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 칼럼] 노희정 "죽고 싶은 사람은 없어요...맞아요, 당신이 옳아요"
[당사자 칼럼] 노희정 "죽고 싶은 사람은 없어요...맞아요, 당신이 옳아요"
  • 노희정
  • 승인 2021.08.30 2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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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이 힘들 때 차라리 죽고 싶다는 말을 하곤 한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벽에 부딪혔을 때 그것이 벽을 넘어서 막다른 낭떠러지라고 느껴질 때 자기 자신과만 주고받던 이야기를 용기내어 호소하는 이에게 당신은 무어라고 대답하겠는가?

“나쁜 마음먹지 마.”

“용기를 가져.”

“힘을 내.”

“세상은 한번 살아볼 만한거야.”

금기시되는 단어. 금기시되는 말.

이에 대해 정신건강의학과 정혜신 의사는 “당신이 옳다”라고 대답한다. 이는 금해야 할 행동을 옹호하는 말이 절대 아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이해해 보려 하고 순간 가장 도움을 줄 수 있는 대답이다.

“그랬구나.”

“네가 그렇게 힘들었구나.”

“네가 그런 말을 할 정도로 그동안 많이 아팠구나.”

“그런 말을 하는 네 마음을 이해하겠구나.”

타자에게 털어놓은 은밀한 말을 살피고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 노력하고 진정 이해해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마지막을 떠올릴 정도로 지친 영혼을 살릴 수 있는 말이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보듬어주고 포용해줄 때 절벽 끝에서 한 걸음 내딛고 싶을 만큼 힘든 이에게 위로를 주고 위안을 줄 수 있다고. 그리고 그 한 마디의 말은 사람을 살리는 말이라고.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보다 더 큰 업적인 현생에 사람을 구하는 말이다.

사실 인간의 삶과 죽음은 유기적이며 연속성과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살아있을 때는 정신이라고 하고 죽은 후에는 영혼이라는 말을 쓸 때 결국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생각‘이다. 그것은 종교적 믿음이 될 수도 있고 오로지 단 한 번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대한 인생 플랜이 될 수도 있다.

임세원 著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임세원 著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작고하신 임세원 교수님은 생전에 병으로 인한 통증으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됐고 우울이 얼마나 한 인간을 잔인하게 지배하고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직접 체험하고 나서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라는 책을 발간했다.

안타깝게도 죽음을 떠올리며 극약을 모으고 밧줄을 사고 장소를 미리 탐사하는 사람에게는 “이것도 지나가리라”는 생각은 절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을 갈망하고 그것이 마지막 희망이라는 생각만이 가득해진다.

하지만 임세원 교수님의 말대로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사람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고통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고통이 끝나는 것이지 살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어서이지 나약하고 현실성 없고 책임감 없는 도피자이어서가 아니다.

“꿈길밖에 길이 없어” 대신 “죽음밖에 길이 없어” 란 생각과 느낌만이 가득해서 죽음이 오히려 희망의 한 줄기 빛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자살예방센터 1393’은 국민들의 위기 상황을 막기 위한 사업으로 운영되고 있다.

키패드 1393만 누르면 24시간 전화 상담을 받을 수 있고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와 연결돼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담을 하는 직원의 수는 부족하고 상담 시간도 위기 상황에 대응하기엔 짧아 사업의 효과성은 아직도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미지수이다.

자살예방센터가 계획대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보다 심층적인 상담이 이뤄질 수 있도록 관련 업무자의 수를 늘리고 심리상담가와 전문의도 도입해 보다 전문성 있는 해석과 해법을 전하는 대응안이 필요하다.

‘자살’이라는 말을 바꿔 말하면 ‘살자’가 된다.

우연인 듯 역설적이지만 죽음을 갈망하는 마음을 잔잔한 호수처럼 들여다보라.

살고 싶다는 갈망을 채워 넣을 수 없어서 가슴 속에 끓어 넘칠 듯한 분노가 자신을 향한 강한 물살로 거세게 몰려드는 것이다.

6년 전의 일이지만 정신장애인들의 주거 시설 ‘한마음의 집’에서 인터뷰했던 한 환우의 선연한 눈빛과 떨리는 목소리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는 퇴원 후 돌아가서 머물 집을 잃었다. 돌아갈 가족도 잃었다. 공동체에서 생활하며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최저 시급도 되지 않는 수입임에도 그가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은 살아나갈 방편과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독립된 자신의 집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말했다.

“살고 싶습니다.”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의 눈은 선연했지만 떨리는 목소리 속에는 울분과 결코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놓치지 않겠다는 비장함이 꾹꾹 담겨있었다.

그는 양손에 같은 무게의 짐을 쥐고 있었다. 바로 ‘살자’와 그 반대말.

양손 중 어느 손의 짐을 내려놓는지는 우리 각자의 선택이다. 그러나 그 선택은 어쩌면 동전 한 닢을 뒤집듯 너무도 단순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양면성. 살아내고 싶다는 강한 외침이 부딪히고 깨지고 박살날 때까지 우리를 내동댕이치고 마구 대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종교적인 교리와 인권과 윤리를 떠나 나 자신을 지키고 귀하게 여겨야 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주어진 인간의 의무이며 권리이다.

임세원 교수님은 우울의 한계 끝에서 이런 결론을 지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포기하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 인생에서 나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단지 내 인생의 작은 조각이 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나 자신의 행복을 만들어 내기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지내는 것 자체가 행복의 과정이 되리라 믿으며 그렇게 나는 오늘을 살기로 한다. ‘

세상에 단 한 명.

최후의 선택을 생각하는 이를 진정 위로하고 그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안아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는 더 이상 그 선택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그 단 한 명이 될 수 있다.

만약 당신 곁에 그 선택의 절벽에서 발을 내딛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말해줄 것이다.

“그래 네가 옳아.”

그리고 또한 “그 생각을 하기 전의 너도 옳아” 라고도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은 결코 그 사람의 것이 아닐 수도 있기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데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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