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훈 “상처 주는 사람들과는 손절하고 만나지 말아야죠. 자기 사랑을 위해서요”
최성훈 “상처 주는 사람들과는 손절하고 만나지 말아야죠. 자기 사랑을 위해서요”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3.03.02 2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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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가와 정치인을 꿈꾸는 조현병 당사자 최성훈 씨 인터뷰
스타트업 창업 준비...정부지원사업에 8차례 도전해 다 낙마했지만 계속 진행
성경 사도 바울처럼 살고 싶어 이타적 삶 지향했지만 오류 깨달아
자기 사랑과 타인 사랑의 동등성 필요...지나친 이타심은 자기를 해쳐
정신장애인 혼자서 개인사업은 동의하지 않아...직장생활 권하고 싶어
너무 겸손하니 사람들이 무시해...겸손하기보다는 당당해야겠다 생각
10년 전 중구청에 직원 한 명만 있던 정신건강센터 찾아가...살아야겠다 생각
치유에는 상담·약물·운동·재활·의미치료가 맞물려 진행돼야 효과 있어
평소 운동하고 자기 몸 상태 정확히 살펴야...취업하면 치유 상승효과
고교 때 왕따 경험 조현병 동료에 “용서하고 비겁하게 살지 말라” 조언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인생은 한 번이기에 사랑하고 살아야
조현병은 약물치료가 가장 중요해...종교적 방법만 도용하는 건 틀려
조현병으로 인한 시련과 고난은 저주 아닌 축복이라 생각해
가난한 자와 낮은 자를 위한 정치 하고 싶어...섬기는 정치인 될 것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어머니는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돌아가셨다. 어리광을 부리던 그는 조숙해졌다. 아버지는 연봉 6000만 원을 받는 조폐공사 직원이었는데 이 중 3000만 원을 작은아버지가 목회하는 교회에 헌금으로 바쳤다. 작은아버지는 그에게 이타적으로 살라고 매번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그 이타성은 어린 그에게 왜곡된 세계관을 심어줬다.

중학교 시절, 그는 왕따(집단따돌림)를 당했다. 머리를 감고 오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집안의 그 누구도 아침마다 머리를 감아야 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 시절, 새어머니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새어머니와 아버지는 사사건건 부딪혔다. 하루에 다섯 번씩 싸웠다. 새어머니는 그에게 자주 언어폭력을 일삼았다. 외로웠다.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그는 오직 공부에 몰입했다. 현실을 벗어나는 유일한 출구가 공부였다. 그러나 그 집착은 그에게 자살 충동과 같은 깊은 상흔을 남겼다. 서울대에서 법대를 빼고 전 학과를 갈 수 있는 성적이었는데 그는 고려대를 택했다. 공부를 잘 하면 왜 서울대만 고집해야 하는가라는 나름의 고집 때문이었다.

작은아버지는 이타적 삶을 늘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과외로 30만 원을 벌면 3만 원을 십일조로 내고 26만 원은 타인에게 베풀었다. 나머지 1만 원이 그의 생계비였다. 그건 타인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깨닫게 된다.

28살 무렵, 환청이 찾아왔다. 뒤돌아보면 어떻게 그렇게 소리소문없이 질환이 찾아왔는지 그는 의아했다. 그것이 환청·환시인지도 몰랐다. 다니던 교회의 여자친구가 밖에 나가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치라고 강요했다. 그리고 환시로 나타난 사촌동생들이 그를 한강 다리로 데려가서 뛰어내리라고 했다. 2차선 도로에 뛰어들라고도 했다. 일 년 동안 그는 무의미성에 끌려다녔다.

어느 날은 큰매형이 아버지를 혁대로 목을 매서 고문하는 환시가 나타났다. 큰매형을 찾아가 흉기를 휘둘렀지만 같이 있던 누나들에 의해 제압당했다. 큰매형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를 택시에 태워 집으로 보냈다. 뭔가 이상했다.

그때, 누나가 ‘환청과 환시’를 말했다. 포털에 환청환시를 검색했고 그게 정신분열증(조현병)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의사하던 친구에게 연락해서 대전 지역에서 괜찮은 정신과 의원을 물었다. 그는 그 의원에 15년 정도 외래를 다녔다. 정신응급 상황에서 그가 병원에 실려간 적은 있지만 오랜 시간의 입원은 하지 않았다.

다행이었을까. 그는 자기 질병의 구덩이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올라온 것이다. 그렇지만 하는 일이 없었고 아무런 것에도 흥미가 없었던 그는 가난했고 결국 기초생활수급권자로 살았다.

수급자 생활 4년차 때, 성경을 훑어보던 그에게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 할 일이 없느니라.” 귀신들린 아이를 예수 앞에 데려온 아이 아버지가 ‘할 수 있거든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소서’라고 청하자 나온 예수의 말이었다.

그는 자기 삶을 재구조화했다. 다시 일을 시작했고 몇 년이 시간이 흐른 후 기초수급권에서 탈피했다. 이제 삶은 온전히 자신이 추동하는 길로 가고 있고 그 길에서 사업을 구상하는 존재로 변했다.

기자가 최성훈(48) 씨를 만난 건, 일 년 전 어느 토론회 때였다. 그 전에 기자는 조현병 관련 카페인 ‘심지회’에 자주 글과 댓글을 올리는 그를 간접적으로나마 알고는 있었다. 첫 대면인 토론회 만남에서 그는 ‘승리기업’ 상호가 박힌 명함을 내밀었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기자는 그의 서사에서 어떤 부분은 망상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야 했다. 그래서 창업을 꿈꾸고 정치인을 욕망하는 그에게 조금 비판적 시선으로 접근하려 했다.

하지만 서사는 굉장히 밀접한 날줄과 씨줄로 엮여 있었으며 지극히 망상적인 것이라 생각했던 부분은 어느 순간 지극히 현실적일 수도 있다고 기자는 생각하게 됐다. 그건 어쩌면 ‘최성훈 식의 삶의 작동 체계’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기자는 그 삶을 존중하고 싶었다. 그를 만난 건 지난달 23일, 서울 마포구의 마포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다. 다음은 일문일답.

최성훈 씨. (c)마인드포스트.
최성훈 씨. (c)마인드포스트.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청렴하고 인자하셨어요. 국회의원 출마를 결심할 정도로 뛰어나셨는데 엄마 돌아가시면서 세상과 담을 쌓고 종교에 귀의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중학생 때부터 집안일, 친척일 대소사까지 챙겨야 하는 소년가장이 됐어요. 원망하는 마음도 들기는 합니다.”

-집안 대소사는 어떤 일들인가요.

“우리 가족과 작은아버지 가족이 다툰 적이 많았어요. 아빠는 교회 장로고 작은아버지는 목사였는데 작은아버지가 끊임없이 헌금을 요구했어요. 작은아버지는 능력이 없었거든요. 목회한 지 10년이 됐는데 성도가 열 명도 안 됐어요. 우리 가족이 봉사하고 헌금하고 해서 부흥이 일어났는데, 그런데도 욕심을 부려서 저희를 계속 핍박했어요. 아빠가 화가 나면 교회를 안 나가고 했는데 제가 매번 가서 중재해서 화해시키고 그랬어요.”

-30년 전에 새어머니가 와서 고생만 했다고 했어요. 그 어머니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처음에는 엄마가 아빠한테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 덤비니까 미웠어요. 그런데 대학생 때 객지 생활을 하면서 엄마가 저한테 많은 걸 해줬구나 느끼게 됐죠. 대학 졸업하고 25년간 엄마에게 잘해 드렸어요. 그런데 엄마가 저를 이용해먹더라고요. 아빠 재산 다 빼내고, 최근에는 할머니 집하고 밭이 4000만 원 정도 되는데 그걸 달라고 해서 드렸어요.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저한테 화를 내시더라고요. 언어폭력을 많이 했어요.”

-서울대 갈 성적이 됐는데 고려대를 지원한 이유는요.

“고등학교 때 제가 전교 2등이었는데 전교 1등은 서울대 법대를 썼어요. 선생님이 저한테 서울대 법대 빼고 모든 학과 다 써 주겠다고 했어요. 문득 왜 공부를 잘 하면 다 서울대를 가야 되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고려대 가서 서울대보다 더 좋은 대학을 만들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학비가 서울대가 싼데도요.

“학비는 아빠가 조폐공사 공기업에 다니니까 등록금 지원이 됐습니다. 한 한기는 휴학하고 한 학기 학사경고 받고 해서 5년 다녔습니다.”

-왜 휴학했습니까.

“고대 컴퓨터 동아리 회장을 했는데 한 선배가 동아리를 자기 방식대로 개혁하겠다며 저를 많이 괴롭혔어요. 제가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하니까 비난했죠. 그 선배와 대화를 나누는데 제 심장에 칼질을 하는 거 같았어요. 그냥 자살을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저를 괴롭혔어요. 휴학을 택했죠.”

-명함에 승리기업으로 돼 있습니다. 개인사업을 하는 건가요.

“2년 전부터 시작하려고 명함부터 파놨는데 갑자기 (장애인복지시설인) 무지개복지공장에 취업이 돼서 늦춰졌어요. ‘승리’가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힘든 단어라고 해서 ‘사랑의기업’으로 바꾸려고요.

IT 쪽으로 창업하려 합니다. 스타트업인데 5월에 사업자 등록을 내려고요. 작년에 정부 지원사업에 여덟 번 도전했는데 다 떨어졌어요. 떨어지면서 사업계획서를 업그레이드했고요. 올해 반드시 정부 지원사업 받아내 창업하려고 합니다.”

-IT 기업을 하면 구체적으로 전망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제가 만들려고 하는 건 정신장애인들의 직업 심리검사를 해서 그걸 바탕으로 교육강좌를 듣고 교육강좌를 다 들은 자에 한해서 취업을 연계시켜주는 모델입니다. 정신장애인을 위한 헤드헌팅 회사죠.”

-자본금은 어떻게 마련하시려고요.

“정부 지원금을 받으려 합니다. 제가 8년 정도 직장생활 했는데 번 돈이 2억5000만 원 정도 돼요. 그중 1억5000만 원을 아빠에게 드렸어요. 5000은 제가 썼고, 5000은 교회 사람들한테 썼죠. 지금 돈이 거의 없어서 정부지원금을 받아내야 돼요. 그게 안 되면 대출을 할 생각입니다. 소상공인진흥공단에 2000만 원 대출해 주는 게 있어요.”

-왜 그렇게 많은 돈을 사람들한테 베풀었던 걸까요.

“성경 말씀대로 살고 싶었어요. 너무 이타적으로 산 거죠. 작은아버지 잘못이 커요. 성경은 이타성과 이기성(利己性·자기 사랑)의 동등성을 추구합니다. 나한테 5를 베풀면 타인에게도 5를 베풀라는 얘기죠. 그런데 작은아버지가 이타적으로 살아야 된다고 이야기를 해서 남을 위해 살라는 잘못된 교육을 받은 거예요. 지나치게 이타적으로 살았던 거죠.”

-종교망상에 빠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종교망상은 아니었고요. 저는 사도 바울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그는 가난했지만 이타적으로 살았던 사람이거든요. 저는 사도 바울처럼 살고 싶었기 때문에 지난 삶에 대한 후회는 없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처럼 살고 싶어요. 자기 사랑과 타인 사랑의 동등성을 추구하면서요.”

-보통사람들이 선생님 말씀하신 걸 들으면 너무 종교윤리적 측면이 강해서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맞습니다. 지금 제자들을 키우고 있는데 하는 말이 형의 수준은 너무 높기 때문에 그 수준을 우리한테 강요하지 말라고 해요. 우리 수준에 맞는 얘기를 해달라고 말합니다. 저는 더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면서 남한테는 저의 높은 수준을 강요하지는 않고 그들의 수준에 맞는 걸 가르치려고 노력합니다.”

최성훈 씨. (c)마인드포스트.
최성훈 씨. (c)마인드포스트.

-종교를 갖지 않은 이들에게도 선생님의 말씀이 거부감이 있겠죠.

“그럴 수 있죠. 저는 모범을 보일 뿐 제 기준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신장애인이 사업을 하는 것은 그들의 망상 증상을 감안했을 때 위험성이 많지 않나요.

“조울증의 조증일 때 위험합니다. 내가 아는 동생도 조증일 때 막 대출을 해서 사업을 추진하다가 우울증에 빠지면서 모든 걸 포기해버렸거든요. 저는 그건 아닙니다. 저는 대학교 때부터 20년 넘게 사업을 준비해 왔어요.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고 이론과 실무를 겸비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병적 위험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신장애인 혼자 개인사업을 하는 것이 대해 동의하십니까.

“별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하잖아요.

“저는 예외적인 경우죠. 저는 정신장애인들이 사업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스트레스가 굉장히 많아요. 정신장애인들은 직장생활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사업은 아니라고 봐요.”

-사업은 혼자가 아닌 협동조합 형식으로 함께 하는 게 더 안정적이지 않을까요.

“그런 것도 좋겠죠. 제 사업이 사회적기업 모델이라고 하더라고요. 일단은 개인 사업자로 내겠지만 커지면 주식회사로 갈지, 유한회사로 갈지, 협동조합으로 갈지는 고민을 해야 할 부분입니다.”

-나는 괜찮지만 남들은 사업을 하면 안 된다고 한다면 오만하다고 비판받을 수 있겠습니다.

“저는 자신이 있고요. 오히려 저는 너무 겸손해서 손해를 많이 봤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어요. 저도 그게 좋아서 죄인 중에 괴수라고 얘기하니까 사람들이 많이 무시하더라고요. 이제는 그렇게 겸손할 필요가 없지 않나. 당당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새벽기도도 나갑니까.

“새벽기도는 안 나갑니다. 예수님도 새벽기도를 평생 한 번밖에 하지 않으셨어요.”

-10년 전 자살 충동에 시달릴 때 대전 중구 정신건강증진센터(현 정신건강복지센터) 존재를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 전에는 아무 정보도 없었습니까.

“2013년도니까 10년 전이죠. 38살쯤에 자살 충동을 느꼈어요. 제가 보면 10년 주기로 자살 충동이 찾아오더라고요. 그때 의사인 고등학교 친구에게 전화했는데 걔가 정부가 정신건강증진센터를 만들려고 한다면서 연락처를 알려주더라고요. 전화를 했죠. 그때는 센터가 없었고 담당 직원 한 명만 중구청에 책상을 놓고 있었어요. 제가 처음 멤버죠.

가서 인사하는데 조선미라는 팀장을 만났어요. 말괄량이 삐삐처럼 생겼어요. 자기를 ‘조선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라고 소개를 하더라고요. 그 얘기 들었을 때 제가 6개월 만에 미소를 짓게 됐어요. 고마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연을 맺고 열심히 했었죠.”

-10년 전이면 전국적으로 정신건강증진센터가 다 있지 않았나요. 중구에는 없었던 건가요.

“센터라는 이름은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직원은 한 명밖에 없었고 건물도 따로 있지 않고 중구청에 책상 하나 놓고 있었죠.”

-그 후 정신적으로 더 악화되는 건 없었습니까.

“점점 좋아졌습니다. 저는 다섯 가지 치료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상담치료, 약물치료, 운동치료, 재활치료, 의미치료요. 저는 이 다섯 가지를 다 했습니다. 상담도 매일매일 받았고요. 약도 정확히 먹었고 운동도 하루 한두 시간씩 꼭 했고 재활 직장도 계속 가졌고요. 의미치료, 종교치료도 계속했습니다.”

-의미치료, 종교치료는 피드백을 주는 상담사가 있었던 겁니까.

“저는 혼자서 공부했습니다. 성경을 읽거나 CCM(기독교 음악)을 듣거나 찬송을 들으면서 했어요. 다섯 가지를 계속하니까 약을 점점 줄일 수 있게 되더라고요.”

-약을 복용한 건 몇 살 때부터였습니까.

“29살 때부터요.

-선생님은 가족의 도움이 없이 이렇게 혼자 치유의 길을 모색했던 거 같습니다. 특이한 사례인데요.

”맞습니다. 28살 때 발병하고 1년간 헤매다가 29살에 정신과 의원을 찾아갔습니다. 그 정신과는 15년을 다녔어요. 의사 선생님이 교회 장로였거든요. 보통 의사들은 의미치료에 큰 비중을 안 두는데 그분은 의미치료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저랑 계속 얘기를 하면서 약물을 줄이는 것에도 호의적으로 반응해요. 처음에 아침에 다섯 알, 저녁에 다섯 알 먹었지만 지금은 저녁에 두 알만 먹습니다. 계속 15년 동안 같이 호흡하고 대화 나누면서 병이 호전되는 걸 지켜보셨죠.“

-심지회는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정신장애인 카페) 파란마음하얀마음을 통해서 알게 됐어요. 심지회의 푸른하늘은하수 님이 거기다 글을 올렸어요. 정신장애인들을 위한 정책을 수립할 테니 의견이 있으면 달라고 해서 링크를 타고 들어갔더니 심지회가 나오더라고요. 2019년에 가입했어요.

파란마음하얀마음은 인원이 많아서 소속감을 못 느꼈는데 심지회는 인원수가 적어서 소속감을 느꼈어요. 월례회 나와달라고 해서 나와서 만나고 강사 해달라고 해서 강사 하고 안내를 도와달라고 해서 안내도 하고 당사자 알바도 해주고요. 다른 데는 다 봉사를 해야 됐는데 거기는 돈을 주더라고요. 그게 좋아서 나갔어요.“

-안내라는 게?

“안내할 때, 서울시에서 나온 지원금이라고 하면서 3시간에 3만 원을 줬습니다. 강사로 서면 강사비 20만 원 줬고요. 동영상을 만들면 동영상 비를 주고 해서 보상이 확실하니까 자꾸 나가게 되더라고요. 제가 착하다 보니까 봉사를 어마어마하게 많이 했거든요. 그게 좀 회의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요. 너무 손해 보고 살지 않았나. 저는 베풀었다고 생각했는데.“

최성훈 씨. (c)마인드포스트.
최성훈 씨. (c)마인드포스트.

-정신장애인들과 가족이 소규모의 정신장애 관련 카페에서 활동하는 것이 치유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카페 오시는 분들 보면 조현병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어요. 기존 회원들이 경험을 통해 환자를 어떻게 설득해야 되고 어떤 약을 먹어야 되고 어떤 상태에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상담을 받아야 되는지 적절한 조언을 주는 게 긍정적 영향인 거 같아요. 정기적으로 올라오는 조현병에 대한 정보들도 그렇고요.

요즘은 심지회가 일자리도 소개해 주고 여행도 같이 갑니다. 당사자들 70% 이상이 폐인처럼 집에서만 지내거든요. 그런 사람들을 나오게 해서 여행을 같이 가고 일자리를 소개해줘서 일을 하게 하고요. 단기적 일자리도 많습니다. 그런 걸 하면 재활치료에 도움이 많이 되거든요.

심지회 같은 카페가 역할을 하는 게 되게 많습니다. 정부도 많은 걸 하지만 정부가 못하는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걸 카페들이 채워준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정부는 예산을 집행하고 제도를 만드는 일에 집중한다면 카페는 그 사람의 적절한 치유 정보를 제공한다고 생각해요.“

-심지회 사이트에 들어가면 선생님은 댓글을 굉장히 많이 달더군요. 배려심이 많은 분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선생님 성격은 어떤 유형입니까.

”댓글만 보셨나 본데요. 저는 거의 글을 하루에 하나씩 올렸습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아서 다 지웠어요. 저는 사랑이 많은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4가지 중요한 원리가 있는데 사랑, 섬김, 정직, 순종입니다. 그 4가지가 저를 설명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정신과 약물을 아침 5알, 저녁 5알 먹었는데 지금은 저녁 2알만 먹습니다. 약물을 줄이는 방법이 있었나요.

“운동이 제일 중요합니다. 상담치료도 중요하죠. 상담은 자기 몸을 정확히 살피는 게 중요하고요. 약을 먹었을 때 내 몸이 어떤가를 살피고 그 살핀 걸 정확히 의사에게 설명하면 의사가 저의 상태를 보고 약을 정확히 지어줍니다. 그 약을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해야 돼요. 그래서 상태가 좋아지면 약을 줄여갈 수 있어요.

약을 줄여가면 취업을 하는 거죠. 취업을 해서 적당한 스트레스가 있는 게 좋습니다. 취업을 하면 맛있는 걸 사 먹거나, 옷도 사 입을 수 있고 사람들을 만나 교제를 나눌 수 있기 때문에 기분 좋은 활동도 할 수 있죠. 그게 상승효과가 일어나죠. 마지막으로 종교치료가 있고요.

그렇게 좋아지면 어느 순간 의사 선생님한테 약 하나 빼도 되지 않겠습니까 말씀드리죠. 그럼 의사 선생님이 신중하게 한 알을 뺍니다. 한 달 두 달 지나고도 아무 이상 없으면 일 년 정도 지난 다음에 또 한 알을 빼고. 저는 2년에 한 알씩 빼 온 거 같아요. 항불안제도 먹고 항우울제도 먹고 그랬는데 그런 걸 다 빼고 이제는 리스펜정(리스페리돈) 2알만 먹습니다.“

-약을 줄이는 순간순간마다 주치의하고 대화하고 줄인 거네요.

”일부러 줄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의사 선생님과의 상의하에 줄여왔어요.“

-중·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을 왕따시킨 일진 애들과 나중에 친하게 지냈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했다고 했습니다. 가해자들의 무엇에 공감했습니까.

“싸움 잘하는 애들은 폭력 아버지를 둔 경우가 많아요. 걔들이 많이 맞았기 때문에 잘 때릴 수가 있는 거거든요. 불우하고 가난한 환경에서 폭력의 아버지까지 뒀으니까요. 그들에게 체휼(體恤)이라고 할까, 긍휼히 여기는 경험이 있어요. 그들의 아픔을 똑같이 느낄 수 있는 거죠. 참 불쌍하다고 생각했어요.”

-선생님은 공부를 잘 했죠. 공부를 잘 했다는 건 폭력을 막을 수 있는 칸막이 역할을 한 것은 아닐까요.

”그건 맞습니다.“

-정신장애인들은 중·고등학교 시절 집단따돌림과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고 이들은 시간이 지나도 이 고통을 잊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가해자의 아픔에 공감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렵다고 봅니다. 어떤 어머니가 저에게 연락을 주셨어요. 30대 아들인데 고등학교 때 왕따를 당해서 조현병이 발병했다고. 좀 만나달라고 해서 만났는데 그때 이분 상태가 심각하지는 않았어요. 조현병 증상이 있기는 한데 24시간 조현병이 있는 게 아니라 한 시간 정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폐인처럼 살았던 두 가지 원인이 있었어요. 첫 번째는 가해자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 두 번째는 약간 비겁했죠. 왜냐? 24시간 중에 한 시간 정도만 환청이 들리는데 그 한 시간 들리는 환청을 갖고 게으르게 살고 있었던 거예요.

제가 두 가지를 말했어요. 가해자를 용서해라. 용서하지 못하면 그 가해자에게 넌 계속 상처받는 거다. 가해자를 용서해야만 가해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용서를 통해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고. 그리고 비겁하게 살지 마라. 너 그렇게 아프지 않지 않냐. 부모님 생각해서라도 지금부터라도 자기계발하고 정정당당하게 열심히 살아라. 그 얘기를 했을 때 정신을 차리고 취업도 하고 집에서 나와서 공동생활가정에서 잘 생활하고 있습니다.”

-대학 시절 동아리, 동문회, 교회 청년회 활동에서 상처를 많이 입었다고요. 그때 공동체 활동을 더는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어떤 상처가 그렇게 컸습니까.

“컴퓨터 동아리 처음 들어갔을 때 동아리가 엉망이었어요. 저는 선배들을 비판했는데 그들이 저를 건방진 후배로 보고 탄압을 했어요. 고등학교 동문회에서는 한 선배가 저를 돌로 때리고 제 옷을 찢고 하면서 괴롭혔어요. 제가 동문회 일을 제일 열심히 했는데 동문회 일을 똑바로 하지 않는다고 얘기하면서 괴롭혔죠.

대전의 A 교회 다니엘청년회 회장 형도 저에게 엄청나게 일을 많이 시켰어요. 사역은 부흥과 상관없는데 그 형은 사역이 부흥과 연관이 있다면서 일을 많이 하라고 해요. 저는 말씀과 기도를 해야만 부흥이 일어난다고 했는데 제 얘기는 듣지 않고 계속 일을 잔뜩 벌였어요. 일은 제가 다 했는데 영광은 자기가 다 가져가고.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되게 많았죠. 그래서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지금은 그 상처가 치유된 건가요. 다시 이렇게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데.

“10년 정도 지나니까 상처가 회복이 되더라고요. 다시 교회 청년회 들어가서 리더로 섬겼고 그 다음에 심지회를 섬겼고요. 세월이 약이더라고요. 제가 또 용서를 잘하는 것도 있는 거 같습니다. 다 용서하고 잊어버려야죠. 기억이 오면 별로 안 좋거든요. 기도하면서 상처를 또 치유해주시더라고요. 그렇게 치유받으니까 또 하게 되고요.”

-상처받지 않겠다, 사랑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잘못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 사랑이 중요해요. 제가 상처를 받은 이유는 너무 이타적이었기 때문이에요. 저한테 상처 주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변화시켜야 된다고 하면서 그들 옆에 있었거든요. 그러면 안 되는 거죠.

상처 주는 사람과는 거리를 둬야죠. 물론 사랑은 해야죠. 하지만 나를 상처 주는 사람은 만나면 안 되는 거죠. 왜? 자기 사랑도 중요하니까. 자기 사랑과 타인 사랑의 동등성을 추구해야 되고 나한테 상처 주는 사람은 자기 사랑을 못 하게 하는 사람이니까 만나면 안 되는 거죠.”

-상처를 주는 사람들과는 미련 갖지 말고 손절해라?

“그렇죠. 손절하고 만나지 말아야죠. 저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랑을 위해서요.”

-두렵고 망설여지지만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가기로 결심했다고 했습니다. 지금 그 결과는 어떤가요.

“너무 기쁘고 행복합니다. 저는 98%의 기쁨과 2%의 우울함이 있다고 얘기하는데 너무 행복하고 기쁘고 즐겁습니다. 제가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누구를 만나도 반갑습니다. 그래서 손절했다고 하지만 그들에게 연락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연락을 안 하는 겁니다. 연락이 와도 제가 연락을 안 하면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거거든요.

세월이 지나고, 그 사람들도 사회생활 하다 보면 저한테 잘못했다는 걸 깨닫죠. 그 사람들한테 연락 올 때가 있고 제가 연락할 때도 있는데 그 사람들이 저한테 잘못했다라고 얘기합니다. 결국 저는 사랑하며 살기 때문에 항상 기쁘고 즐겁고 너무 행복합니다.”

최성훈 씨. (c)마인드포스트.
최성훈 씨. (c)마인드포스트.

-선생님에게 사랑은 어떤 의미입니까.

“오래 참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인내, 사랑, 헌신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래 참음과 온유함과 투기하지 않음이라고 했고요. 저는 인생은 한 번 사는 거고 한 번 살기에 항상 기쁘게 살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치유 과정에서 뼈아픈 오류나 실수가 있었나요.

“많았죠.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습니다. 저는 제가 가장 앞에서 걷고 있기에 저한테 길을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어요. 의사가 있고 약이 있다고는 하지만 의사도 환자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기 때문에 제 몸 상태는 제가 살필 수밖에 없어요. 조현병에 대한 책을 많이 읽고 거기서 정보를 얻으려 노력했어요.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바른 지식을 쌓아왔기 때문에 올바르게 할 수 있었죠. 저는 다른 사람이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경험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음성증상을 신앙으로 잡았다고 하는데 어떤 의미입니까.

“제 음성증상은 무(無)흥미, 무(無)욕구였어요. 아무것도 관심이 없고 아무것도 흥미가 없죠. 코미디 프로를 봐도 웃지 않고 영화를 봐도 재미가 없고 모든 걸 포기한 상태였어요. 그냥 수급비 나오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백수로 놀면서 지내자 생각했어요.

그때 성경을 읽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했어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 할 일이 없다.’ 그 말씀을 읽었을 때 예수님이 저를 꾸짖는다고 생각했어요. 너는 왜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걸 포기하느냐. 내가 할 수 있다고 얘기하는데,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된다, 내 말을 믿어라라고 말씀하시는 거 같았어요.

저는 다시 한 번 도전해봐야겠다라고 생각했고 그게 음성증상을 극복할 수 있었던 주요한 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신앙만으로 질환을 이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울증은 약물의 힘을 빌려야죠. 우울증은 양성증상이고 양성증상은 약으로 잡는 겁니다. 저는 음성증상을 신앙으로 잡았습니다.”

-교회는 정신질환을 귀신들림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죠.

“일정 부분 일리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적으로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조현병 환자를 귀신들림으로 봐서 신유기도로 치유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해봤을 때 안 됐거든요. 조현병은 약물치료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약물치료가 안 되는 경우가 있어요.

제가 돌보고 있는 정신장애인이 있는데 기윤(가명)이는 아빌리파이에 클로자핀까지 쓰는데도 안 돼요. 그랬을 때 저는 신앙에 기반을 둔 방법으로 얘를 호전되게 만들었거든요. 예전에는 공격성과 폭력성이 있었는데 사라지고 환청과 환시·망상을 자각 못 했는데 이제는 다 인지합니다.

저는 그게 종교적 방법으로 치유를 했다고 생각하거든요. 마귀들림은 일정 부분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전적으로 맞다거나 종교적 방법만 도용해야 한다고 믿는 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안수기도를 하면 낫는다고 믿는 신념은 어떤 잘못이 있습니까.

“안수기도는 의미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기윤이에 대해서 심리상담 방법을 썼어요. 심리상담에서 경청은 사랑은 오래 참고에 해당하고, 오래 참으며 들으면 그건 사랑이 가는 거고요. 조현병은 애정 결핍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기윤이가 약이 안 들을 때 사흘에 걸쳐 경청했어요. 그냥 말하는 걸 듣기만 한 거예요. 제가 심리학 지식이 있어서 처음에 한 20분 정도 심리상담을 했어요. 그게 오히려 상처를 주더라고요.

그래서 마음을 절반쯤 열고 1시간 반 정도 대화를 나눴는데 호전되는 것 같다가도 안 나아요. 저는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의지하자. 내 상담기법과 지식으로 얘를 치유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듣기만 하자. 그럼 하나님이 치유하실 거다. 성경에 모세가 홍해를 건널 때 지팡이를 듭니다. 그럼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시죠. 그것처럼 나는 지팡이만 들 뿐, 나는 듣기만 할 뿐 하나님이 치유하시는 거다. 그랬을 때 제가 10시간을 들을 수 있더라고요. 다음날 7시간, 다음날 7시간 해서 3일에 걸쳐 들었습니다. 그랬을 때 정말 호전이 일어나더라고요.”

-선생님은 조현병 걸린 게 감사하고 다시 태어나도 이 병에 걸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저는 조현병에 걸림으로써 장애인들을 체휼할 수 있게 됐습니다. 긍휼히 여기게 됐죠. 저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고아들에게 많은 체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오시기 전에 과부였거든요. 과부에 대해서도 체휼했는데 장애인은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장애인이 됐을 때 장애인을 체휼할 수 있었고요.

제가 정치를 하겠다고 결심한 건 조현병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조현병으로 인한 시련과 고난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고 생각하고요. 장애인들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신 건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최성훈 씨. (c)마인드포스트.
최성훈 씨. (c)마인드포스트.

-정치하겠다 사업하겠다고 선생이 말씀하셨는데 제가 봤을 때 망상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웃음) 그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더라고요. 저는 사업은 20년간 준비해 왔고요. 준비하는 자에게 기회가 오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정치도 준비해 가고 있습니다.”

-인맥도 있어야 되고 돈이 많이 필요하잖아요.

“인맥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저희 대전 중구 지역구의 A 의원실에서 구의원으로 공천받으실 분이 있는데 그분하고 같이 대화를 나누고 인맥을 만들어가고 있고요.”

-정치를 통해서 뭘 이루고 싶은 겁니까.

“이 땅의 가난한 자와 낮은 자들을 위한 정치를 하고 싶습니다. 저는 소상공인들, 고아, 과부, 장애인들, 수급자, 차상위 이런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하고 싶어요. 그들은 정치에서 외면받고 있어요. 이번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시위 사태를 보면 아시겠지만 정치인들이 장애인을 굉장히 무시합니다. 제가 정치인이 돼서 가난하고 낮은 자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정치를 하고 싶습니다.”

-또다시 고통이 찾아오면 어떻게 할 겁니까.

“기쁠 거 같아요. 저는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한때 왜 조현병에 걸렸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확신이 있었죠. 하나님은 나한테 좋은 것만 주셨거든요. 조현병 걸렸을 때 제 인생은 고통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저를 축복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시련은 위장된 축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제는 웬만한 고난은 고난으로 느껴지지도 않아요. 저는 지금도 고난과 시련이 있는데요. 작년 한 해 사업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여덟 번 떨어졌죠. 사실 그때 절망감을 맛봤는데 조현병만큼 힘든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과정을 통해서 오히려 사업계획서를 발전시키는 시간이었거든요. 고난과 시련이 찾아온다 해도 저는 감사히 여길 거라 생각해요.”

결혼을 해야 하지 않냐고 물었다. 그는 지금은 교수를 하고 있다는 대학 시절의 여자친구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고 했다. “매출 10억 원에 연봉 1억 원만 돼도 내가 너랑 결혼하겠다”라고. 어쩌면 그가 사업을 하는 이유도 그 요구 안에 담겨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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