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 인식주간 특집] 나는 실제로 내 몸이 거대하다고 느낀다
[섭식장애 인식주간 특집] 나는 실제로 내 몸이 거대하다고 느낀다
  • 박지니(책 ‘삼키기 연습’ 저자)
  • 승인 2023.01.27 18: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섭식장애의 합리성 문제

지난해 나는 우연히 ‘섭식장애의 합리성(The Rationality of Eating Disorders)’[1]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읽게 됐다. 네덜란드의 심리철학 연구자 스티븐 개즈비(Stephen Gadsby)가 <Mind & Language>에 2022년 5월 발표한 오픈액세스 논문으로, 그는 대담하게도 섭식장애 환자들이 자기 몸을 ‘뚱뚱하’거나 혹은 ‘거대하’다고 보고할 때 그들의 말이 거짓 보고인지 아닌지 - 즉 불안을 감추기 위해 그냥 내뱉는 철없는 불평인지 그렇지 않은지, 그들의 ‘잘못된 믿음’에 과연 합리성이 있을지 혹은 그 믿음이란 단지 근거 없는 망상에 불과한지를 논의의 주제로 삼았다.

© Aeon Media Group Ltd. 2012-2023
© Aeon Media Group Ltd. 2012-2023

이 이야기를 건너 들은 적이 있다. (지금은 없어진 지 오래인) 섭식장애 전문 입원병동에 열 살 남짓한 거식증 환자가 입원했다. 어느날 아침 야간 당직 간호사들이 환자들의 체중을 포함한 ‘활력증후’를 재는 와중에, 그 아이가 격렬히 울음을 터뜨렸다. (활력증후 측정 다음에 올 일정은 아침식사다.)

자신의 허벅지가 ‘저 선생님’ - 마침 야간 당직이었던 통통한 체격의 간호사 - 보다 굵다는 호소였다. 어떻게 해도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다른 간호사가 동료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럼 줄자로 이 선생님 허벅지 둘레와 네 허벅지 둘레를 재어 보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의 공포는 끝나지 않았다. 간호사가 아이의 눈 앞에 증거를 들이대도 “그래도 내 허벅지가 더 두꺼워요…”하며 아이는 흐느꼈다.

섭식장애 환자의 인지적 왜곡을 측정하거나 교정하려는 시도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나는 거의 20년 전에 인터넷에서 어느 외국 치료센터 같은 곳에서 섭식장애 환자들이 바닥에 깔린 큰 종이 위에 눕거나 벽에 몸을 붙이고 서게 한 다음 다른 누군가가 그의 체격의 실루엣을 따라 그리게 하는 프로젝트를 글과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물론, 내 자신을 환자의 자리에 이입한 즉시 참기 힘든 공포와 혐오감을 느꼈다.)

Body shape changes for an anonymized, bespoke avatar as the slider control is moved from left to right through screenshots a,b,c & d. courtesy of scientific report
Body shape changes for an anonymized, bespoke avatar as the slider control is moved from left to right through screenshots a,b,c & d. courtesy of scientific report

실험실의 컴퓨터 스크린에서 자신의 체형과 가장 비슷하다고 느끼는 3D 아바타를 고르는 과제도 있었다[2]. 섭식장애 환자는 - 당연하게도 - 실제 그의 모습보다 더 큰 몸을 지닌 아바타를 선택한다. 지금 거기 앉아 있는 자기 존재의 참을 수 없는 부피와 물질성에 역겨움을 느끼면서.

그렇다면 그 ‘왜곡’은 어떻게 고칠 것인가? 입원병동의 여자아이처럼 줄자를 가져다 직접 재어 보고 그 결과를 눈앞에 들이댄대도 ‘왜곡된 인지’가 상쇄되지 않는다면? 객관적인, 시각적 증거가 그들을 진정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하고, 히스테리 부리고, 타인을 조종하려는 환자”

섭식장애 환자들은 모든 정신질환 가운데 가장 공감받지 못하는 부류일 것이다. 가족, 친구, 동료 모두 그들의 ‘뚱뚱하다는 느낌’에 대한 호소를 한 귀로 듣고 흘려 버리며 최악의 경우는 (계몽되지 못한, 정치적으로 옳지 않은[3]) ‘비만 공포증’을 드러내고 있다는 비난을 받기 일쑤다.[4]

첨예한 논쟁을 빚는 주제이기도 한 ‘경계선 인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 BPD)’ 환자들에 대한 낙인처럼 말이다. 그리고 실제 섭식장애 환자가 많이 진단 받는 동반질환 중 하나가 BPD이기도 하며, 이를 다른 식으로 표현해 성장과정에서 만연한 트라우마 경험이 두 진단의 공통된 기저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BPD의 낙인을 떨친 새로운 명명은 바로 복합 외상후스트레스장애(complex PTSD)이며, 섭식장애란 한 마디로 “트라우마의 용광로”라고 비유하는 전문가도 있다.

그렇다면 그건 어떤 ‘트라우마’인가? 의사들이 말하듯, 단순히 젊은 신참 부모들이 육아에 실패한 결과 빚어진 안타까운 불행에 불과할까? 섭식장애의 근원 감정이라고 일컬어지는 ‘수치심’처럼? 나를 돌보는 법을 익히고 ‘나를 사랑하’게 되면 아물게 할 수 있을 일차원적 상처일까? 혹은 최근 번역 소개된 책 <여성의 수치심(The Female Face of Shame)>(에리카 L. 존슨, 퍼트리샤 모런 저, 글항아리, 2022)의 부제가 ‘젠더화된 수치심의 문법들’인 것처럼, ‘트라우마’ 역시 핵가족이라는 사적인 영역을 훨씬 넘어선 문제가 아닐까?

에리카 L. 존슨, 퍼트리샤 모런, '여성의 수치심(The Female Face of Shame)', 글항아리, 2022
에리카 L. 존슨, 퍼트리샤 모런, '여성의 수치심(The Female Face of Shame)', 글항아리, 2022

“아버지, 저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시각적 인지의 문제가 자기 신체 감각의 차원으로 이동해, 가장 먼저 주목받은 역량은 바로 내부수용감각(interoception)이었다. 연구자들이 내부수용감각의 민감도를 판단하기 위해 가장 많이 측정하는 것 중 하나는 피험자가 자신의 심박을 느끼는 감도다. 이때 가설은, 섭식장애 환자는 자기 몸의 감각에 둔감하기 때문에 배고픔과 배부름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정말 나는 내 몸의 느낌을 정상적인 수준 이하로 둔감하게 느끼나? 나는 아프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내 심박수를 정확히 세지 못하는가? 거식증 상태에서는 마치 조증 환자처럼 돼서 내 몸이 힘든지도 모르고 움직이는 것일까? 그렇다면 내가 하루 중 절반 이상은 의식에서 지우지 못하는 소화기관의 통증이나 불쾌감은 무엇일까?

최근 <유럽섭식장애리뷰(European Eating Disorders Review)>에 실린 내부수용감각 연구에 대한 리뷰 논문[5]은 소위 '내부수용감각'을 측정한다고 주장하는 연구들이 실은 서로 다른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는 방법론적 미비를 지적했다.

이미 머피 등(2019)[6]이 분석했듯이, 내부수용감각은 피험자의 지각 정확성을 측정하는가, 혹은 체내 감각에 집중된 주의의 강도를 측정하느냐에 따라, 또 한편 내부수용감각 지각 과제 수행도로 평가하느냐, 피험자의 자기보고를 신뢰하느냐에 따라 네 가지 다른 차원으로 갈릴 수 있다. 저자들은 내부수용감각에 관한 연구들이 자주 반복실험에서 동일 결과를 재현하는 데 실패하는 원인이 바로 그 방법론적 결손에 있다고 주장한다.

내부수용감각이라는 주제는 결코 폐기되지 않았고, 그 연구 역시 지금도 다양한 측면에서 활발히 진행 중이다. 하지만 섭식장애 환자의 인식적 '실패'를 가정하고 그것을 입증하려는 시도엔 기존의 '인식론적 부정의(epistemic injustice)'가 성찰 없이 재연된 것은 아닐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스티븐 개즈비가 그의 연구의 초점을 두는 곳도 바로 그 지점이다.

공중을 유영하는 꿈과 그때의 신체감각

내부수용감각에 뒤이어 주목받고 있는 자기신체감각 역량은 자기수용감각(proprioception)으로, 이는 내부수용감각과는 달리 세계와 자기 신체의 위치적, 공간적, 벡터적 관계를 지각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바로 이 역량에 주목해 논지를 전개한 스티븐 개즈비는 논문에 이렇게 풀어 썼다.

자기수용감각은 우리 몸이 어디서 끝나고 어디서부터 세계가 시작되는지, 즉 우리의 신체적 경계를 인식하는 능력이다. 이 감각 덕분에 우리는 내 몸의 위치(지금 내 몸의 경계가 어느 지점에 놓여 있는지)와 크기(내 몸이 얼마만큼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정보는 신체 모델(body model)이라 불리는 신경 표상 내에 저장된다. 자기 몸의 경계에 대한 감각은 이 신체 모델에 저장된 정보로 결정되므로, 신체 모델이 자기 체격을 잘못 표상하고 있을 경우 우리는 자기 몸의 경계를 잘못 지각하게 된다. (중략)

섭식장애 환자들은 그들이 실제보다 더 체격이 큰 것처럼 행동하고 스스로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열린 문틈을 지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환자들은 필요한 이상으로 어깨를 트는 모습을 보인다. 문틈 혹은 다른 비좁은 공간을 자신이 얼마나 수월하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은지 묻는 질문에도 같은 식으로 편향된 답을 낸다. (중략)

만약 섭식장애 환자들이 왜곡된 신체 모델로 인해 자기 몸의 경계를 잘못 지각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뚱뚱하다는' 신체적/물리적 느낌을 호소할 때 그 호소에는 근거가 있다는 뜻이 된다. pp.8-9.

내 20여 년에 걸친 섭식장애 경험을 쓴 책 <삼키기 연습>을 출간하고 얼마 뒤 <채널예스>에 공개한 인터뷰[7]에서, 뇌의 '외측 측두두정 접합(lateral temporoparietal junction)'에 관심 갖고 있다고 말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자기수용감각, 외측 측두두정 접합, 그리고 타인의 입장을 상상하는 능력인 마음이론(theory of mind)을 포함한 사회인지(social cognition)가 서로 복합적으로 연결된 주제인 까닭이다.

내게는 거의 평생을 지속한 것 같은 고질적 꿈이 존재한다. 그건 내가 땅을 가뿐히 차고 올라 마치 물속에서 몸을 움직이듯 공중을 유영할 수 있는 꿈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의 조감과 함께 꿈에서 핵심적인 것은 내가 내 몸의 근육을 활용해 유영의 방향과 속도를 조정하는 일이다. 그 감각은 너무 실제적이고 생생해서, 나는 깨어 있는 중에도 내가 일평생 연습한 그 방향조절법을 쓸 수 있을 것 같이 느낄 정도다.

놀라웠던 일은, 일 년 전쯤 나와 거의 같은 식의 꿈을 어머니도 오래 꾸셨었다는 걸 뒤늦게야 알게 된 일이었다. '이제는 안 꾼다'고는 하셨지만,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이상할 만큼 생생하고 복잡한 꿈에 시달리시며 나 역시 그렇다. 다만, 사변적인 세대로서의 나는 내 꿈을 어머니처럼 무의미하고 귀찮은 방해물로 간주해 버리지 않는다는 점이 다를 뿐.

나는 어머니와 나의 똑같은 꿈이 자기수용감각의 외로운 연습, 혹은 그 혼란과 연관되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세계 속에서 물리적 존재로서의 내 위치와 방향성을 끊임없이 조정하고, 그리고 사실상 대개는 그 일에 실패하는 식으로.

세라 아메드, 프란츠 파농

지금 내가 천착하는 것은 세라 아메드(Sara Ahmed)의 사유와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의 언어다. <여성의 수치심>에서 장애학 연구자 일라이자 챈들러는 이렇게 쓴다.

문화이론가인 세라 아메드 역시 수치심을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부풀어 오르는 것이자 우리를 세계에 "들러붙게" 만들 수 있는 감정으로 이해한다. 아메드는 감정의 이동은 "끈적거리며" "감정의 작인을 하나의 장소, 자아 안, 혹은 사회적인 것 안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쓴다.

끈적임(...)이란 대상들이 다른 대상들에게 행하는 것 - 그것은 정동의 이동을 수반한다 - 이다. 그러나 한 대상의 끈적임이 다른 대상의 끈적임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이는 수동적인 것과 적극적인 것 사이에 구분이 없는 '행함'들 사이의 관계이며, 따라서 그 다른 대상은 그것에 들러붙어 있는 듯 보인다. p. 183.

다시, 페미니스트 문학비평가 시네이드 맥더모드는 브룩스 부손(Brooks J. Bouson)의 말을 인용한다.

<체현된 수치(Embodied Shame)>에서 부손은 여성 신체가 서구 문화에서 수치심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왔다고 주장한다. 부손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성은 남성 규범에 따라 결함이 있거나 무언가 결핍된 존재, 잠재적으로 질병에 걸린 존재로 간주되었고 우리 문화에서 오랫동안 수치심의 전형이 되어왔다. 실제로 여성의 사회화 과정은 오랜 시간에 걸쳐 수치심에 몰입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8]

부손은 "신체는 여성에게 수치의 중심지로 남아 그 자체로 통제 불가능한 식욕, 무언가 더럽고 모욕적인 것과 연관된다"고 주장하며 "많은 여성이 엄마와 자기 자신, 젠더에 대해 갖고 있는 느낌과 판타지의 중심에 수치심이 자리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혐오감과 함께 종종 여성의 신체적 자아감(sense of bodily self)에 영향을 미친다는 낸시 초더로의 주장을 언급한다. pp. 261-262.

다시, 이번에는 파농으로. 책에는 파농이 그의 책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 묘사했던 유명한 일화 역시 언급된다.

"저기 검둥이 좀 봐!" 지나가는 나를 건드렸던 것은 외적 자극이었다. 나는 무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기 검둥이 좀 봐!" 그렇다. 이 말은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것이 내 장난기를 발동시켰다.

"저기 검둥이 좀 봐!" 그 작자들이 점점 가까이 왔다 나는 더 이상 그 비밀스러운 장난기를 숨길 수가 없었다.

"엄마, 저가 검둥이 좀 보세요! 무서워요!" 무섭다니! 무섭다니! 그들은 정말 나를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나는 눈물이 날 때까지 웃고 싶었다. 물론 그렇게 하진 못했지만.

파농은 그 욕설에 포획되었고, '세계-내-존재'로서 감각의 바깥으로, 혹은 안으로 급작스럽게 내몰렸다. 백인 소년이 자기 어머니를 향해 외친 멸칭 "검둥이!"는 파농을 두려워해야 하는 누군가, 공포의 감정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누군가로 인식했다. 그리고 이 인식과 함께 파농은 웃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이 웃음은 그에게 "불가능한 것"이다. 파농을 '검둥이'로 인식하게 하는 이 단어들은 그를 위험한 차이에 대한 인유로 변모시켰도, 식인행위, 후진성, 우상숭배, 인종적 낙인, 노예무역 등으로 규정되는 흑인성에 "붙박아버린다". 이런 생각은 그가 살아온 현실로도 저지되지 않는다.[9] 심지어 그 자신이 이와 같은 흑인성의 (공포스러운) 판본으로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pp. 187-188.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불리고 여겨지느냐는 아메드의 표현처럼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방식으로 우리 자신에게 힘을 발휘한다. 나는 섭식장애의 기저에 있다고 추정되는 '트라우마'를 이렇게 한층 광범위한 관점에서 파고들고 싶다.

Martha C. Nussbaum, Hiding from Humanity: Disgust, Shame, and the Law
Martha C. Nussbaum, Hiding from Humanity: Disgust, Shame, and the Law

정의는 타인을 자신만큼 복잡한 존재로 상상할 수 있을 때 올바른 방향성을 얻는다

언젠가 나는 어느 디지털 헬스케어 컨퍼런스에서 노인성 치매 치료를 위한 인지훈련 앱을 개발 중인 의사의 발표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임상 현장에서 알츠하이머 치매 환자를 많이 보아 온 의사로, 선의의 사명감에서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했다. 간단한 조사 결과, 학력이 낮은 노인 인구에서 치매 발병률이 높다는 것이 확인됐다. 나는 순간 그 세대가 겪은 역사적 사건들과 사회적 부조리가 온몸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무대에 선 의사의 논리적 방향은 사뭇 달랐다. 그는 거기서 얻은 통찰적 해법이 그들 노인들을 지적으로 강화시켜 준다는 것이었고, 곧이어 이를 위해 노인들의 '기억력'을 훈련시키면 되겠다고 판단했다며 비약해 버렸다.

어떻게 오랫동안의 사회구조적 실패가 그토록 단편적이고 편의적인 조치로 복구되리라 생각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한 현상에서 도출된 언어적 개념 하나가 세계 속에서 한 인간의 삶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 낙관할 수 있을까?

섭식 문제를 겪는 여성이 '나는 내 자신을 긍정하고 싶지만, 내 존재를 집어삼키는 수치심이 내 몸과 세계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고 증언한다면, 우리는 그의 말에서부터 진실을 찾아야 한다.

미주

[1] https://onlinelibrary.wiley.com/doi/full/10.1111/mila.12421

[2] https://www.nature.com/articles/s41598-017-15339-z

[3] 괄호 안의 내용은 박지니의 추가.

[4] https://psyche.co/ideas/is-feeling-fat-really-a-manifestation-of-underlying-sadness

[5] https://onlinelibrary.wiley.com/doi/10.1002/erv.2905

[6] https://link.springer.com/article/10.3758/s13423-019-01632-7

[7] https://m.ch.yes24.com/Article/View/45951

[8] 박지니의 강조.

[9] 박지니의 강조.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