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인식주간 특집] “왜 그랬어요?”라는 물음에 대한 수백 가지 시나리오
[섭식장애인식주간 특집] “왜 그랬어요?”라는 물음에 대한 수백 가지 시나리오
  • 박지니 (책 '삼키기 연습' 저자)
  • 승인 2022.12.11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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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을 보고
김보람, 두 사람을 위한 식탁 (2022)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SEOUL INDEPENDENT FILM FESTIVAL
김보람, 두 사람을 위한 식탁 (2022)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SEOUL INDEPENDENT FILM FESTIVAL

잊고 있던 모든 것이 되살아났다. 고통받는, 그래서 나를 원망할, 내게서 '답'을 듣고 싶어 하는 엄마 앞에서, 그 자리에서 까맣게 사라졌으면 좋겠지만 붙박인 듯 도망치지 못한 채, 억지로 입을 떼어 전혀 맘에 들지 않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역겹고 역시 '고통스러운', 진실에 가까워야 할, 그러나 전혀 진실에 가닿지 못한 '대답'을 해야 했어야 했던 순간.

엄마와 마주앉은 채영의 모를 표정들 - 감정을 감추는, 아직 사회적 형체를 못 띈 공포와 분노와 역겨운, 죽고 싶은 마음이 뒤엉킨 것을 당황스럽게 감춰야 하는 표정, 그리고 정말 용감하게도 자신이 수년 전 겨우 열 몇 살 때 정신과 입원병동에 들어갔어야 했던 때 했던 생각을 되짚어, 놀랍게 정연히 말로 표현하는 채영과 그 대화를 진지하게, 거리를 유지한 채 받아들이는 어머니 상옥의 감탄스런 모습을 증인처럼 - 혹은 거기 있었다면 그 상황을 남 일처럼 그저 외면하려 했을 보통의 아버지처럼 - 나는 목격한다.

나 역시 절반은 채영처럼 절반은 상옥처럼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거나 떠나지 않고. 내가 채영의 자리에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불편한 시간을 견딘다.

내년 2월 마지막 주를 예정으로 소위 ‘섭식장애 인식주간(Eating Disorders Awareness Week)’이라는 국내엔 없었던 행사를 기획하면서, 나는 기꺼이 섭외에 응해 준 창작자 분들께 끊임없이 말을 붙일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한 단톡방에서, 누군가 “너의 몸이 말하게 하라(Let Your Body Speak)”라는 화두를 툭 던졌다. 나는 ‘그게 바로 섭식장애잖아요!’하고 속으로 발끈했다. 쓰기는 “그런데 섭식장애 환자들 입장에선, 지금 바로 몸으로 얘기하고 있는 터라…”라고 얼버무렸다. “몸 말고 언어, 언어를 쓰라고!” “말로 해, 제발, 말로!” 라고 농담조의 말을 내던졌다.

그런 뒤 혼자 나가 점심을 먹고 근처를 조금 걷고 돌아와서는 바로 앞의 말을 정정했다. “그 말이 얼마나 무익한 것인지, 가정에서 부모님이 거식증 딸에게 ‘그러지 말고 말로 해!’라고 할 때 그 말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들릴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왜 섭식장애 환자/여성에겐 언어가 없을까요?”

추궁하는 위치, 추궁당하는 위치

영화에서 가장 우연적이면서 극적인 장면에서, 상옥은 어린 딸이 그때 무서운 병에 휘말린 이유에 대해 자신은 지난 15년 동안 머릿속에서 수백 가지의 각본을 썼었다고 이야기하고, 그런데 어쩌면 그 중 어떤 추측도 들어맞지 않았던 것 같다고 자인한다.

"왜 그랬어요?"라는 문제. 내게는 거의 환청 같은 청각 기억으로 남아 있는 목소리. 사실상 그것은 스무 살의 내가 왜 스스로를 죽이려 했는지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기회가 제한된 중환자실 면회 시간에 찾아온 엄마에게서 왜 고개를 돌렸던 건지 나중에 당직 간호사가 물었던 질문이었지만.

애걸하는 엄마로부터 훽 고개를 돌려 눈물을 감추고, 자살을 기도하고, 단식하고 혹은 먹은 것을 게워내는 것 같은 '자발적인' 행위는 흔히 '어째서'를 묻는 추궁을 이끈다. 왜 그랬냐는 질문은 대개 비난이자 책망이고, 그게 아니면 과학을 위한 - 혹은, 선정적 호기심에서 나온 - 질의다. 드문 경우, 물론 법적 심문일 수도 있겠지만.

왜 그랬냐는 간호사의 물음에 나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그 소심하고 무력한 대처는 오히려 나를 무슨 꿍꿍이인지 오리무중인, 누구도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원치 않는 이상한 아이 - 자살 위험이 있기 때문에 24시간 모니터링되는 중환자실에서 어쩔 수 없이 맡아 주어야 하는 정신과 환자 - 로 굳혀 버렸다. 그곳 중환자실은 죽음 앞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전투장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 번도 목소리를 들어 본 적 없는 어느 노년의 환자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뇨리타, 물 좀 갖다줘요.”하고 자신들을 불렀잖냐고 간호사들은 이야기했고, 옆 침상의 아주머니는 식사가 나올 때마다 힘들게 몸을 일으켜 간호사의 도움을 받으며 밥을 먹었다 - “그래도 끝까지 먹을래요.”라는 울먹이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것을, 나는 하얀 린넨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 채 듣고 있었다.

그때 나는 식사 때마다 나오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흰죽 위에 뜨는 미음 같은 물을 두 숟가락쯤 먹고, 나중에 배가 고프면 마시려고 팩 우유만 따로 머리맡 선반에 올려놓고, 나머지는 그대로 반납해 버렸다. 우유가 상할까봐 그랬는 듯, 선반에 보관해 둔 우유가 온데간데 없어진 때가 많았었지만.

김보람, 두 사람을 위한 식탁 (2022)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SEOUL INDEPENDENT FILM FESTIVAL
김보람, 두 사람을 위한 식탁 (2022)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SEOUL INDEPENDENT FILM FESTIVAL

그건 무엇보다 가능한 한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침대에 누운 채로 간이 변기를 써야 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스스로를 통제하는 것밖에 없을 때, 사람들은 자신을 통제한다. 자아를 상실할 것 같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외부에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것을 방사성 폐기물처럼 떨쳐버리고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심연 안에 자기를 한정짓는 것일 뿐일 때, 그 아이는 자기 몸에 생명을 공급하는 일을 포기한다.

권력과 알력의 언어

1950년대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이 말한 ‘이중구속(double-bind)’ 상황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안 된다는 전제에서 혼돈에 빠지는 상황을 윤곽 지었다. 이중구속적 상황은 "이제 담배 끊었지?"라고 묻는 것처럼 어떤 경우에도 청자가 끽연자였단 것을 인정하게 만드는 언어적 차원에서만도 가능하지만, 언어적 메시지와 비언어적 메시지가 서로 충돌하며 전송될 때도 만들어진다. "널 아끼니까 그러는 거야." 같은 말처럼. 여성에게 육아와 돌봄을 떠맡기며 상황에 따라 다른 식으로 풀어내는 모성 담론이 그렇듯이. 그것이 '쉬워서', 때에 따라선 '어려워서' 여성이 적역이라는 식으로.

혹은, 긴밀한 관계 속에 가둬진 사람들, 내가 그에게서 촉수를 당겨 떼면 그가 아파할까봐 피가 마르는, 서로 얽히고 설킨 취약한 사람들이 그 중 누군가 투사하는 욕망을 덥썩 받아 버리지 않으려고, 혹은 자신의 독립성을 지키려고 '텔레파시'를 쓰듯 보통의 말에 강력한 서브텍스트를 실어 주고받는 경우도 있다. 나는 내 책 <삼키기 연습>에서 언젠가 의사에게 보냈던 메일의 일부를 인용했다.

제가 10여 년 전 병원에 다닐 때 엄마와 제 동생과 저 사이의 ‘텔레파시’에 대해 메일로 써드렸던 것 혹시 기억나실는지 모르겠어요. (아마 안 나시겠죠.) 제가 그 상황을, 아마도 상담 시간에도 말씀드리면서 “그게 진짜일까요, 아니면 제 상상일까요?”라고 질문드렸는데 그때 선생님이 “50 대 50”일 거라고 답해주신 기억이 나요.

그 답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건, 그게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엄마도, 아빠도 가족 밖에서는 존경받는 분들이시니까.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힘들 때는 의지하는. 그 ‘텔레파시’란 수신 기관이 열려 있는 사람한테만,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전해지는 것이니까요.

그때, 그 절체절명의 시기에 저희 모녀 ‘삼각’의 해결책은 한 사람은 (한눈에도 괜찮지 않아 보이는) 통원 환자가 되고 한 사람은 외국으로 떠나 ‘모국어’를 폐기하고 우리가 모르는 다른 언어를 배워 오는 것이었어요.[1]

그때 엄마와 나와 내 동생은 서로 뒤엉켜, 자칫 ‘엄마의 욕구’ - 그것이 진짜 엄마의 욕구일 뿐이었을지는 의심스럽지만 - 를 내사하는 역할을 떠맡게 될까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아니, 엄마는 그걸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동생과 나는 마치 목숨을 건 사람처럼 민감했다. 가령, 우리는 뭔가를 먹을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떠보는 말이나 배가 고프다는 직접적인 말은 당연히 물론, 음식이나 끼니 때와 관련된 모든 말을 먼저 꺼내는 것을 오기로 피했다.

허기, 그리고 상대방을 ‘보호’하려는 - ‘집어 삼키고 싶은’ - 의도를 표출하는 즉시, 그는 ‘어머니의 욕구’에 삼켜지고 그 욕구 자체가 되고 만다. 심지어는 당장 빗방울이 떨어질 것 같은 궂은 날에도 ‘비가 올 것 같다’거나 ‘우산 챙겼니?’ 같은 말을 절대 해서는 안 되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아직 이를 더 명징히 설명하는 법을 찾지 못했으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못할 것이고 이미 이를 잘 아는 사람은 더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것이다.

주인공 채영에게 어머니 상옥의 ‘아프지 마’라는 말이 자꾸 발끈하게 만드는 자극이 되고 마는 것, 호주행을 택한 채영이 자기 몸 만한 여행용 트렁크를 굳이 엄마의 도움 없이 혼자 나르려는 것 모두 같은 연유였을 것이다. 아프지 말라고, 제발 아프지 말라고 애걸하며, 딸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리는 상옥의 품에 안겨 그 역시 눈물을 훔치는 채영의 감정은 - 너무나 복합적인 고통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몸으로부터 너무도 아프게 자기 촉수를 잡아 뜯어야만 하는 아이의 고통.

또 다른 경우. 좋은 집안의 동급생들보다 공부를 잘하는 식료품점 딸이었던 아니 에르노가 그에 관해 쓰고 또 썼던 '그들의 언어'가 함정이 되기도 한다. 그녀가 그랬듯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기숙학교의 유복한 학생들이 주고받는 기호들 - 바흐 음반, 서재, <레알리테> 잡지 구독, 테니스, 체스, 연극, 욕실 등 - 때문에 매력적이면서도 위협적으로도 느껴지는 미지의 세계로 가기. 하지만 그곳은 응접실도 다이닝룸도 없으며 오직 카페와 식료품점 사이에 끼어 있는 아주 작은 주방만 있을 뿐, 변소가 마당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호들로 가득한 세계다. 7월 한 달 동안 자신이 이비치가 되어 푹 빠져 살게 한 사르트르의 소설 <이성의 시대>에서처럼 사람들이 시와 문학을, 삶과 자유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리라 상상하는 세계.[2]

그 언어의 장에 속하지 않는 사람. 겹겹의 맥락이 따라오는 은어와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그들이 어느 순간 동시에 침묵하거나 표정을 나누거나 웃음을 터뜨리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아이. 눈치 없는 사람. 따돌림당하는 아이. 그 아이는 자기 나름대로 신중히 생각해 자기 생각을 떠듬떠듬 말하지만, 그 언어의 장에선 그 애의 모든 말이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언어의 장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증상의 전시를 넘어

12월 8일 오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이 상영된 마지막 날, GV가 끝나자마자 무대로 내려가 내가 김보람 감독님께 전해드린 내 책 첫 장에 나는, 감독님의 '시선' 덕분에 새로운 숙고를 할 수 있었고 그래서 감사드린다는 말을 적었다.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은 섭식장애에 관한 그동안의 영상 화법을 따르지 않았고, 그럼으로써 그 모든 영상 제작자들이 '(섭식장애를 알리려면) 그렇게 찍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자기변호할 여지를 통째로 없애 버렸다.

호주의 작가이자 섭식장애 연구자이기도 한 준 알렉산더(June Alexander)의 블로그 <The Diary Healer>[3]에 곧 발행될 내 두 번째 기고문에서, 나는 2000년대 초반 한국 공중파 TV 심층취재 프로그램들이 섭식장애 환자들을 어떻게 묘사했는지에 관해 언급했다. "But that’s all. Several more documentaries and similar investigative programs followed, but that’s all. The struggling young girls were consumed like in a freak show. They were the 21st Century’s hysteria patients displayed for consumer-citizens like those women with symptoms demonstrated by Dr Charcot at the Salpêtrière.(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몇 편의 다큐멘터리와 심층취재물이 뒤를 이었지만, 그게 다였다. 섭식장애를 앓는 젊은 여성들은 기묘한 구경거리로 소비되었다. 그들은 소비자-시청자를 위해 전시된 21세기 판 히스테리 환자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 글에 대해, 준은 내가 보낸, 2000년 전후로 내가 병원에서 혹은 고향의 작은 도서관 열람실에서 그렸던 스케치들 중, 샤르코가 히스테리 환자를 부축하고 있는 그 유명한 그림의 모사를 채택했다.

김보람, 두 사람을 위한 식탁 (2022)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SEOUL INDEPENDENT FILM FESTIVAL
김보람, 두 사람을 위한 식탁 (2022)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SEOUL INDEPENDENT FILM FESTIVAL

최근 나는 미국 뉴멕시코대학의 중독 심리학자 카산드라 보네스(Cassie Boness)의 최근 발표된 논문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알코올사용장애(alcohol use disorder AUD) 진단 개념에 대해, 그는 이렇게 썼다.

이 논문은 알코올사용장애(AUD) 개념화와 그에 따른 진단 기준이 미국 내 사회정치적 요인들에 영향 받으며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에 주목한다… (중략) …저자들은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 즉 인간 행동에 대한 연구자의 무지를 유념하는 것, 그리고 다학제적 협력 연구의 필요성에 중점을 두고 알코올사용장애 진단 개선을 위한 로드맵을 제시한다. 단순히 증상이나 증후가 아니라 그 같은 행동을 야기하는 무수한 메커니즘에 초점을 둔 이 같은 노력이야말로 진단 기준 개발 과정에서 사회정치적 영향을 최소화하고 진단의 치료적 유용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4]

‘단순히 증상이나 증후가 아니라’ 주인공 채영과 어머니 상옥의 낱낱한 감정, 그들의 경험과 입장, 수많은 맥락과 고민들까지 놓치지 않고 담아낸 김보람 감독의 시선은, 그래서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을 지금까지의 그 어떤 영상 내러티브도 하지 못한 식으로 섭식장애의 진실에 가까이 밀어붙였다.

비록 채영이 첫 구토 에피소드에 대해 털어놓을 때 카메라 뒤에서 그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물으며 혹시 ‘쾌감’이 있었느냐고 질문했을 때는, 섭식장애에 대한 세상 전반의 몰이해를 정신이 번쩍 들도록 재인할 수밖에 없었지만, 감독은 그 어떤 것도 걷어 내지 않았고,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최대치로 천착했다. 기존의 영상 작업자들이 ‘viewer’로서 섭식장애를 바라봤다면, 김보람 감독은 ‘seer’가 되기를 추구했다고 나는 쓰고 싶다.

채영이 언어를 되찾아 내기를

‘섭식장애 환자/여성에게는 왜 언어가 없을까?’라는 질문에 도달했을 때, 내게 즉각 떠오른 건 미국 흑인 작가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이 영어에 대해 쓴 어떤 산문의 구절이었다.

내가 영어와 빚은 불화는 그 언어가 내 경험을 전혀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데 기인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문제를 사뭇 다른 식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언어가 내 것이 아니라면, 그건 그 언어의 잘못일 수 있지만 내 잘못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언어가 내 것이 아니었던 까닭은 내가 그것을 흉내내는 것만 배웠을 뿐 사용하려고 시도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만약 내가 그 언어에 도전하고, 내게 도전할, 그 실험에 직면할 힘을 낼 수 있다면, 그 언어는 내 경험의 무게를 지도록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 된다.[5]

채영아, 너는 세상의 언어를 가져도 좋아, 그 언어를 헤집고 파헤쳐 볼 수 있어. 나는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고 쓰는 것은 그에 뒤쳐진다. 네가 주도권을 잡을 수 있어, 당연히 그럴 수 있지. 그러면 그때는, 전에 널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들이 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유령인 줄 알았던 것이 그저 길가에 선 헐벗은 나무의 그림자일 뿐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거야.

그리고 나는 그렇게 만들 것이다. 나는 그러고 싶다. 길에 우거지고 장대비에 드러누운 이 나무 덩굴들을 할 수 있는 한 쳐 낼 것이다. 그래서 내 뒤에 오는 아이들이 너무 오래 길 잃지 않게, 길 잃어도 빨리 찾아질 수 있게 할 것이다. 그 아이들이 스스로에 대한 거짓을 믿고만 있지 않도록, 그 애들이 자기 멋대로 말할 수 있게.

타인의 결론이 우리의 탐구를 종결짓게 하지 않을 것이다. 채영아, 너의 편에서. 그리고 모든 여자 아이들의 편에서.

 

[1] 박지니, <삼키기 연습>, 글항아리, 2021. p.269

[2] 아니 에르노, <여자아이, 기억>, 레모, 2022. p.34

[3] https://thediaryhealer.com/

[4] Cassandra L. Boness, et al. (2022) Alcohol use disorder conceptualizations and diagnoses reflect their sociopolitical context, Addiction Research & Theory.

[5] James Baldwin, Why I Stopped Hating Shakespeare (1964), The Cross of Redemption: Uncollected Writings, Pantheon, 2010. https://www.folger.edu/sites/default/files/Why%20I%20Stopped%20Hating%20Shakespeare_JamesBaldwi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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