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형 기자의 변론] 언론이 정신장애인을 무능력자로 접근해...불쌍함과 도움 프레임은 본질 왜곡
[이관형 기자의 변론] 언론이 정신장애인을 무능력자로 접근해...불쌍함과 도움 프레임은 본질 왜곡
  • 이관형 기자
  • 승인 2021.08.04 22: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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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은 가난하고 불행해야 한다는 프레임이 만든 신화들
프레임의 현저성, 한 측면만 강조...본질 놓칠 수 있어
조현병 환자 이미지 프레임...살인, 범죄, 포비아로 구성돼
언론의 정신장애 관련 자극적 보도 관행 바꿔야

제가 재학 중인 대구대학원 장애학과에는 다양한 신체 장애인들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가끔 동기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장애 때문에 일어나는 흔치 않은 경험들을 공유합니다. 특히,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동기 분들은 종종 지하철에서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에게 꼬깃꼬깃 접은 천 원짜리 지폐를 받는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거절하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5천 원이나 만 원짜리면 받는다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성의로 생각하고 돈을 받느냐, 시혜와 동정을 거부하고 사양하느냐를 두고 논쟁 아닌 논쟁이 이어지기도 하죠. 아마도 노인 분들이 겪었던 과거 시절에는 장애인들이 신체적으로 불편할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가난하고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도 가난한 장애인들이 많겠지만, 부유한 장애인들도 있습니다. 제가 만났던 시각장애인 중에는 한 달에 100건 이상의 다양한 강의를 하며 억대 연봉을 받는 분도 계셨으니까요.

한번은, 타 대학교의 교수님으로부터 자신의 유학 경험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교수님이 미국에서 유학을 하는 동안 현지인 지체장애인 친구와 어울렸는데 초대를 받아 집에 가보니, 집사와 가정부, 운전기사가 있을 정도로 부유한 삶을 살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말만 하면 일하는 분들이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주고, 차로 이동시켜 주고, 심부름을 해 주어서 장애로 인한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장애인도 가난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부유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 사람들이 언론이나 미디어를 통해 접했던 장애인들은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실제로 장애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든, 가난과 불행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야 했습니다.

전 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험 준비를 위해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란 작품을 읽었습니다. 소설 속에 곱추로 나오는 표현되는 척추 장애인은 가난하고 무능력해서 가족들까지 불행으로 이어지는 모습에, 장애인들이 불쌍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비슷하게는 2011년 개봉한 영화 <완득이>에서도 주인공의 아버지가 장애인으로 나오는데, 역시나 가난하고 무능력한 모습으로 그려졌죠.

제 머릿속에서 장애인들이 가난하고 아프고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미지가 굳어진 건 ‘사랑의 리퀘스트’라는 프로그램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가난하고 힘든 생활을 하는 장애인 가족을 다루곤 했습니다. 가정의 가장이자 보호자가 되어야 할 남편, 혹은 부모가 장애와 질병으로 인해 아픈 상태로 침대에 누워 지내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는 자녀와 아내의 모습을 자주 보여줍니다. 여기에 잔잔한 음악이 깔리고, 영상 왼쪽 상단에는 후원을 위한 ARS 전화번호가 나옵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장애인과 소외 계층이 경제적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인식 속에 장애인들은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프레임이 자리 잡는 부작용이 생겨난 것이죠.

액자를 뜻하는 프레임은 ‘마음의 창’에 비유되곤 합니다. 어떤 대상, 혹은 개념을 접했을 때, 어떠한 프레임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대상과 개념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프레임에는 현저성(salience)이라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현저성은 한 측면을 강조한 나머지 다른 측면들은 무시하게 되는 부작용을 갖고 있죠. 그래서 언론의 의도와 방향성에 따라 사람들은 특정 사실 부분만을 받아들이고, 본질적인 모습을 놓치고 맙니다.

이러한 프레임의 효과와 영향력은 강해서, 사회의 많은 분야에서 활용이 되고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 정치인들이 서로를 ‘종북좌파’ 혹은 ‘토착왜구’라고 비난하는 것도, 빨갱이 내지는 친일파라는 프레임을 씌우기 위함이죠.

프레임은 정치인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을 비난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노인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요즘 어린 것들은 버릇이 없어”라는 말을 하듯이, 젊은 사람들은 그런 노인들에게 ‘꼰대’라는 프레임으로 반박할 수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도쿄 올림픽 양궁 금메달리스트 ‘안산’ 선수에게 헤어스타일을 근거로 ‘페미니스트’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사람들도 많았었죠.

이같은 프레임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집단 중 하나가 정신장애인 혹은 조현병 당사자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기자는 단순한 방법으로 조현병 환자들에 대해 어떤 이미지의 프레임이 씌웠는지 찾아보았습니다. 먼저, 구글 사이트에 조현병이란 단어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그 중 눈에 띄는 이미지를 모아 보았습니다. 이미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거나 얼굴을 가리는 등 무언가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미지에 삽입된 자막도 ‘살인’, ‘범죄자’, ‘포비아’와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고 폰트 자체도 무언가 어둡고 공포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어서 유튜브 영상 속에 나오는 조현병 환자들의 모습도 찾아보았습니다. 캡쳐된 이 사진들은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6-정신장애(서울시 장애인식 개선 교육영상)’라는 제목의 영상에서 가져왔습니다.

영상 속에서 배우가 연기하는 조현병 환자는 무언가 불안한 시선과 위축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갑자기 혼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듯한 행동을 하고, 갑자기 소리를 지르거나 목을 조이려는 듯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 종합편성 채널의 아침 프로그램에서는 안인득 사건을 재현하는 영상을 내보냅니다. 이번 영상에 등장하는 연기자도, 충동적인 행동과 증상으로 고통스러워 하다가 살인을 저지릅니다. 그리고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을 보며 웃음 짓죠.

이처럼 언론과 미디어는 조현병 환자에게 많이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 혹은 괴상하고 무서운 대상으로 프레임을 씌워 왔습니다. 이처럼 언론의 무분별한 프레임으로 인해 많은 당사자와 단체에서 이의를 제기했고, 언론 역시 이러한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일부 깨어있는 언론과 기자들도 더 이상 불쌍하고 폭력적인 프레임을 지양하고자 노력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마저도 정신장애에 대한 무지와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또 다른 형태의 프레임을 생산해낼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들어 언론은 정신장애인을 무능력의 프레임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정신장애인들은 직장과 사회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고, 사회와 주변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바라보게 하고 있죠.

겉으로 보기에는 이 사회가 나서서 책임지고 정신장애인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대중들도 조현병 환자들을 무조건 무섭다고 멀리하지 말고, 관심과 사랑으로 먼저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몇 년 전, 한 방송국 작가로부터, 책을 내고 활동을 하는 당사자로서, 사회의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인터뷰에 응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카메라 앞에서 2시간 동안 인터뷰를 했고, 제 인터뷰 내용은 방송에 15초 정도 방영됐습니다.

제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과거 성공만을 바라보며 살아오다가, 조현병을 겪고 나서 평범함 속에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15초 분량의 방송 내용은 “다른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동경한다. 주변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라는 식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조현병으로부터 많이 회복되어 책을 내고 당사자 활동을 하는 저조차도, 누군가의 도움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고 싶은 나약한 존재로 프레임이 씌워진 것입니다.

조현병 환자는 주변의 도움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프레임. 언뜻 보면 맞는 말이고 사회의 인식과 편견이 개선되어야 할 방향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휠체어를 타고 지나가다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천 원짜리 지폐를 받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신체장애인들 중에는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많은 돈을 버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조현병을 비롯한 정신장애인들 중에서도 사회의 전문 분야와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펼치는 당사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언론이 계속 정신장애인들에게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고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현저성(salience), 즉 한 측면을 강조한 나머지 다른 사실들을 무시하게 하는 부작용을 키울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에도 한 방송국 아침 프로그램에서 인터뷰 섭외 요청이 왔었습니다. 조현병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자는 작가의 취지가 마음에 들어 요청에 응했습니다.

하지만 며칠 후 악몽을 꿀 정도로 느낌이 좋지 않아서, 다시 인터뷰를 취소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출연을 거절한 아침 프로그램에서 앞서 소개했듯이 ‘안인득 사건’을 재현하는 영상을 내보냈습니다.

아마 제가 출연에 응했다면, 안인득 사건 재현 영상에 이어 제 인터뷰 영상이 나갔을 겁니다. 그리고 제 발언이 어떻게 편집되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도 방송국에서 원하는 프레임에 제 모습을 맞추었겠죠.

저도 대학교에서 언론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잠시나마 기독교 계통으로 기자 생활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자들을 가리켜 ‘기레기’라고 표현할 때 마다 내심, 마음이 속상할 때가 많았습니다.

취재 대상으로부터 홍보용 기사나, 인터뷰를 빌미로 돈을 요구하는 언론사와 기자들도 분명 있었습니다. 저조차도 기자 시절, 교회나 목회자들에게 취재와 인터뷰를 요청할 때, “우리는 기자에게 줄 돈이 없다”라며 취재를 거부당한 적도 있었고요.

사명감으로 일해 온 저와 제가 속했던 언론사가 돈 받고 취재하는 곳으로 오해받아 속상했습니다. 그래서 언론의 행태를 비판하는 칼럼을 쓰면서도, 제 마음이 기쁘거나 가볍지는 않습니다. 분명, 바른 기자 정신을 잃지 않고 발로 취재 현장을 뛰면서 사회의 정의를 위해 일하는 분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안인득처럼 일부 강력 범죄를 저지르는 정신질환자들로 인해 다수의 당사자들이 예비 범죄자라는 프레임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증상이 심하지 않고 회복되어 사회생활을 잘하는 당사자들조차 자신의 병을 숨기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당사자들을 차별과 편견의 나락으로 빠뜨린 프레임은 부메랑처럼 언론과 기자들에게도 돌아갈 수 있습니다.

조현병 관련 사건 사고가 발생하면 자극적인 제목과 사진으로 앞다투어 기사를 내보내는 언론과 기자들. 그들은 ‘클릭수로 장사하는 기레기’라는 프레임에 갇히게 될 것입니다.

그로 인해 선량한 언론과 기자들마저 피해를 보게 됩니다. 오랜 노력으로 이루게 된 기자라는 타이틀이, 일부 잘못된 보도 관행으로 인한 프레임에 갇혀, 부끄럽고 감추어야 할 직업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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