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승연의 책] 거식증은 자기파괴 아닌 주체가 자기 목소리 내는 저항적 행위
[송승연의 책] 거식증은 자기파괴 아닌 주체가 자기 목소리 내는 저항적 행위
  • 송승연 기자
  • 승인 2022.04.07 18: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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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키기 연습(스무 해를 잠식한 거식증의 기록)에 대한 인식과 해석
섭식장애 진단명 부정적 라벨링 효과 내포...이는 편견이자 고정관념에 불과
거식증의 정치성은 저항과 주체의 통제권 찾기의 행위를 내함해
규범적 삶만이 건강한 삶 될 수 없어...기준은 사람마다 다 달라
자신의 목소리를 외칠 수 있는 권리는 곧 자기결정권의 요청
청자가 없다면 당사자 목소리는 무시당해...독백 아닌 대화 중요

‘라벨링(labeling)’. 어떤 꼬리표가 따라 붙는, 혹은 딱지가 붙어버리는 현상을 의미한다. 사회학자 토마스 쉐프가 발전시킨 ‘라벨링 이론’에 의하면 일단 라벨이 붙은 개인에게 사람들은 그 라벨에 해당되는 반응을 기대하고, 대상자 역시 사람들의 기대에 일치하도록 행동하여 역할을 제한한 채 관계를 유지한다고 전제한다.

많은 정신적 고난은 다양한 라벨링의 효과를 가지며, 이 중에서도 강렬한 딱지 효과를 부여하는 것으로는 ‘경계성인격장애’가 있다. 일러스트레이터인 Rachel Rowan Olive는 인디펜던트 기고문(It’s time psychiatrists stopped stereotyping women with personality disorders – we can speak for ourselves)에서 경계성인격장애라는 라벨의 부정적 영향에 대해 지적한다.

그녀는 하나의 에피소드를 언급하는데, 자신이 받은 경계성인격장애 진단명이 자살 시도가 일어났을 때 외면에 대한 구실로서 사용됐다는 것이다. 가령 위기개입팀의 한 직원은 경계성인격장애 진단명을 가진 사람들은 서비스에 접근하기 위해 자살 시도를 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경계성인격장애 진단명에 강력하게 붙어있는 ‘관심끌기(관심종자)’, ‘교묘한 조작’ 등이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 꼬리표가 지닌 효과는 퇴원 이후 지역사회로 가더라도 함께 따라올 것으로 예측될 수 있다. ‘거식증(섭식장애)’이라는 진단명도 이와 유사한 부정적인 라벨링 효과를 가지고 있다.

부끄럽지만 필자 또한 거식증이라는 것이 어떤 미(美)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살아있는 경험이 녹여져 있는 책 <삼키기 연습>을 읽고 나면, 그 또한 라벨에 대한 너무나 단순한 편견이자 고정관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의미

우리의 삶을 어떤 단 하나의 틀로 규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회를 살아가면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어떤 사회적 규범과 기준에 맞추어서 살아가기 위해 부단히 애쓰곤 한다. 그 규범과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에 대해 외부가 부여하는 압박을 느낄 수도 있으며, 동시에 스스로가 가지게 되는 불안감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거식증이라는 현상을 외부의 관점, 타자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전형적으로 ‘규범에서 벗어난 행동’이라고 인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삼키기 연습> 저자인 박지니는 그러한 규범과 기준은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언급한다. 어떤 현상을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규범에서 어긋나는 것이라고 바라볼 수 있지만, 누군가에서는 그것이 사실이자 현실이면서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BMI(체질량지수) 17.6의 저체중 상태이고 전 직장에서는 사장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살 좀 찌우라’는 걱정어린 권고를 받기도 했지만, 내 눈에는 100퍼센트 ‘정상 체중’이었다. 그리고 ‘정상’이란 내게 ‘과체중’을 의미했다. (22.p)

거식증이라는 행위는 언뜻 자신을 학대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 또한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면 의미가 달라진다. 저자는 먹지 않는 행위는 나름의 ‘저항’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음을, 그리고 주체적인 ‘통제권’을 되찾아오는 행위가 내포돼 있음을 이야기한다.

저항의 대상은 무엇일까? 어떤 억압에서 벗어나 주체성을 찾고 싶은 것일까?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으며, 어쩌면 언어로 이를 표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이는 식사를 거부하는 행위를 단순히 ‘거식증’이라는 진단명으로 축소시킬 수 없다는 것을, 그 안에는 아주 다양하고 복잡한 맥락과 서사가 그 행위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주기적인 체중 체크는 입원 생활로 불거진 내 오기를 자극했다. (중략) 나는 격주마다 체중계의 수치를 조금씩이라도 계속 떨어뜨려 보일 생각이었다. 그건 가장 단순한 노력으로 내 뜻대로 뭔가를 움직여볼 기회, 그 언제보다 정확히 내 의지를 표현할 기회, 외롭게 묵묵히 인내하는 것만으로 현실로부터 나 자신을 갈라낼지도 모를 기회였다. (84-85.p)

나는 나를 관찰하는 부모님을 관찰한다. 나는 관찰당하는 나를 관찰하고,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움직여보려는 시도를 한다. (중략) 더 빨라져야 한다. 딸을 살찌게 하는 이 게임에서 두 분을 이겨야 한다. (중략) 부모님은 내 몸을 통제하지 못하실 거야. 그건 유일한 내 것이니까. (엘렌 베스트) (160-161.p)

 

‘건강’이란 무엇일까?

규범과 기준은 사회에서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정신적·신체적) ‘건강’이라는 기준이다.

그렇다면 건강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정신건강’이라는 용어를 흔하게 사용한다. 그렇다면 정신건강이라는 용어는 ‘정신적으로 비(非)건강함’이라는 것을 가정하는 것일까? 이는 어쩌면 정신건강이라는 용어에도 우리는 그 무언가를 기준으로 세워놓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저자는 건강함이라는 기준은 단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나는 어딘가에서 찾은 사진집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여자 사진을 발견하고 스케치북에 따라 그린 다음 수채 물감으로 채색까지 한 그림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 여백에는 ‘I’m not wealthy like her(나는 그녀처럼 부유하지 않아요)‘라고 썼다. 그는 그림이 마음에 든다면서, 그러나 마치 내 아버지가 된 듯 나를 타이르며 말했다. “‘wealthy’보다 중요한 건 ‘healthy’한 거야.” 그때, 나는 ‘건강해요’라고 말했을까? 아마 정현 언니나 혜정 언니가 먼저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석인이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니, 내 상상일까? (46.p)

어떠한 규범에 맞춰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틀에 맞춰 살아가는 삶은 평범한 삶이나 일반적인 삶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르게 바라보면, 그것은 어쩌면 순응과 순종의 또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저자 또한 언뜻 보기에 착한 환자, 규범에 잘 순응하는 환자로 행동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음을, 규범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고 싶었음을 이야기한다.

나는 착한 환자에 속했다. 입원병동에 있었을 때도 그랬고(적어도 ‘슈퍼바이즈드 테이블’에서만은) 16년만에 돌아온 자리에서도 그랬다. 나는 어차피 걸릴 짓은 하지 않았고, 지금 먹는 것이 가능한 한 제대로 소화 흡수되지 않기만을 바라며 비워야 할 양만큼은 다 비웠다. 된장찌개 속에 잠긴 조개는 건드리지도 않고 모른 체했지만, 밥알이 소화 흡수되는 비율을 최대한 줄이고픈 마음에 제대로 씹지도 않고 삼켜버렸지만, 아니, 나는 겉모습만 착한 환자였지 실은 그 반대였는지 모른다. (20.p)

앞서 저자는 웰시(wealthy)와 헬시(healthy)에 대한 부분을 언급했다. 우리는 정신적 어려움을 경험하는 사람에 대해 언급할 때 여전히 자주 웰시에 대한 부분들을 놓친다. 반대로 말하면 헬시에 대한 강조가 과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헬시와 웰시는 분리돼 있는 게 아니라 공존하는 것일 수 있다. 가령 저자는 사회경제적 어려움이 자신의 내면에도, 정서적인 측면에도 어려움을 가져옴을 이야기한다. ‘건강한 상태’ 혹은 ‘건강하지 않은 상태’라는 이분법적 구조를 떠나서 우리가 한 사람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선 다양한 사회적 지원이 필요할 수 있다.

특히 정신적 어려움을 경험하는 당사자들은 살아가면서 다양한 사회적 배제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 즉 사회적 포용(social inclusion)으로 나아가는 것이 당사자의 주체적인 삶을 위해서는 어쩌면 가장 본질적인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사무실에서 허기를 달래기 위해 샐러드를 사 먹으러 빌딩 지하 편의점으로 내려갈 때의 그 가파른 나선 계단에서, 나는 꼭대기에서 두 층 높이의 대리석 바닥으로 몸을 던지고픈 충동과 싸워야 했다. (중략) 나는 내 완전한 실패를 고백했다. 20대 시절, 학생도 직장인도 아무것도 아닌 채로 오이와 뻥튀기로 연명하며 방 안에 갇혀 지냈던, 가족들에게 암묵적으로 금치산자 같은 취급을 받았던 그때로부터 전혀 발전하지 못했다는 걸 시인한 것이다. (262.p)

 

치료과정에 대한 당사자 목소리의 중요성

다양한 정신적 어려움을 경험하는 당사자들은 공통적으로 ‘목소리’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외칠 수 있는 권리는 ‘자기결정권’과 직결되는 이슈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 또한 거식증으로 인해 다양한 ‘치료’를 경험하면서 ‘목소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언급한다. 저자는 퇴원 과정에서 자기결정권이 배제되는 현상, 그리고 당사자의 목소리가 배제되는 현상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우리는 하려던 말을 꺼낼 수 있을까? 우리 뜻대로 이룰 수 있을까? 내가 여기서 그만 나가고 싶다고, 뚱뚱해지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한다면? 언젠가 원장 선생님의 대답은 이랬다. “쯧쯧. 넌 정말 철이 없구나.” 한발 물러서서 이렇게 대답한 적도 있다. “여길 들어올 땐 네 서명을 우선 받았지만, 나갈 때는 가족의 동의가 있어야 돼. 엄마 아빠가 동의하시겠니?” (45.p)

혜정 언니는 조용하다. 언니에게는 말을 거는 게 늘 편치만은 않았다. 언니는 너무 작고 연약했다. 치와와 강아지 같았다. 언니는 원장 선생님이 자기 말을 전혀 믿어주질 않는다고 발을 구르며 그 아슬아슬한 몸을 마구 떨면서 분노하곤 했다. 오해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원장은 언니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언니가 아니라 ‘거식증’이. 거식증에게 조종당하며 자기 말엔 귀를 닫고 나쁜 길로 이끌리고 있다는 것이다. (56.p)

식사 거부라는 행위를 단순하게 질병으로 치부하면서 당사자의 다양하고 복잡한 이야기가 사라지는 현상. 이는 인식론적 부정의(Epistemic Injustice)라는 개념과 연결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인식론적으로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특정한 사회적 위치나 상황 때문에 그 사람의 증언이 신뢰받지 못하는 것을 지칭한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에 근거한 편견 때문에 목소리가 무시당하거나 신뢰받지 못하는 흑인의 경험들이 대표적이다. 

정신과 진단을 받은 사람들이 인식론적 부정의를 경험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가령 Crichton과 동료들(2017)은 정신과 진단 라벨이 당사자의 능력과 신뢰성을 감소시키기 위해 작용하는 다양한 사례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론적 부정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저자는 자신이 경험한 하나의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라캉, 환자와의 대화 中

G: 텔레파시는 생각을 전파합니다.

L. 그렇다면 누구에게 전해지는 겁니까? 누구에게? 예를 들면?

G. 저는 누구에게도 전혀 메시지를 보내지 않습니다. 제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텔레파시를 수신하는 사람에게 들린다는 겁니다. 저는 정말로 그것이...

L. 예를 들자면, 저는 그것을 수신하고 있습니까?

G.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L. 저는 그다지 우수한 청취자가 아닙니다.

위에서 라캉의 반응은 굉장히 지혜로웠다고 생각해요. 굉장히 훌륭했구요. (268.p)

제가 10여 년 전 병원에 다닐 때 엄마와 제 동생과 저 사이의 ‘텔레파시’에 대해 메일로 써드렸던 것 혹시 기억나실는지 모르겠어요. (아마 안 나시겠죠.) 제가 그 상황을, 아마도 상담시간에도 말씀드리면서 “그게 진짜일까요, 아니면 제 상상일까요?”라고 질문드렸는데 그 때 선생님이 “50 대 50”일거라고 답해주신 기억이 나요. (중략)

그 답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건, 그게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엄마도, 아빠도 가족 밖에서는 존경받는 분들이시니까.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힘들 때는 의지하는, 그 ‘텔레파시’란 수신 기관이 열려 있는 사람한테만,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전해지는 것이니까요. (269.p)

저자는 당사자 목소리에 대한 ‘인정’이 중요함을 언급한다. 누군가 텔레파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단순히 ‘의미 없는’ 발언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당사자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다보면 어느 순간 납득의 순간이 찾아올 수 있다. 언뜻 의미 없어 보이는 이야기와 행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이유와 맥락’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당사자의 외칠 수 있는 권리는 중요하지만, 진지한 ‘경청’이 없다면 당사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의미 없는 소리로 무시되거나, 주변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이는 독백이 아닌 대화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저자의 텔레파시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준 청자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로 그쳤을 것이다.

 

거식증에 대한 관점의 전환: 자기를 파괴하는 것이 아닌, 자기를 쌓아올리는 과정

저자는 섭식장애 경험자인 시인 루이즈 글릭의 글을 통해 거식증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자기를 파괴하는 것이 아닌, 자기를 쌓아 올리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거식증은 의미 없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목소리를 표출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의미가 전환될 수 있다.

거식증의 비극은 그 귀결은 그렇긴 하나 그 의도가, 자기파괴는 아니라는 데 있다. 거식증의 의도는 되레 그럴싸한 자기(self)를 쌓아 올리려는 것 – 수단이 아주 제한적인 상황에서 가능한 유일한 방법으로 자기를 만들려는 것이다. 지속되는 행동, 그 ‘거부’라는 것은, 자신을 타인과 구별하기 위한, 또 자기를 몸과 분리시키기 위한 것이다. (325.p)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에단 와터스, 2011, 김한영 역, 아카이브)에서도 이와 유사한 관점을 제시한다. 정신적 고난과 관련된 심인성 질환은 종종 확실하지 않거나 표현할 수 없어 암담한 괴로운 감정과 내면의 갈등을, 그 문화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언어나 행동으로 표출하는 시도의 한 예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관점의 전환을 위해서는 지금까지 객체화되었던, 대상화되었던 당사자들의 이야기가 중요하며, 그러한 경험들이 모이고, 쌓였을 때 비로소 본질적인 부분들이 드러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적 지식’은 정적인 것이 아니며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 그리고 교조적으로 흘러가서는 안 되고 오히려 다채로운 경험적 지식이 표출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당사자들의 목소리에 더 많은 귀가 기울여졌으면 좋겠다. (중략)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의사 윌리엄 걸의 논저에 치료 전후의 환자로 묘사됐던 여성들이 이제 일인칭 화자로 나서 각자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거기서, 그들이 발화하는 풍성한 ‘직접 겪은 경험’들 속에서, 섭식장애가 촉발되는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지점들이 비로소 드러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본다. (327.p)

나는 ‘붕괴’로 닥치는 현실의 경험을 ‘지식’으로(정적인 지식이 아닌, 변화무쌍한, 계속 변하는 지식으로) 번역해내는 것이 내 삶의 목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지식이 항상 모두의 박수를 받을 필요는 없으리란 느낌도 든다. (329.p)

책 <삼키기 연습>은 저자가 언급하는 것처럼 40년에 걸친 고투의 이야기이면서 ‘연속된 실패담’일 수 있다. 책을 읽다보면, 그 감정과 상황에 빠져들어 헤어나기 쉽지 않을 수 있지만, 책을 덮은 후 찾아오는 감정은 묘하다. 가령 오랜 기간 살아오면서 저자가 가지게 된 나름의 노하우(?)는 슬프면서도 흥미롭다.

김치나 단무지부터 위장 밑에 깔아둔다. 그러면 나중에 게워낼 때 김치 조각들이 후두둑 쏟아지고 신맛이 나면 먹은 걸 99퍼센트는 다 토해냈다는 증거가 된다. 십수 년 전 입원병동에 있을 때, 얼핏 미라처럼 보이는 마르고 왜소한 몸에 숱 많은 단발머리가 어색하게 풍성했던 어떤 언니는 항상 가방에 작은 귤을 한 개씩 가지고 다닌다고 했다. 음식을 먹기 전에 먼저 귤을 하나 씹어 삼켜서 나중에 먹은 걸 다 토했는지 아닌지를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귤 조각이 목에 걸리며 캑캑 토해지면 위장이 거의 깨끗이 비워졌다는 뜻이다. (152.p)

저자는 오랫동안 섭식장애와 같이 지내오면서 나름의 경험적 지식을 가지게 된 것일 수 있다. 섭식장애라고 이름 붙여진 정신적 고난은 삶에서 다양한 어려움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웃고, 울고, 고투하며 어떻게든 ‘그 어려움과 같이’ 살아간다.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고, 때로는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같은 정체성을 지닌 동료들과 우정을 쌓고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좌표를 찾기 위해 천천히 나아간다. 사회의 규범적, 지배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너무나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삼키기 연습>을 읽으면서 우리는 공감하게 되고 어느새 설득될 것이다. 그리고 박지니라는 한 명의 ‘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의 관점으로 바라보았을 때 그 삶은 충분한 이유가 형성된다.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도록 해요.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 < 드라이브 마이 카> 하마구치 류스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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