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언니의 책방] 망사 스타킹을 버리며
[삐삐언니의 책방] 망사 스타킹을 버리며
  • 이주현 기자
  • 승인 2022.04.27 17: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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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언니의 책방 ④ 여자들의 등산일기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비채 펴냄

얼마 전 22년간의 인연이 쌓인 물건을 버렸다. 검은 망사 스타킹. 계속 신기엔 너무 낡았기 때문이다. 허리 부분의 밴드가 너무 늘어져 걷는 도중에 자꾸 흘러내렸다. 도무지 수선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망사’ 그 자체가 좀 과한 측면이 있어 나는 주로 발목이 나오는 큐롯 팬츠나 길이가 긴 치마에 받쳐 신었다. 그것도 1년에 너댓번 정도였다. 쓸모가 그리 많지 않은데도 강산이 두번 바뀔 만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이유가 있다. 2001년 정신병원 폐쇄병동에서 만난 H가 준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폐쇄병동 의료진들은 다른 환자의 병명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말을 트게 되면 환자들 서로 자신의 병명을 얘기하곤 했으나 이는 자신의 주장이지, 진실을 알 순 없었다. 그저 나의 얕은 지식에 기대어 병명을 짐작해 볼 뿐이었다. 

H는 당시 감명깊게 봤던 <처음 만나는 자유>에서 주인공의 ‘경계성 인격장애’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가족 내 폭력, 부모의 이혼, 자신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할머니와의 동거 등 그의 과거는 어두웠고, 손목엔 여러번 자해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저는 이상하게 칼을 자꾸만 사요. 그러다가 손목을 긋게 돼요.” 너무나 똑똑하고 사랑스러우면서도 현실 바깥 어딘가에 마음 반 쪽쯤 놓아둔 듯했다. 

 의사 선생님은 퇴원 뒤엔 환자들끼리 서로 연락하지 말라고 했지만, 우리는 퇴원 뒤 한 번 만났다. 담이 낮은 그의 집을 찾아갔던 기억이 난다. 고마움의 표시로 H는 자신이 아끼던 망사 스타킹을 내밀었다. 당시 나로선 생소한 물건이었지만 그의 개성과 감각이 잘 살아 있는 물건이란 생각에 고맙게 받았다. 그뒤 H를 만나지 못했다. 또다시 자해 시도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풍문으로 들려왔고 연락이 닿지 않았다. 

 망사 스타킹은 더이상 만날 수 없는(만나지 않은) H와 나를 이어주는 유일한 매개체였고, 또한 5개월에 걸친 정신병원 입원 시절의 증거품이었다. 떠올리기 싫은 아픔이면서도, 온전한 나의 기억이었다. 그래서 여러번 구멍이 난 스타킹을 버리지 않고 검은 실로 이리저리 기우면서 조울병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결론은 대부분 이랬다. ‘결국 이 모든 건 나의 것이다.’ 

 몇년 전, 우연히 만난 이 문장은 나의 생각을 정확히 요약하고 있었다. “사람은 크든 작든 짐을 지고 있다. 단, 그 짐은 옆에서 보면 내려놓으면 될 것 같지만 그 사람에게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색한다. 그것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방법을.”

 일본의 ‘미스터리 작가’ 미나토 가나에가 쓴 <여자들의 등산 일기>에 나오는 대목이었다. 사랑의 상실, 열등감, 불안감, 우울 등 여러가지 이유로 산에 오르는 여자들의 여덟가지 사연을 담은 소설이었다. 

나는 미나토 가나에의 미스터리 소설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가 <여자들의 등산 일기>를 쓴 이유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부엌 구석이나 좁다란 복도에서 스릴러를 쓰다 보면 빛이 절실한 순간이 온다. 산에선 묵묵히 걷기만 해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나 스스로 치유를 받고 싶어 썼고 실제로 치유를 받았다.” 

  나는 과거의 상처가 ‘현재의 나’를 모두 설명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는 나의 것이고 현재도 나의 것인데, 그 과거와 현재 사이엔, 오늘이 있다. 크든 작든 나의 짐을 지고 한걸음 한걸음 산을 오르는 것과 같은 오늘. 
 등산하기 좋은 계절이다.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모르는 H. 그가 화창한 봄날 산에 오르며 기쁨을 느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가만히 그 이름을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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