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함의 연대로 한일 관계를 재설계하다] “당사자연구는 인간의 삶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해”
[약함의 연대로 한일 관계를 재설계하다] “당사자연구는 인간의 삶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해”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2.08.26 19: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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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②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당사자연구
2006년 베델의집 출간 책 읽고 일본 당사자연구에 관심
일본과 한국에 서로 초청하며 52차례 교류...신뢰 기반한 발전
당사자는 자기 병의 경험전문가...그가 편히 말할 수 있게 해야
질환은 증상으로만 이해 말고 개성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정신의료체계는 당사자를 과보호, 과잉 규제해 삶의 의미 잃게 만들어
자기 결정 영역까지 침범하면 당사자는 자신의 삶과 괴리 발생해
말을 통한 회복은 정신장애 당사자운동의 중요한 정치적 목표

한일 관계는 늘 복잡하다. 가해자와 피해자로서의 역사적 문제, 인류의 공동 과제들을 함께 공유해야 하는 형제적 가치,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 등이 그렇다. 그런데 이 모두를 정치적으로만 풀어낼 수는 없다. 다만 시민사회의 요청들이 정치가 풀지 못하는 지점을 보완할 수 있지 않을까. <마인드포스트>는 일본 베델의집 당사자연구 이념의 출발과 한국 정신장애 시민조직과의 교류·협력의 과정을 주제로 4차례에 걸쳐 기획기사를 게재한다.

김대환 청주정신건강센터 관장. (c)마인드포스트.
김대환 청주정신건강센터 관장. (c)마인드포스트.

2006년 여름, 김대환 충주정신건강센터 관장(당시 사회복지사)은 충북과 자매결연 도시인 일본 야마나시 현의 정신보건 시스템을 견학 후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기내에서 무료하게 창밖 풍경을 보고 있었다. 그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하숙자 충북여성장애인연대 대표가 책 한 권을 건넸다. 일본 전직 기자 출신인 사이토 미치오 씨가 쓴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였다. 그때, 베델의집을 처음 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 관장을 비롯해 센터 직원들은 정신장애라는 병과 증상을 의료적 관점에서만 해석할 뿐 그 이상의 도움을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에게 줄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힌 상황이었다.

그는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이 증상과 병을 이야기하면 “병원에 가서 약물을 조정하고 입원해서 쉬었다가 오라”고 권할 수밖에 없었다. 지역사회와 당사자 중심의 치유 체계는 먼 나라 얘기였다. 그건 이론으로만 접해봤을 뿐 현장에 적용되는 사례는 거의 없었다. 김 관장은 대안적 정신건강 시스템을 갈망하고 있었다.

◆…베델의집 다룬 책 하나에 꽂힌 김대환 관장...베델 모델은 ‘희망이 보이는 사건’

청년 시절부터 사회복지사의 길을 걸어온 그에게 1995년 한국의 첫 정신장애 관련 법령인 정신보건법의 제정은 고무적이었다. 센터를 지역 거점으로 해서 입원했던 정신장애인들의 퇴원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입원환자 수는 오히려 늘어났다. 장애가 고착돼 회복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당사자들의 모습 역시 그에게 아픈 손가락이었다. 방황은 필연적으로 찾아왔다.

그런 그에게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는 그의 표현대로 “지난 시간의 고생과 암담한 현실에 탈출구 같은 희망을 보이는 사건”이었다.

그는 “기존에 당사자들은 삶을 이야기하는데 나를 포함한 사회복지사들은 병과 증상으로만 듣는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베델의집 모델은 한국의 약물 중심주의와 전문가주의 서비스에 대한 거대한 대항 담론이었다”고 말했다.

책을 읽은 후 김 관장은 베델의집 방문 계획을 세웠다. 2007년 5월, 김 관장은 사회복지사와 당사자 등 24명과 함께 처음으로 우라카와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무카이야치 이쿠요시 교수를 만났다. 운명이었다. 그리고 베델의집 마스코트로 불리는 당사자 하야사카 키요시 씨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키요시 씨는 그때 김 관장을 한국에서 온 ‘손님’으로 지칭했다.

무카이야치 교수는 김 관장에게 ‘당사자연구’를 설명했다. 처음 듣는 연구 방법이었다. 그는 김 관장에게 “사회복지사가 무력감에 빠질 때 당사자연구가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김 관장은 베델의집 방문 후 당사자연구의 실천적 방법을 고민하고 현실에 적용해 봤다. 2014년 첫 발걸음을 뗀 한국의 당사자연구는 당사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하려고 하지 않는 심리적 상황에 부닺혔다. 게다가 당사자의 날것으로 흘러나오는 고통의 발언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 같은 분위기 때문에 연구는 큰 진척을 이루지 못했다.

◆…처음 접한 당사자연구 한국에 접목...전문가주의에 대한 대항 담론 형성

김 관장은 문제의 원인을 생각했다. 그는 결론을 내린다. 전문가로서의 당사자와 당사자로서의 전문가가 만나 병과 증상으로만 당사자를 이해하는 게 아닌, 질환을 하나의 개성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 함께 걸어보겠다는 결심이었다.

2019년 11월 청주에서 열린 당사자연구 세미나 참여자들. 당사자연구는 청주를 기점으로 전국으로 확대돼 나갔다. (c)마인드포스트.
2019년 11월 청주에서 열린 당사자연구 세미나 참여자들. 당사자연구는 청주를 기점으로 전국으로 확대돼 나갔다. (c)마인드포스트.

침체기를 걷던 한국형 당사자연구는 이후 급물살을 탄다. 당사자연구를 주요 사업 프로그램으로 넣고 실천하고 있는 정신장애 관련 센터와 재단이 하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청주정신건강센터는 당사자연구를 받아들이면서 한 가지 문제에 봉착했다. 사회복지사를 향해 당사자들은 ‘선생님’이라고 호칭하지만 막상 사회복지사들은 당사자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합의가 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몇 년을 고민하던 김 관장은 2018년 베델의집 교류회 중 무카이야치 교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카이야치 교수는 “당사자들은 정신병과 증상의 경험 전문가”라고 조언했다. 경험전문가. 김 관장은 후일 핀란드 오픈다이얼로그에서도 치유 체계에 참여하는 당사자를 ‘경험전문가’로 불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김 관장은 “당사자연구는 말로 만나는 것을 중시한다”며 “회복은 이야기부터 시작되고 기존 정신의료체계에서의 당사자가 상실하고 강탈당한 말을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사자연구의 주요 이념인 고생의 되찾음에 대해서도 그는 “정신의료체계에서 당사자는 과보호, 과잉 규제를 받아서 사람으로서 당연히 겪는 고통을 빼앗기고 인간적 행위의 풍요로움과 가능성을 잃어버린다”며 “자기가 결정해야 하는 영역까지 침범하게 돼 당사자는 점차 자신의 삶과 괴리된다”고 지적했다.

한국과 일본의 국제 교류는 활발해졌다. 2007년을 시점으로 2022년까지 한국 정신보건 관련 개인과 단체들은 총 39회에 걸쳐 베델의집을 찾았다. 일본 베델의집 역시 총 13회에 걸쳐 한국을 방문했다.

이후 한국과 일본은 당사자연구가 정신장애에 고착되지 않고 발달장애인, 비행청소년, 노숙인을 위한 당사자연구로 확장돼 나가는 데 의견을 모은다.

2019년 청주정신건강센터 주관의 당사자연구에는 각 지역의 정신보건 관련 기관 10여 곳이 참여하는 연대적 체제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사실상 한국형 당사자연구가 뿌리내리기 시작한 단계로 분석된다.

◆…정신의료체계의 당사자 과보호가 인간적 행위의 풍요로움 빼앗아가

이 같은 현상은 한국 대학 교수들의 참여로 더 외연이 확장하게 된다. 마치 일본 도쿄대학교 철학과 이시하라 코지 교수가 도쿄대철학연구소 주관으로 당사자연구 국제세미나를 개최했던 것처럼 학계에서의 영향력이 번져나가는 모습이다.

김경희 꽃동네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당사자연구는 고생에 직면했을 때 정신과 의사를 비롯한 전문가, 지원가에게 의존하는 방식이 아니라 당사자가 주체가 돼 자기 말로 표현하고 스스로의 고생의 메커니즘을 파악해 주체적 회복을 돕는 과정이 당사자연구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정신장애인 '당사자연구' 참여 경험에 관한 연구를 진행해온 이진의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박사과정생은 “자기결정의 장벽 속에서 정신장애인 당사자운동은 병으로부터의 회복이라는 개념을 당사자 경험을 토대로 형성하고 대중화해 왔다”며 “여기에서 회복은 그 자체로 정신장애 당사자운동의 중요한 정치적 목표”라고 분석했다.

이어 “당사자연구는 인간의 삶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는 베델의 독특한 철학을 토대로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정신장애에 대한, 그리고 정신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한 새로운 시도”라고 평가했다.

2022년 7월 몽골 울란바투르에서 진행된 한몽일 동북아 컨퍼런스에서 김대환 관장(가운데)이 발표하고 있다. (c)마인드포스트.
2022년 7월 몽골 울란바투르에서 진행된 한몽일 동북아 컨퍼런스에서 김대환 관장(가운데)이 발표하고 있다. (c)마인드포스트.

광주에서 당사자연구를 진행해오고 있는 소화누리 유미의 팀장은 “약함을 연대한다고 하는데 고생을 표현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고생을 들어보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된다”며 “전문가에 맡겨진 고생을 되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창현 정신과 전문의는 “진료실에 갇힌 정신의학도 갇힌 것은 가부장적 치료모델에 익숙해져 있어 의사의 뜻에 모든 걸 맡기려 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 중심주의에서 주변의 ‘헛것’으로만 인식돼 온 정신장애인의 말을 통해 치유를 모색하는 연구는 소수이지만 정신과 의사들에게도 중요한 대안으로 인식되고 있다.

올해 7월, 몽골의 수도 울란바투르에서 한국, 일본, 몽골 관계자들 참여한 제1회 동북아 정신장애인의 인권증진과 당사자운동 확산을 위한 국제컨퍼런스가 진행됐다. 한국의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일본 홋카이도의료대학교 첨단의료연구센터, 몽골 국제울란바투르대학교가 주최한 최초의 동아시아 정신장애 담론의 장이었다.

◆…베델의집 ‘손님’에서 ‘친구’로, 그리고 ‘식구’로 변해간 17년 한일 약자들의 유대

그때 콘퍼런스 토론자로 나온 일본의 정신장애인 당사자 이토 노리유키 씨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어렸을 때 친구가 없었지만 지금은 전 세계에 동료가 있다. 언어의 장벽도 있지만 경험전문가로서의 가치는 같다. 질병과 장애 경험을 나누고 당사자연구의 세계대회와 환청·망상대회를 함께 할 수 있는 날을 꿈꾼다.”

치유는 연대한다는 것이다. 당사자연구 역시 연대에 철학적 기초를 두고 있다. 민주주의가 열린 대화에 의해 작동되듯이 독백이 아닌 동료들과의 확장된 자기 표현은 잃어버렸던 말과 고생을 회복하고 정신장애인을 주체의 자리로 옮겨놓는다. 따라서 약자의 연대, 약한 것에 대한 옹호는 동아시아 정신장애 담론을 풍요롭게 하고 기존의 회복 정의와 다른 방식의 리커버리의 가치를 확보하게 된다. 당사자연구를 중심에 둔 한일 정신장애 담론이 소중한 이유다.

처음 베델의집 철학을 접하고 17년 동안 52차례의 한일 교류가 있었다. 김 관장에게도, 한국사회 정신장애 치유 담론은 급속히 강화되고 확장됐다. 그만큼 그도 늙어갔다. 베델의집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는 그의 삶에도 역시 적용됐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는 것. 억지로 치유라는 명목으로 학대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그는 <마인드포스트>에 이렇게 말했다.

“17년 전 베델의집에서 만났던 당사자 키요시 씨는 처음에 나를 ‘손님’으로 불렀다. 하지만 교류 과정에서 ‘친구’로, 이제는 베델의집 ‘가족’이라고 부른다. 이 용어의 변화처럼 한일 관계 역시 인류애의 연대로 발전돼 나가야 한다.”

한국과 일본은 정치적으로 오랜 기간 대립적 관계를 맺어왔다. 일본군의 강제에 의한 위안부 문제, 강제노동을 강제했던 일본 전범 기업들의 배상과 사과, 특히 일본 정부가 과거 자신들이 벌였던 식민지 통치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배상은 한일 관계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여기에 한국과 일본의 당사자연구는 어떻게 정치적 화해에 접속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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