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니의 리뷰] 거식증의 분기점에서 던지는 질문
[박지니의 리뷰] 거식증의 분기점에서 던지는 질문
  • 박지니 작가
  • 승인 2023.11.06 17: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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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채영, '이것도 제 삶입니다: 섭식장애와 함께한 15년', 오월의봄, 2023

자, 중요한 것은 두 가지다. 한 사람의 정체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세계의 어디까지가 그 시대에 사는 한 사람을 직조하고 다시 그 안에 스며드나? 국가적으로 혼분식 장려운동이 전개됐던 시절의 흑백 뉴스 클립을 본 적이 있다. 아나운서는 "보리나 밀가루 등 혼식이 권장되고 있는데도 나는 모르쇠로 나가는 국민들이 있으니 한심한 일입니다"라고 말한다. 지금 보기엔 어처구니없을 뿐인 어떤 가치가 집단적인 판단과 공격, 사회적 압력의 진앙지가 될 수 있다는 건 입증된 사실이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그려진 서기 2000년 세상의 상상화 시리즈에서 사람들이 화상 통화를 하고 대중교통수단이 하늘을 날고 학교의 아이들이 전기 장치를 통해 머릿속에 지식을 투여받는 와중에도 생경하게 유지되는 것은 남녀의 옷차림, 그리고 젠더화된 노동이다. 한 세기라는 시간이 흐르고 허황된 이야기 같았던 것을 기술이 실현시켜도, 여성은 그때도 똑같이 허리를 잘록히 조이거나 밑단에 바닥에 끌리는 불편한 드레스 속에서 자기 몸을 단속하고 있다. 또 농작기계를 조종해 수확하는 것은 남성이며, 청소 기계로 저택의 홀을 쓸고 닦는 것은 에이프런을 두른 하녀다.

위키 커먼스/장 마크 코테 제공
En l’an 2000: L’avenue de l’Opéra
Jean Marc Côté, 1910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위키 커먼스/장 마크 코테 제공
En l’an 2000: L’avenue de l’Opéra
Jean Marc Côté, 1910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어떤 변화는 급격하지만 다른 어떤 변화는 눈속임의 변주 수준에서만 일어난다.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영화 제목 ‘그라운드호그 데이(Groundhog Day)’의 본뜻처럼, 경칩 즈음 굴에서 기어나온 마르모트가 땅에 진 자기 그림자를 보고 화들짝 다시 굴 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겨울이 6주 더 이어진다고 하듯이. 영화 <사랑의 블랙홀>에서 빌 머리가 분한 주인공이 매번 변화를 꾀하지만 근본적으론 같은 하루를 반복해 살듯이. 어쩌면 우리는 영화 속 빌 머리처럼 과거의 굴레에서 탈출하고 해방되기를 꿈꾸면서도, 그 일을 ‘거듭’ 시도해야 하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21세기의 비너스

스스로의 오랜 섭식장애와 자기 안팎의 세계에 대해 기록한 박채영의 책 <이것도 제 삶입니다>(2023, 오월의봄)에는 그의 어머니가 교사로 있는 무주의 한 대안학교에서 어머니가 벽에 붙인, 당시의 문제작이었던 현경의 <미래에서 온 편지>(2002, 열림원)에 실린 ‘여신의 십계명’을 따라 읽으며 한껏 고양됐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묘사돼 있다. 내가 현경의 책이나 어떤 불문학자의 시집 같은 것을 사 읽었던, 여성이 어떤 식으로 신비롭고 모호하게 묘사되던 당시 세기 초에 나는 우울증과 향수병에 시달리던 대학생이었다. 하지만 그 무렵 채영은 중학생이었다. 우리는 10여 년 차를 두고 다른 세대로 살아왔다.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그보다 믿고 싶지 않게도, 그가 기술하는 그의 어린 시절은 마르모트가 굴 밖으로 고개를 내밀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경칩보다 훨씬 이전, 한겨울이 한창인 기점 같이 억압적이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여자가 살찌지 않으려면 저녁 8시 이후에는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충실히 따랐다. 긴 머리를 감을 땐 머리를 뒤로 젖혀서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로 감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뱃살의 양을 측정해 체중계 없이도 비만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수많은 여성 연예인의 다이어트 비법과 함께 내가 기억했던 것은 날씬한 사람들과 비교되는 뚱뚱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의 말과 시선으로 곧잘 우스운 꼴이 되곤 했다. 각종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는 살찐 사람의 우울함을 조명하며 날씬한 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세상엔 몸을 평가하는 기준과 그에 맞는 몸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정보가 넘쳤지만 그런 평가와 무관하게 행복하고 사랑받는 여성의 이야기는 아무도 들려주지 않았다.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선 옳은 몸을 준비해야 하는 것 같았다. 몸에 대한 평가를 들을수록 내 몸은 타인의 시선이 있을 때만 가치 있는 것이 되었다. 친구와 다리 길이를 비교당했던 순간부터 내 다리가 짧은 것처럼 느껴졌다. “살 빠지더니 더 예뻐졌다”라는 말은 빠진 몸무게를 유지해야 한다는 숙제를 남겼다. 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인성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곤 했다. “어린애가 절제력이 있구나.” “참을성이 많네.” 세상은 몸매가 자기 관리의 척도라고 했다. 자기 관리를 잘하는 사람에게 쏟아지는 인정과 사랑을 선망했다.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것들이었다. (pp. 168-169)

채영과 그의 어머니 박상옥이 출연한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김보람, 2022) 스틸컷
채영과 그의 어머니 박상옥이 출연한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김보람, 2022) 스틸컷

고작 열 살 때 거식증으로 강제입원했던 기억을 가진, 무서운 열정의 의료인류학자 리베카 레스터(Rebecca J. Lester)는 미국 섭식장애 치료 시스템을 그 내부에서부터 탐구한 책 <Famished: Eating Disorders and Failed Care in America>(2021,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를 출간한 직후 응한 한 인터뷰에서, “섭식장애 환자가 체중과 몸매에 연연한다고 단언하는 건, 마치 자신이 방의 불을 껐는지 확신할 수 없어 문밖을 나갔다가도 몇 번이고 다시 방에 돌아와 봐야만 하는 강박증 환자가 ‘절전(節電)’에 과도하게 목매고 있다고 얘기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한 사람의 정체는 무엇으로 만들어지나? 세계는 그 시대에 사는 한 사람을 어떻게 직조하고 다시 어디까지 그 안에 스며드나? 60~70년대 쌀밥 대신 밀가루 음식을 먹었던 사람은, 아무 조건 없는 무한한 선택지 속에서 스스로 ‘밀가루’를 택했나? 19세기 프랑스 일러스트레이터가 상상한 서기 2000년의 귀부인은 왜 하필 화장과 몸단장을 해 주는 자동기계를 마련해, 의자에 누워 100년 전과 다를 바 없는 문화와 관습을 지키나? 그 - 19세기 일러스트레이터 혹은 서기 2000년의 귀부인 - 의 상상력은, 혹은 욕망은, 왜 거기서 그쳤을까?

오래 전 고등학생 시절 우리를 가르쳤던 어느 괴짜 국어 선생은 자신을 ‘꿈 연구가’라 부르길 좋아하는 삼류 해몽서 저자였다. 그는 자기 원고를 몇몇 성적 좋은 아이들에게 분배해 더 교정 볼 곳이 있는지 확인하곤 했는데, 덕분에 내가 읽을 수 있었던, 그가 수집한 온갖 희한하고 천박한 꿈 사례 중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나란히 황소를 타고 길을 갔다거나 하는 것들이 부지기수였다. 자칭 꿈 연구가 국어 선생은 당연히도 꿈속의 인물은 실제 인물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성공, 번창, 유명세의 상징이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아무리 성공을 고대한다 해도, 나와 채영의 꿈에 박정희가 등장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한국판 웩슬러 지능검사 문항에서는 88올림픽 마스코트였던 ‘호돌이’가 벌써 오래 전에 빠졌다. 한국판 검사문항이 처음 도입된 1992년에는 ‘호돌이’를 지각하느냐 못하느냐로 한 사람의 인지를 판단할 수 있었지만, 이를테면 지금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호돌이’ 그림을 보고 그 이름을 못 맞힌다고 그의 지능 점수를 깎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자발적인’ 자기파괴의 ‘선택’

수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섭식장애는 주로 여성의 병이었다. 그러나 그 변주는 휘황하고 극적이었다. 중세 유럽에서 거식증은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녀 베로니카, 리에티의 성녀 콜룸바 같은 이들로 대표됐던, 전적으로 종교적인 ‘기적의 식욕부진(Anorexia mirabilis)’이었다. 1873년 영국의 의사 윌리엄 걸(Sir William Gull)이 ‘신경성 식욕부진증(Anorexia Nervosa)’이라는 병명을 고안할 즈음까지, 영국을 비롯한 유럽과 미국에서는 주로 십대 초반의 ‘금식하는 소녀들(Miraculous maids 혹은 Starving girls)’이 등장했다. 전혀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는 것이 지역 주민들의 경이를 이끌어내며 일종의 유명인사가 되지만 1869년 고작 열두 살의 나이에 기아로 사망하고 만 웨일즈의 소녀 사라 제이콥(Sarah Jacob)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넷플릭스 영화 <더 원더(The Wonder)>가 당시의 풍경을 담고 있다.

영화 '더 원더'(2022) 스틸컷
영화 '더 원더'(2022) 스틸컷

19세기에는 그밖에도 ‘건강염려증적 망상(Hypocondriacal delusion)’이나 히스테리의 일종(‘Anorexia hysterica’)으로 불리기도 했던 섭식장애는, 20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진단편람에 지금과 같은 병명으로 등재된다. 1980년대에는 신경성 폭식증(Bulimia Nervosa)이라는 이름이 추가되고, 2020년대도 이제 중반에 접어든 현재는 유기농, 비건, 인공첨가제 무첨가 식품 같은 ‘깨끗’하고 ‘건강한’ 음식에 집착해 실제로 먹을 수 있는 선택지가 현저하게 줄어드는 ‘건강음식집착증(Orthorexia)’이라는 새로운 증상군이 만연해진 상황이다.

수백 년에 걸쳐 여성의 존재 방식에는 어떤 굳건한 홈이 파여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일견 어떤 시점엔 그런 홈들이 다 흙으로 덮여 메워지고 다른 길이 여러 군데로 새로 나는 듯 보이지만, 여성의 몸과 가능성을 옥죄는 깊디깊은 홈 자체가 아예 매끄러이 지워진 적은 없는 것이다. 웨일즈 시골의 소녀 사라 제이콥은 아마 굉장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해, 주변에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존재 방식을 전개시킨 것은 아닐 것이다. ‘단식 소녀’가 되는 것은, 여차하면 접어들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선택지였을 것이다.

섭식장애 발병 연령이 급속히 낮아지고, 20년 전 20대 초반의 여자아이들로 득시글댔던 치료센터가 이제는 거의 소아정신과 같은 풍경으로 변한 것이, 오로지 지금의 어린아이들이 케이팝 아이돌 문화와 유튜브에 현혹돼 ‘왜곡된 미의 기준’을 갖게 된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미디어 문해력을 교육하고 ‘너의 몸은 그 자체로 아름다워’, ‘우리 스스로의 몸을 사랑하자’라고, 아이가 진심으로 설득되기를 바라며 설교하고 가르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열 살 남짓한 여자아이가 여차하면 자기 몸과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게 되고, ‘내겐 권한 없는 공간을 역겹게 차지하고 있는 내 존재가 부끄럽다’고 느끼게 되는 지금의 정치적 세계가, 여자아이들에게 가장 인접한, 의심의 여지 없이 일률적으로 다다를 선택지를 그렇게 배치하는 이 세계가 뿌리 깊게 잘못된 건 아닐까?

박채영, '이것도 제 삶입니다: 섭식장애와 함께한 15년', 오월의봄, 2023
박채영, '이것도 제 삶입니다: 섭식장애와 함께한 15년', 오월의봄, 2023

볼모로 잡힌 아이

두 번째 문제는 가족 안에서 아이가 처하는 위치다. 내가 내 책 <삼키기 연습>(2021, 글항아리)에서 ‘텔레파시’에 비유해 언급했던 식의 모호하고 숨통 막히는 소통 방식이 많은 가족 안을 석회 기둥처럼 메운다. 그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폭력의 형태를 띤다. 수년 전 어느 비영리단체의 출판편집팀에서 일했을 때, 편집장은 대표님의 선호에 따른 것이라며 띄어쓰기 법칙과 무관하게 가능한 모든 단어를 붙여 쓰고, 붙여 쓰는 게 오히려 가독성이 떨어진다고 ‘느껴지는’ 것만 띄어 쓰기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나는 그 기준을 어떻게 판단하냐고 이의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질 않았다. 무엇이 맞게 띄어 쓴 건지 붙여 쓴 건지 최종 판단할 수 있는 건 편집장 혹은 대표일 뿐이게 되어 나는 매 결정에 확신을 가질 수 없었고 덕분에 교정 작업에 갑절의 시간이 걸렸다.

채영은 <이것도 제 삶입니다>에서 음식, 그리고 식사에 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회피 없이 찬찬히 되살리며 섬세히 기록했다.

나에게 먹는 행위는 사랑을 확인하는 방법이었다. 내가 잘 먹으면 나의 주양육자(둘째 이모나 엄마)에게서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안 먹는 행위는 엄마와 이모의 불안을 자극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 내가 먼저 먹지 않는 것을 택한 적은 없다. 한편, 엄마와 이모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벌어지거나 힘든 일로 마음이 아플 때 음식을 먹지 않는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했다. 자식들에게 밥을 차려주면서 굳이 “엄마는 안 먹어”라는 말을 붙이거나, 밥을 먹다가 수저를 놓고 담배를 피우러 베란다에 나갔다. 그러나 자식들에게는 단 한 번도 먹지 않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엄마 혹은 이모가 떠난 식탁에 억지로 앉은 나 또는 사촌들은 돌을 씹는 심정으로 밥공기를 비웠다. 밥을 남기면 어른의 화를 돋울 게 확실하기에, 먹고 싶지 않아도 열심히 먹었다.

나와 달리 같이 살던 사촌 동생은 먹는 데 취미가 없었다. 잘 먹지 않아 밥때가 되면 이모가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김에 싼 밥을 하나씩 겨우 먹였다. 사촌 언니는 식탁 위에서 이모의 눈칫밥을 자주 먹었다. 여드름이 나서, 살찐 것 같아서, 숙제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밥을 먹으며 잔소리를 들었다. 동생과 언니 모두 자신이 싫은 것은 쉽게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밥을 먹다가 자주 이모에게 혼났다. 이모는 꼭 혼내기 전에 셋을 셌다. “하나, 둘, 셋”을 세는 소리에 맞춰 내 가슴도 쪼그라들었다. ‘제발, 제발 그냥 한 입만 먹어라’ 속으로 빌었다. 나의 소원이 이뤄지는 날은 별로 없었다. 이모의 언성이 높아지고 동생이나 언니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밥상머리 교육이 끝나는 날도 있었지만, 가끔은 이모가 동생이나 언니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매질을 했다.

내가 이모 집에서 살고 있을 때는 동생의 나이가 겨우 두세 살이었기에 방에 끌려 들어가는 건 주로 언니였다. 이모가 식탁 의자를 뒤로 밀고 언니의 옷을 찢듯이 잡아끌면 언니는 겁에 질린 얼굴로 끌려갔다. 난 동생에게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별일 아니야. 금방 괜찮아질 거야. 그냥 우린 계속 이렇게 있으면 돼.’

언니나 동생이 혼나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모를 말리기에는 너무 어렸고 동생이나 언니의 편을 들기에는 이모가 너무 무서웠다. 방문 밖에서 나는 꾸역꾸역 밥을 삼켰다. 밥과 함께 두려움을 삼켰다. 죄책감이 반찬을 집은 젓가락에 딸려 올라왔다. 언니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 이모의 고성을 듣고만 있다는 죄책감, 사촌 동생에게 뭔가 해줄 수 없다는 미안함을 밥으로 꾹 눌러 삼켰다. 그 와중에 이모의 화를 돋우고 싶지 않아 동생이나 언니가 싫어했던 반찬을 열심히 먹었다. 나는 언니와 동생이 이모에게 혼나도록 방치하는 것이 미안한 동시에 이모가 화를 내는 대상이 내가 될까 봐 늘 두려웠다. 나까지 화의 대상이 되면 이 집의 평안은 누가 지킨단 말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정쩡한 몸으로 일상이 다시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pp. 72-74)

내가 궁금한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우울하고 불만에 찬 어머니들은 왜 아이를 먹이는 일에 집착하는가? 왜 아이는 자신의 신체감각에 따라 먹고 먹지 않을 권한을 인정받을 수 없나? 둘째, 우울한 어머니의 어떤 거대한 감정이 지금 자신에게 짓밟히고 있는 아이의 비참을 조금도 알아채지 못하게 가리는 것일까?

인류학자 페니 반 에스테릭의 인터뷰 갈무리
인류학자 페니 반 에스테릭의 인터뷰 갈무리

지난 2월 있었던 국내 첫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위해 국내외 여러 분들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왔고, 역시 내 요청에 기꺼이 응해 준 페니 반 에스테릭(Penny van Esterik) 교수는 거식증에 관한 인류학적 보고인 <Negotiating Anorexia: From virtue to vice>의 공저자이자 모유수유에 대해 오랜 시간 연구하고 글을 써 온 인류학자다. 그는 우리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나로선 그때까지 생각지 못했던, 신선한 사실을 일깨웠다.

아주 어렸을 때 식사 시간이 어땠는지 기억하나요? 엄마 젖을 먹는 갓난아기들은 얼마만큼 먹고 먹지 않을지를 스스로 통제하고 일찌감치 식욕을 조절하는 법을 터득하곤 합니다. 애초에 아기에게 강제로 젖을 물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까요! 하지만 그보다 큰 아이에게는 강제로 먹이는 게 가능해져 버립니다. 어른들과 다 같이 밥을 먹는 자리에서 먹기 싫은데도 먹어야 했던 일을 기억하나요? 명절 때 잔뜩 차려진 음식을 Do먹는 것이 여러분께는 기쁨이었을 수도 당혹스러운 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엄마젖을 먹는 갓난아기에게는 먹지 않으려는데 억지로 먹인다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하다. 아기는 울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돌려 버리고, 무엇보다 ‘삼키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어른도 갓난아기가 억지로 삼키도록 강제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양상은 아이가 이유식 시기에 돌입하면서 극적으로 바뀐다. 이제 먹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아이 외부의 판단과 규율에 속하는 것이 된다.

나의 어머니 역시 불행했고 불건강했으며 우울했고 자신이 처한 형편에 대한 분노와 원망에 휩싸여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한 번의 유산 뒤에 태어난 딸은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미숙아였다. 빈곤한 집안살림과 육아는 티끌 하나의 예외 없이 온전한 그의 책임이었다. 어머니는 그 와중에도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 내려 애썼다. 시골학교 관사 단칸방과 가난한 세간을 먼지 하나 없게 닦았고, 남편의 교사 봉급을 쪼개 시부모 - 6.25 전쟁 때 수상하기 그지없는 ‘경찰 일’을 했다는 알코올중독자 시부, 그리고 잘 살았던 집안이 식민지 시절 다 망해버리고 가난한 집 며느리로 들어가 딸 넷에 외아들을 낳고, 자의식이라고는 없는 근세식 자동반사로 이제는 며느리를 온 힘껏 타박하는 시모 - 의 생계를 챙겼고, 아이들 옷은 서울에서 사 와 입혔고 - 돈도 없는데 뭐 하러 그렇게 하냐고 주변에선 혀를 차기도 했다 - 아이들 머리를 빗겨 묶을 때도 잔머리 한 올 흘러내리지 않게 당겨 묶었다.

아주 어려서부터 밥을 잘 먹지도, 잠을 잘 자지도 못했던 나는, 밥상머리에서 만날 혼나기 일쑤였다. 그나마 먹는 반찬은 소시지 아니면 계란프라이였는데, 어느 날 소시지에서 섬찟한 화학적 맛이 느껴져 구역이 치미고 나서는 ‘이제 다시는 소시지는 안 먹겠다’고 마음먹었다가 다른날 이번에는 계란프라이에서 이상한 결정 같은 것이 빠드득 씹히면, 결심을 변경하고 앞으론 소시지만 먹자고 생각하는 식이었다. 심지어 나는 어쩌면 어머니가 반찬에 뭔가를 넣은 걸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했다.

이런 식의 이중구속(Double Bind)적 상황도 빈번했다. 어머니는 내가 맨밥만 퍼먹고 있는 것에 화를 낸다. 그러다 반찬 중에서 하필 구역질 나는 굴이나 가지볶음 같은 걸 내 밥 위에 얹어 버린다. 그럼 나는 아예 두 손이 묶이는 것이 된다. 맨밥이라도 먹는 시늉을 해야 하는데 밥 위에 저 징그러운 것이 올라가 있으니 숟가락을 들 수가 없다. 아까까지는 맨밥이라도 꾸역꾸역 먹었지만, 이제는, 어머니가 반찬을 올려놓은 탓에, 밥상 앞에 몸 굳은 채 앉아 있을 수밖에 없고,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감정의 도화선을 끄트머리까지 한 순간에 점화시켜 버리게 된다.

어머니에게 식탁에서 자녀의 전적인 순응은 왜 그렇게 중요한가? 왜 어머니는 자신이 최대한 분노할 상황을 자처해 설계하는가?

가족이 한시에 둘러앉아야 하는 식사 자리는 왜 그렇게 억압적이고 숨막히나? 우리 가족은 이제 모처럼의 외식이 아니면, 굳이 같은 시간에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같이 먹지 않는다. 아버지는 아직도 식사를 어머니에 의존하기 때문에 어머니가 차리는 식탁에서 함께 밥을 먹지만, 나나 동생은 스스로 먹고 싶은 시간에 먹고 싶은 것을 쟁반에 담아 그대로 자기 방으로 갖고 들어간다. 그러나 어린 시절, 가족 식사에 늦거나 불참하는 건 아버지에 대한 반역죄나 다름없었다. 채영이 책에 묘사한 것처럼, 나 역시 어린 동생이 아버지에게 따귀를 맞고 정신없이 우는 와중에도 식탁을 떠날 수 없었고, 꾸역꾸역 밥을 모욕감과 함께 넘겨야 했다.

거식증 환자들 중에는 요리에 집착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대개 많은 양의 음식을 지치지도 않고 만들어내면서 그 모든 생산물들을 타자에게 (강제로) 대접한다. 나는 그 유혹을 경험한 적 있다. 스물 몇 살 때 나는 동생과 자취하던 신림동 반지하방의 비좁은 부엌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자요리를 만들어 배고프지 않다는 동생에게 억지로 들이밀었다. 고향의 부모님댁에 내려가 있으면서는 막내동생이 레토르트 미트볼의 국물을 고스란히 남기는 것에 안달이 나다 못해 분노의 고통이 위장을 죄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끔찍이 두렵고 혐오스러워, 나는 음식의 제공자가 되는 일을 일절 그만두었다. 피압제자의 위치에서 누구도 눈치챌 수 없이 어느새 압제자가 되어 버리는 함정에서 나를 절연시켰다.

나는 사십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도 음식점과 가게의 익명의 완제품이 아니고서는, 누군가 일부러 ‘나를 위해’ 만든 요리는 먹지 않는다. 아주 드물게, 예기치 않게 치러진 상대방의 성의를 생각해 그의 음식을 기계적으로 입에 넣게 되더라도, 그때 내가 먹는 건 음식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맛있음으로 인해 즐거워질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아닌, 종이를 씹는 것이나 다를 게 전혀 없이 느낀다.

 

▲ 1995년 뮤지션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1995년 뮤지션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는 '1. Outside'라는 앨범을 발표했고, 후속작 타이틀로 거론됐던 '2. Contamination'은 결국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1995년 뮤지션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는 '1. Outside'라는 앨범을 발표했고, 후속작 타이틀로 거론됐던 '2. Contamination'은 결국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오염과 면역

그러나 내가 결론을 내렸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지금까지 코로나19에 한 번도 걸리지 않은, 자가검사키트도 직장에서의 권고로 단 한 번 사용해 본 게 전부인 자칭 ‘슈퍼면역자’이고, 심장이 불편하거나 담석이 발견되거나 과호흡 발작이 일어날지언정 감기 같은 전염성 질환에는 희한할 만큼 강한 이력을 갖고 있다. 거식증과 자가면역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양실조는 통상 면역력 약화로 이어지는데, 거식증으로 인한 영양실조가 면역력을 떨어뜨리지는 않는 것 같다는 글을 발견한 적도 있다.)

하여,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은 외부의 존재, 내가 아닌 것, 오염의 가능성, 그리고 무엇보다 기꺼이 오염되려는 투항의 용기일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이 거식증 환자의 여정에서 가장 힘든, 최고의 난코스가 될 것이다.

채영은 이렇게 말했으므로,

중요한 건, 내가 나의 상처를 ‘안다’는 것이다. 나는 내 아픔을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타인에게 내 고통과 치료의 노력을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 내 상처와 아픔의 주인공은 ‘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나밖에 없어”라는 말은 무기력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가능성의 말이기도 하다. (p. 96)

우리는 여기까지 도달했고, 계속 다른 곳으로 걷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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