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몽골 기행문] 칭기즈칸의 나라에서 정신장애를 사유하다
[짧은 몽골 기행문] 칭기즈칸의 나라에서 정신장애를 사유하다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2.07.12 18: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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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초원. (c)마인드포스트.
몽골의 초원. (c)마인드포스트.

7월 1일, 서울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한 지 3시간30분쯤 지나니 몽골 칭기즈칸국제공항이었다. 밤 11시의 밑바닥이 불빛에 밀려나고 있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라운지로 나오니 김강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정신건강권리옹호센터장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는 가이드 고영훈 씨가 있었다.

차량의 운전대는 오른쪽에 있었다. 일본과 같은 좌측 운전 문화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운전 방향은 우리나라와 같았다. 특이하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차량을 운전하는 고영훈 씨는 선교사로 지난 2006년 몽골에 왔다고 한다. 나는 그가 운전을 하면서 하는 얘기를 물끄러미 듣고 있었다.

고영훈 씨는 “몽골의 국토 면적은 남한의 16배인데 인구는 350만 명에 불과해요”라고 말했다. 그런가보다 했다.

그는 아직 현지에 적응되지 않은 우리 일행에게 몽골의 민족성을 말하기 시작했다.

“몽골은 땅이 넓기 때문에 땅을 차지하고 획득하는 건 큰 의미가 없어요. 대신 적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대립을 하고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공격합니다. 늑대의 성품을 닮은 민족이라고 할까요.”

나는 뭔가 이 땅 문화의 한 부분을 알게 된 듯 귀를 기울였다. 언젠가 중국 조선족의 싸움의 문화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싸움이 나면 ‘네가 이렇고 내가 이렇고’ 하면서 물리적 폭력 이전에 시간을 벌면서 항의나 대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조선족은 욕설을 하면서 바로 주먹을 날린다고 했다. 그때 나는 한국의 싸움 문화가 여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몽골 제국을 건설했던 왕 칭기즈칸은 12세기와 13세기 초반을 관통하는 인물이다. 그는 몽골 고원에 산재했던 부족 국가들을 하나씩 점령한 후에도 계속 영토를 넓히며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일대를 정복했다.

칭기즈칸은 패전한 나라의 국민들과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걸로 유명하다. 배신할 기미가 보이는 부족은 그야말로 씨를 말렸다.

고영훈 씨가 말했다.

“몽골 사람들은 싸움을 벌이면 계속 린치를 가해요. 서구에서는 일정 정도 승패가 나면 물리적 싸움을 중단하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아니에요. 기절해도 끝까지 린치를 가해요. 아마 칭기즈칸이 가진 민족성이 묻어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몽골 수도 울란바타르 도심의 한 숙소에 차는 멈췄다. 이용표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와 배진영 사회복지학 박사, 김영연 활동가가 우리를 맞았다. 밤 12시가 넘어 있었다. 우리는 숙소에 짐을 부린 후 새벽 4시까지 술잔을 비웠다.

몽골의 전통 가옥 게르. (c)마인드포스트.
몽골의 전통 가옥 게르. (c)마인드포스트.

이 교수와 배 박사는 우리 일행보다 4일 정도 일찍 몽골에 와서 현지 조사를 하고 있었다. 몽골 정신장애인을 발굴하고 그들에 대한 구술 서사를 기록하는 조사였다. 이 교수 등은 몽골 국립정신병원을 방문해 그곳에서 나오는 정신장애인을 대상으로 서사를 얻고 또 그를 통해 다른 정신장애인을 소개받는 형식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모두 9명을 인터뷰했다고 한다.

이튿날 우리는 도심을 벗어난 곳의 게르 캠프로 향했다. 게르는 몽골식 가옥이다. 유목민인 몽골족은 우리처럼 한 군데에 머무는 삶이 아니라 부유하듯이 떠다니는 문화를 갖고 있다. 말에게 풀을 먹일 장소를 찾아 몇 개월 단위로 게르를 옮긴다.

우리가 간 게르는 외양만 전통 게르일 뿐 그 안은 4명이 잘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특별히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일행 중 누군가 불을 켰다. 게르 안의 사물이 환하게 밝아왔다.

이 교수와 일행은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밤의 색깔은 어두웠다. 초원 저 너머 500미터는 족히 될 먼 곳의 게르에는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문득 아득한 시(詩)를 보는 듯 나는 쾡한 눈으로 그 먼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는 폭죽처럼 터지며 현실의 위로로 소환되는 것이다.

우리 일행을 이끄는 가이드는 또 한 명 더 있었다. 발지르(35) 씨다. 나는 처음에 그를 한국인으로 알았다. 한국말이 유창했고 굉장히 부드러웠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젊은 시절 몽골로 이민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초원을 달리던 차가 잠시 휴식을 위해 섰을 때 나는 그에게 “한국에서 언제 이민 온 건가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전 몽골인이에요. 20대 초반에 한국에서 4년 정도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놀라웠다. 불과 4년 만에 저만큼의 어휘를 가지다니. 발지르 씨는 20대 초반 서울의 한 대학에서 멀티미디어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하지만 학부 2학년을 마치고 무슨 이유 때문인지 돌아가고 싶었고 그래서 짐을 싸서 그대로 몽골로 귀국했다고 한다.

그는 “사실 좀 후회돼요. 한국에서 공부를 계속할 걸”이라고 말했다. 그와 나는 말 없이 담배를 피웠다.

달리던 차는 다시 어느 초원 고원에서 멈췄다. 차 문을 열고 나오니 바람이 거셌다. 그리고 돌로 쌓아올려진 탑 꼭대기에 길이가 사방 50센티미터 정도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바람은 거셌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한국인과 결혼 후 10년간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던 몽골 여성의 말이 떠올랐다.

그 여성은 “제가 가장 그리운 건 몽골 초원에서 맞았던 그 바람소리에요. 그게 그렇게 그리워요”라고 말했다.

(c)마인드포스트.
(c)마인드포스트.

인간의 노스탤지어는 얼마나 고통스러우며 아름다운가. 인간의 향수는 유년의 향수다. 나 역시 그랬다. 잠시 잠깐 유학생활을 할 때, 그리고 실패했을 때, 나는 한국의 싸락눈이 내리는 풍경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그 몽골 여성의 노스탤지어는 내 안에 상처처럼 박혔다.

나는 깃발을 바라보았다. 거센 초원의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 왜 이 아무도 없는 황량한 공간에 깃발이 매달린 것일까. 문화인류학자나 종교학자가 여기에 대해 분석을 해 놓은 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모른다. 나는 의문이 생겼을 뿐, 어떻게 저 풍경을 해석해야 할지 모른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다. “우리는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울란바타르 도심의 차량을 살펴보면 90%는 운전대가 오른쪽에 있었다. 버스는 모두 왼쪽인데 자세히 보니 현대와 대우 마크가 선명하게 찍힌 버스들이었다. 한국에서 팔려나간 버스들이다. 일반 승용차는 일본 도요타 마크가 많았다.

김대환 청주정신건강센터장이 나름 분석해 말했다.

“몽골이 사회주의 국가일 때 러시아 차들을 많이 썼는데 이게 고장이 잘 났거든요. 그런데 일본 차는 고장이 잘 나지 않아요. 그러니 선호하는 것이겠죠.”

나는 고개를 주억였다.

몽골은 1990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이 몰락한다. 1991년 소비에트의 몰락으로 사회주의는 지구상에서 온전히 몸을 감췄다. 몽골은 사회주의 붕괴 후 1992년 자본주의 체제로 급속하게 바뀐다.

한국, 몽골, 일본의 동북아 3국 심포지엄에서 몽골 측 강연자의 말이 떠올랐다. “몽골의 장애 단체는 사회주의 몰락 후 태동했습니다.”

최근 러시아의 침략 전쟁을 비판한 한 러시아 여성 기자가 당국에 체포돼 정신병원으로 끌려갔다. 또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도 체제 비판적 인물이 정신병원으로 끌려들어갔다.

정신질환이 정치, 혹은 권력과 교차될 때 정신병원은 감옥으로 변해버린다. 특히 진실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언론은 권력에 의해 은폐되거나 기자들은 살해당한다. 왜?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 진실은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폭로다.

몽골 장애 단체의 태동 역시 사회주의 몰락 이후라면 우리가 젊은 시절 동경했던 사회주의는 어쩌면 거대한 수용소였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비탄의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 우리는 젊었고 사회주의의 개념보다 그 이미지에 취해 그 땅과 국가 체제를 얼마나 동경했던가. 결국 우리는 그 권력 체제의 풍경 속에서 사회주의의 부조리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그렇다고 해도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무언가 인간이 인간으로 존엄이 인정되는 사회를 지향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어쨌든 몽골의 사회주의 체제는 다양한 소수자의 한 부류인 장애의 문제를 억압했고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

이 교수와 일행은 도심의 국회 앞을 지나쳤다. 인조잔디로 된 국회 앞 광장에서는 몽골인들이 결혼식 기념 사진을 찍거나 잔디에 누워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대충 풍경을 훑어본 후 다른 장소로 이동하려고 했다. 그때,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No repression.”

한 남성이 부동자세로 서서 이 글귀가 담긴 달력 크기 만한 포스터를 들고 있었다.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No repression. 탄압하지 말라. 억압하지 말라.

억압에 대한 정치적 투쟁은 세계의 억압받는 민중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이 체제가, 이 국가 이데올로기가 그 자체로 정의로운가. 나는 그를 스쳐지나갔다.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다만 곁을 지나가며 그와 짧은 눈짓을 교환했다는 것밖에는.

칭기즈칸 동상. (c)마인드포스트.
칭기즈칸 동상. (c)마인드포스트.

일행을 태운 미니버스는 초원의 고속도로를 달리다 멈췄다. 승마를 타러 가는 길이었다. 발지르 씨가 말했다.

“몽골은 매년 말을 타고 20킬로미터를 달리는 경주를 해요. 빨리 달려야 하니까 승마 선수는 당연히 무게가 적게 나가는 10살 정도 아이들이 많이 나갑니다. 우승마는 말값이 오르고 선수는 CF 광고도 찍어요. 수익이 크죠.”

승마장에 도착한 일행은 말을 타기 전에 교육을 들었다. 말 주변으로 파리떼들이 날아다녔다. 몽골에서 승마를 즐긴다는 고영훈 씨가 주의를 주었다.

“박차에 발을 너무 깊숙이 넣으면 안 돼요. 낙마(落馬)시 박차에 발이 걸려 질질 끌려가서 위험할 수 있어요.”

나를 태운 말은 여유를 부리듯 천천히 걸었다. 내 앞에는 말을 탄 몽골인이 내 말 목에 묶은 밧줄을 조끔씩 끌면서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꾸 내 말이 앞 말로 가까이 접근해서 바지가 자꾸 앞 말의 등허리에 부딪혔다. 발지르 씨에게 “앞 말과 좀 떨어지게 해달라”고 말했다. 발지르 씨가 해당 몽골인에 말을 하자 그는 줄을 길게 늘어뜨리기 시작했다. 나는 큰 감흥 없이 말 위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울란바타르에서 1시간쯤 떨어진 천진벌덕(Tsonjin Boldog)이라는 벌판에는 청동 기마동상이 있다. 높이 40미터, 무게 250톤인 은빛의 그 동상은 칭기즈칸이며 그가 말을 타고 팔을 앞으로 뻗고 있는 조형물이다. 역동적 모습의 그 동상 위로 햇살이 ‘쨍’하듯이 흘러내렸다. 칭기즈칸이 바라보는 방향은 자신의 고향이라고 한다.

수구지심(首丘之心)이 떠올랐다. 여우도 죽을 때는 머리를 태어난 곳으로 둔다는 그 말. 예수도 그렇게 탄식하지 않았던가. 여우도 쉴 굴이 있고 공중 새도 거처할 곳이 있으나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언젠가 이 글귀를 읽으며 정신적 어려움을 겪던 나는 얼마나 울었던가.

내부로 들어가려고 하니 외국인의 입장료는 3만 투그릭(몽골 화폐단위)이라고 했다. 우리 돈으로 1만2000원, 일행은 결국 내부 구경을 포기하고 돌아섰다.

몽골 인구의 45%는 수도 울란바타르 인근에 살고 있다고 한다. 30%는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한다. 겨울이 되면 값이 싼 석탄을 게르의 몽골인들이 사용해 도심 전체가 우울할 정도로 공기가 나빠진다고 했다. 한 소설가는 겨울의 울란바타르를 방문했다가 그 오염과 살인적 추위에 심히 떨었다는 체험담도 읽은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몽골은 6~8월 여름에 방문하는 게 가장 좋다고 한다.

일행을 태운 미니버스는 울란바타르 도심을 느릿하게 이동했다. 차들은 꼬리를 물었고 서행하는 가운에 서로 새치기를 하면서 차선에 끼어들고 있었다. 30킬로미터를 가는데 몇 시간이 걸릴 때도 있다고 발지르 씨가 말했다.

운전을 하는 몽골인이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도시 슬럼가 비슷한 골목길로 차를 몰았다. 지름길로 가려는가 싶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보았다. 길 건너편으로 백여 개의 게르가 들어서 있는 모습을. 나는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그 슬럼가의 게르를 찍으려고 했다. 하지만 휴대폰을 꺼낸 나는 사진을 찍지 못했다.

길에 나무와 철판으로 슬럼가 게르 풍경을 보지 못하게 막아놓은 것이다. 마치 한국 올림픽 때 빈민의 삶의 풍경을 숨기기 위해 이들이 사는 마을 앞을 장비로 막아버린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몽골 국제컨퍼런스. (c)마인드포스트.
몽골 국제컨퍼런스. (c)마인드포스트.

나는 가려지지 않은 순간의 공간에 드러난 게르를 동영상으로 찍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사회주의의 나라에 온 것이 아니라, 정신장애가 억압인 세계의 한 장소에 머물고 있는 것이라고.

몽골의 비정부기구(NGO)는 500여 개다. 이 중 정신장애 기구는 거의 없다는 게 몽골 연구가들의 설명이다.

나는 발지르 씨에게 물었다. 몽골인은 싸움이 일어나면 상대가 기절을 해도 계속 폭행하냐고.

발지르 씨는 “그렇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이 교수도 거들었다.

이 교수는 “그런 야만의 DNA는 칭기즈칸 당대의 모습인데 그걸 현대 몽골의 DNA로 해석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라고 분석했다.

떠나기 전날 밤, 일행은 일본에서 온 발표자들과 저녁식사를 했다. 무카이야치 홋카이도의료대학 교수를 비롯해 일본 교수들과 활동가들이 함께했다.

20대 초반, 나는 일본으로 가고 싶었다. 거기 다자이 오사무가 있었고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있었고 오오에 겐자부로와 나쓰메 소세키가 있었다. 미국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을 읽고 나는 얼마나 떨었던가.

내게 일본은 섬뜩한 칼의 나라였다. 그 칼에 베인 이의 피가 흐르는 공간이었다. 그 칼의 나라를 껴안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소망에 그쳤다. 대신 몽골에서 이들 일본인 동료들과 만나 가벼운 인사만 전할 뿐이었다.

작가 박경리가 그렇게 말했다. “일본은 칼의 문화예요. 그들은 사랑이 뭔지를 몰라요. 늘 섹스만 있어. 난 누구보다 많은 일본 소설을 읽었어요. 일본은 야만입니다.”

일본이 그랬듯, 내게 몽골은 또 하나의 깨우침의 자리였다. 나는 칭기즈칸이 몽골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하는지, 그가 세계에 어떤 의미였는지, 그 정복자의 유전자가 현대 몽골 정치사회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국회 청사 앞에 칭기즈칸이 앉아 있는 동상이 이들 몽골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우리가 고구려를 우리 민족의 원형으로 생각하듯이 몽골인들이 생존했던 역사적 인물인 칭기즈칸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몽골 국제 컨퍼런스. (c)마인드포스트.
몽골 국제 컨퍼런스. (c)마인드포스트.

어쩌면 광활한 영토에서 말을 타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문명이 분석하고 낙인찍는 정신의학은 그들에게는 아직 너무 멀고 낯선 것이리라. 하지만 문명의 복잡성이 확장될 경우 어떤 식으로든 사회적으로 고통받는 정신장애인은 구성될 수밖에 없다. 이들을 어떻게 선제적으로 인권을 동반한 치유의 길로 이끌 것인가.

그건, 한국과 일본 역시 모색해 왔고 만들어가고 있는 먼 길이다.

나는 숙소로 돌아와 담배를 피우며 호텔 바깥으로 비치는 몽골의 마지막 밤을 바라보았다. 밤 11시에도 사람들이 띄엄띄엄 거리를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술을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써야 할 기사가 있었고 나는 노트북 앞에 앉았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칭기즈칸에 관한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7월 6일 아침 11시, 우리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가 정상 고도에 오르자 옆에 앉은 몽골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나, 한국, 남편 있어, 거기 가야 돼.” 창밖 하늘은 눈이 아프게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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