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함의 연대로 한일 관계를 재설계하다] “사회복귀란 당연한 고생으로 돌아가는 것”
[약함의 연대로 한일 관계를 재설계하다] “사회복귀란 당연한 고생으로 돌아가는 것”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2.08.25 19: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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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① 도토리회 모임에서 베델의집까지
퇴원한 정신장애인 축하 모임에서 베델의집 건설 시작
강점 아닌 약함을 드러내 세계를 재해석하는 게 당사자연구
일본 정신병원 33만 병상, 우라카와는 정신병원 오히려 폐쇄돼
정신장애는 ‘말과 관계의 병’...의료권력에 빼앗긴 언어 되찾아야
‘안심하고 땡땡이치기’는 반(反)자본주의의 인간존중 철학
당사자연구 책 출판되면서 한국 정신장애계와 연결고리 구축돼

한일 관계는 늘 복잡하다. 가해자와 피해자로서의 역사적 문제, 인류의 공동 과제들을 함께 공유해야 하는 형제적 가치,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 등이 그렇다. 그런데 이 모두를 정치적으로만 풀어낼 수는 없다. 다만 시민사회의 요청들이 정치가 풀지 못하는 지점을 보완할 수 있지 않을까. <마인드포스트>는 일본 베델의집 당사자연구 이념의 출발과 한국 정신장애 시민조직과의 교류·협력의 과정을 주제로 4차례에 걸쳐 기획기사를 게재한다.

무카이야치 이쿠요시 홋카이도의료복지대학 임상복지학과 교수. (c)베델의집 누리집 갈무리.
무카이야치 이쿠요시 홋카이도의료복지대학 임상복지학과 교수. 사진=베델의집 누리집 갈무리

1978년 봄. 대학 사회복지학과를 갓 졸업한 23살의 무카이야치 이쿠요시 씨는 일본 북부지역 홋카이도의 삿포로역에서 우라카와 마을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골생활은 딱 3년만 할 생각이었다. 그는 배웅 나온 지인들에게 “3년만 지내고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지인들은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4시간 후 우라카와 마을에 도착한 그는 역 앞의 허물어질 듯한 집들, 허름한 여관들의 모습을 보며 탄식했다.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일은 해 보자고 생각을 바꿨다.

그는 마을 중심지에 위치한 우라카와 적십자병원 사회복지사로 일을 시작했다. 병원의 정신과병동은 130 병상으로 환자들로 차 있었다. 사회복지를 전공한 선배도 병원에는 없었다. 그는 혼자 마을의 적막함을 느껴야 했다. 그때는 몰랐다. 나머지 삶의 대부분을 이 마을에 바칠 줄은.

◆…황량한 우라카와 적십자병원 사회복지사로...3년만 지내겠다 했는데

그해 여름, 정신장애인 동료들이 7년간의 병원 생활 후 퇴원하는 정신장애인을 위해 모임을 가졌다. 초대를 받은 무카이야치 씨는 퇴원한 당사자 30대 후반의 사사키 미노루 씨와 인사를 나눈다. 사사키 씨는 이후 무카이야치 씨와 정신장애인 공동체 운동의 긴 동반자가 된다. 모임의 명칭은 ‘도토리회’였다.

그날 모임에서 그들은 질병이나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도 한 인간으로 존중되고,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지역에서 역할을 갖고 생활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자는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우라카와 특산품인 히다카 다시마를 직송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하청이었지만 성실한 근로 태도에 원청사가 일감을 몰아줬다.

그때,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이 함께 살며 회복을 돕는 공간이 필요했다. 도토리회 회원들은 마을의 낡은 교회당을 빌려 ‘베델의집’이라는 생활공간을 만들었다. 무카이야치 씨도 자기 집 대신 이들과 함께 베델의집에서 생활을 같이 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당시 정신장애인 지원체계는 시설 중심이었고 약물과 전문가 진단 중심이었다. 베델의집은 조금씩 그 경계를 허물어가기 시작했다.

하청을 받던 다시마 판매 사업은 원청사가 문을 닫으면서 베델의집이 인수했다. 사업 초창기 도토리회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낸 10만 엔의 돈으로 시작했던 사업은 10년 후 1억 엔의 이익을 내기 시작했다. 우라카와에 정신장애인 공동체가 있다는 소문이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갓 퇴원한 통합실조증(조현병) 당사자, 가정폭력에 어려움을 겪는 당사자, 중증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당사자, 알코올중독에 빠졌던 당사자 들이 우라카와로 모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150여 명이 베델의집을 중심으로 마을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이후 베델의집은 기저귀 택배사업, 청소 사업 등을 위탁받았고 사업 시작 10년 후 복지샵 베델의집 주식회사, 2002년 사회복지법인 우라카와 베델하우스를 설립하게 된다. 사사키 미노루 씨는 이 법인 이사장으로 취임한다.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이사장이 되고 시설장에 취임한 건 최초다. 베델의집은 출판사업도 함께 진행됐다.

◆…우라카와 마을 낡은 교회당에서 베델의집 시작...다시마 사업부터

일본의 정신보건 서비스 체계는 의료 중심, 약물 중심, 병원 중심이었다. 2018년 현재 정신병원 병상 수는 33만 병상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병상을 보유하고 있다. 일본의 정신장애인 케어와 관리에 관한 법률도 1900년 정신병자감호법에서 시작해 세 차례의 법 개정을 진행한다. 1950년대 정신위생법, 1987년 정신보건법, 1995년 정신보건복지법이 그렇다.

1964년 주일 미 대사 라이샤워가 정신질환을 가진 19세 청년에게 흉기 피습을 당했다. 당시 일본사회는 ‘정신장애인을 지역에 방치해도 되는가’라는 방치론에 불을 지폈고 국가는 개인(정신장애인)의 인권보다 다수(일반 시민)의 인권을 앞에 둔다는 사회방위적이고 치안적인 방식으로 정신장애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치안적 이념은 베델의집이 시작되던 1980년대에도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베델의집 당사자연구 시간. (c)베델의집 누리집 갈무리.
베델의집 당사자연구 시간. 사진=베델의집 누리집 갈무리

우라카와 베델의집은 정신질환으로 겪어야 하는 고통을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고통은 제거돼야 하는 적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지는 수고스러움의 지혜라고 해석한 것이다.

1980~90년대를 거쳐오면서 베델의집은 미국에서 개발된 SST(Social Sillls Training·사회기술훈련)을 당사자 분석에 적용했다. 이는 비약물요법의 하나로 자동차 운전을 책으로 배우는 게 아니라 직접 차에 시승해서 운전 기술을 가르치자는 의미다. 곧 ‘연습하기’이다. 하지만 문제가 나섰다. SST가 인간의 강점만을 내세울 때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약함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였다.

베델의집 사업도 안정권에 들었고 전국에서 견학이나 방문하는 연간 인원이 수백 명으로 늘어가고 있을 때였다.

2001년, 우라카와 적십자병원 정신병동에 입원해 있던 20대 청년이 무카이야치 씨와 마주 앉았다. 청년은 통합실조증을 갖고 있었고 반복적으로 폭력을 행사했고 병원 내 전화기를 부쉈다. 무카이야치 씨는 사실 할 말이 별로 없었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 함께 연구해 보자,”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사자연구가 그렇게 시작됐다.

당사자연구의 회복 결과는 엄청났다. 무카이야치 씨는 한 당사자의 말을 인용해 당사자연구의 힘을 이야기했다. “당사자연구를 알았을 때 이것으로 나도 살 수 있겠다.”

당사자연구는 기존 사람 자체가 문제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사람과 문제를 분리한다. 문제에 대한 고생의 패턴을 같이 연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겪고 있는 고생에 대해 별명을 붙이고 고생의 흐름과 구조를 파악, 자기를 돕는 방법을 알아 가는 구조다.

이 연구에서 가장 많이 제기되는 것이 통합실조증 당사자들이 겪는 환청과 망상이었다. 정신의료체계에서 의료진은 당사자가 겪는 환청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이질적인 개인의 경험으로 치부한다. 그런데 당사자연구는 그 환청을 주제로 공부를 한다.

환청이 말하는 형식, 구조, 그때의 당사자의 마음, 감정적 폭발이 일어나지 않게 진정된 상황에서 안심하고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게 그렇다.

◆…폭발 패턴 보이는 청년과 처음 시작한 당사자연구

이는 핀란드 오픈다이얼로그(Open Dialogue)의 대화에 의한 회복 패러다임과 유사한 대안적 치료법이다. 오픈다이얼로그는 당사자가 정신응급에 처할 경우 당사자와 관련된 의사, 간호사, 친구, 동료, 부모, 경찰 등이 모여서 당사자와 함께 대화를 나눈다. 기존 정신의료 체계의 고착화된 치료 방식인 정신병원 강제입원과 약물 투여와는 다른 접근법이다. 이 오픈다이얼로그에 의해 정신응급을 경험한 이들의 회복률은 약물 투여 환자보다 더 높았다.

베델의집 환청망상 대회. (c)베델의집 누리집 갈무리.
베델의집 환청망상 대회. 사진=베델의집 누리집 갈무리

무카이야치 씨는 정신적 장애는 ‘말과 관계의 병’이라고 규정했다. 그 말을 빼앗기고 부당하게 상실당할 경우 인간은 정신질환을 겪게 된다. 또 정신의료 체계가 당사자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규제하고 과보호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겪어야 할 삶의 고통을 빼앗겨 인간 행위가 가지는 풍요로움과 또다른 삶을 개척할 가능성을 빼앗아 버린다는 지적이다.

당사자연구의 또다른 이념은 ‘약함을 유대로’이다. 각자가 가진 약함을 공개해 서로 돕는 자조(自助)의 의미가 들어있다. 이는 무기력을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에서도 말과 대화를 통해 자신을 알아가는 의미를 담고 있다. SST가 가진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무카이야치 씨는 “약함은 강함이 약해진 것이 아니다. 강함으로 나아가는 과정도 아니”라고 했다. 그는 “강한 것의 지배를 받는 가치 속에서 인간이란 약한 존재라는 사실과 마주하고 그 안에서 약함이 갖는 가능성을 이용한 삶을 선택한다”고 설명했다.

당사자연구는 대학에서도 적극 수용됐다. 2015년 도쿄대 첨단과학기술연구센터의 구마가야 신이치로 교수는 당사자연구 강좌를 개설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사자연구는 방치되고 버려진 다양한 소수자들이 존재, 중복 차별을 겪는 사람들, 젠더 문제와 약물의존증을 가진 사람, 소수 민족과 정신장애를 가진 이들의 현장에서 생겨난 실천이며 자신들의 언어를 탐구하는 노력이다.”

이 같은 인생관은 2차대전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의 존재 의식과 일맥 상통한다. 프랭클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실존분석을 정신질환의 의미치료(로고테라피)로 확장시켰다.

당사자연구를 통해 자기자신의 고통을 발견하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강화되면서 우라카와 적십자병원의 정신병동은 입원환자가 줄면서 2014년 폐쇄됐다.

베델의집 출판 '레츠! 당사자연구'. 이 책을 통해 한일 정신장애 단체들의 교류가 시작된다. (c)베델의집 누리집 갈무리.
베델의집 출판 '레츠! 당사자연구'.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 등을 통해 한일 정신장애 단체들의 교류가 시작된다. 사진=베델의집 누리집 갈무리

베델의집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이익이 나지 않는 것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그래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통합실조증 당사자 등이 일을 할 때 엄격한 통제에 따른 작업이 아니라 쉬고 싶을 때 쉬고 일하지 않고 집으로 귀가해도 되는 체계를 지향한다.

◆…도쿄대에서 당사자연구 수용...베델집 책 번역으로 한일간 교류 시작

이 반(反)자본주의적 사유는 인간의 삶이 자본 축적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자유 속에서 존재를 확인한다는 인간 중심의 철학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질병을 통한 자기 존엄의 회복과 자유로움에 대한 적극적 조치. 그래서 베델 이념은 ‘안심하고 땡땡이치기’이다.

무카이야치 씨는 2000년대 들어 베델의집 출판사를 통해 당사자연구 이념을 소개하는 책들을 동료들과 함께 발간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 ‘렛츠! 당사자연구’, ‘베델의집 사람들’ 등이 출간되기 시작한다. 이 책들은 한국에도 번역돼 2006년 한국의 김대환 충주정신건강센터 관장이 우연히 읽게 된다.

이 관장은 책을 읽은 후 2007년 한국의 사회복지사로서는 처음으로 베델의집을 방문했다. 무카이야치 씨와의 운명적 만남이 시작됐다. 이 관장은 2015년 당사자연구를 한국에 접목하기 시작한다. 이후 베델의집과 한국 사회복지단체와 기관 등은 2022년 7월 현재까지 모두 52회의 연수와 방문을 나눴다.

1978년 우라카와에 와서 언제 떠날까를 고민하던 무카이야치 씨는 지금 우라카와에서 당사자들과 44년째 생활하고 있다. 현재 홋카이도의료복지대학교 임상복지학과 교수로도 재직하고 있다.

그는 우라카와역에 처음 내렸을 때를 회상했다. 그때 자신이 느꼈던 동네의 적막함과 황폐함은 충격이었다. 환경을 그대로 두고 당사자의 자립과 의료적인 사회복귀만을 요구한다면 그건 또 다른 형식의 폭력일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마침내 사회복귀를 이렇게 정의내렸다.

“사회복귀란 한탄하고 있던 사람들이 웃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고생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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