 언제까지 이어질 거 같습니까.

“제 생각은....”

그때 박찬기 씨가 다시 “백 세까지”라고 말했다. 모두 웃었다.

“그때까지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눈이 보이고, 설 힘이 있고 그러면 언제까지나.”

-선생님들이 음악을 통해서 정신적으로 치유가 됐다고 생각하십니까.

“음악을 통해서 우리 자체가 즐겁고요. 서로 동료애로 의지가 되고요. 바깥에 나가서 같은 당사자들, 시민들과 공감하고 소통하고 박수받는 게 즐겁고요. 저희는 시민들에게 조현병입니다라고 얘기하고 공연을 합니다. 그럼 조현병 당사자들도 저렇게 하는구나 하면서 인식개선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데에 대해 자부심과 자긍심을 느끼게 돼요.”

조장현(53) 씨가 말했다. “치유가 됩니다. 위로도 되고요. 장애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위로가 되는 거죠. 같아요.”

-외롭고 아플 때, 선생님은 어떤 음악의 바이올린을 켭니까.

“저는 클래식이나 멘델스존의 바이올린협주곡 같은 거. 또 수잔 젝슨의 에버그린(상록수)도 하고요.”

-선생님에게 삶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그저 견디고 살아가야 하는 겁니까.

“삶이요? 한 20년 동안은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나이도 들어가고 하니까 환청도 고만고만한 거 같고요. 환청이 바깥에서 활동할 때는 안 들리는데 집에 혼자 있으면 조금씩 들려요. 그래도 약 먹으면서 낮에 일상생활을 하니까 그게 위로가 되고요.

유대인 정신의학자 빅토르 프랭클의 책 ‘삶의 의미’를 읽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프랭클은 수용소에서도 유리 조각으로 면도를 하고 건강하게 일상의 끈을 놓치지 않아요. 독일인들이 볼 때 그는 건강해 보이는 거죠. 관리도 잘 하고. 당시에 건강한 사람은 따로 일을 시키기 때문에 일을 하면서 살아남은 거죠.

저도 나이 들어가면서 여유도 생기고 밴드하고 동료지원을 하니까 거기서 삶의 의미를 찾는 거 같아요. 꼭 종교라는 거창한 이름을 걸고서 활동하는 게 아니어도 생활 속에서 힘든 동료를 서로 돕고 위로도 받는다면 그게 의미가 아닌가 싶어요.”

이경오 씨 (c)마인드포스트.
이경오 씨 (c)마인드포스트.

-살아간다는 건 꿈을 하나씩 버리는 과정이 아닐까요.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다 못 버렸어요(웃음). 전 소박해요. 경제적인 쪽을 전혀 생각 안 할 수가 없죠. 자기 앞가림 정도는 하고 민폐는 끼치지 말자가 그 하나고요. 좋은 식습관과 생활습관을 가지고 조금 애쓰면서 지향점을 ‘9988’(99세까지 팔팔하게 살자는 의미)로 해 보자예요. 내일은 하느님만이 아시는 거니까.”

-오스트리아 빈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까.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물론 사랑하는 딸이 거기 있으니 보고 싶죠. 그러나 지금 돌아가면 뭐 하겠습니까(웃음). 다만 여행은 가고 싶습니다. 오스트리아가 참 아름답거든요.”

인터뷰 자리에 동석한 이들에게 꿈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신학을 전공한 박찬기 씨는 “조현병이 생기면서 너무 많은 걸 포기했다”고 토로했다. 이기탁 씨는 “결혼해서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유주한 씨는 “건강하게 살고 싶다”고 짧게 말했다. 조장현 씨에게 꿈을 묻자 박찬기 씨가 “졸부(猝富). 10억 버는 거”라고 말했다. 회원들이 모두 웃었다. 화이트보드에는 현재 만들고 있는 곡의 가사가 적혀 있었다.

(c)마인드포스트.
(c)마인드포스트.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