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미 새는 날지 못하는 새끼 새를 떠나지 않았다...아니, 못했다
어미 새는 날지 못하는 새끼 새를 떠나지 않았다...아니, 못했다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1.01.08 2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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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운영 수원정신건강가족학교장 ‘나는 정신장애 아들을 둔 아버지입니다’ 출간
“늙은 정신장애인 자식을 데리고 병원을 데리고 다니는 건 참담함”
“가족에게 필요한 건 고통의 연대를 통한 거듭남”
“결국 국가가 정신장애인의 삶을 책임져야”

며칠 전 눈이 내렸다. 폭설이었다. 근년에 들어 처음 보는 눈송이들이었는데 그 풍경을 뚫고 누군가 책을 냈다는 전갈이 왔다. 설운영(66) 수원정신건강가족학교장이 조현병 아들을 돌보면서 깨달은 삶의 의미와 국가의 정책적 지원을 요청하는 책을 냈다는 소식이었다. 제목은 ‘나는 정신장애 아들을 둔 아버지입니다’, 부제(副題)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20년간의 처절한 삶의 기록.’

언뜻 조현병 아들을 둔 미 저널리스트 론 파워스의 책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가 떠올랐다. 론 파워스는 책의 머리말에서 “여러분이 이 책을 ‘즐기지’ 않기를 바란다. 여러분이 이 책으로 인해 상처 입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때로는 우리는 소일거리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책을 읽는 경우가 많지 상처받지 위해서 읽지는 않는다. 삶의 바람소리에 휘청일 때 위로받기 위해서 책에 손을 내밀지 폭력처럼 정신에 상처를 주기 위해 글을 읽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론 파워스는 “당신이 상처입기를 바란다”고 명확하게 밝혔다. 저자 설운영도 자신의 책이 ‘상처’가 되기를 바랄까.

기자는 2019년 풍경 속 눈이 쌓여 있던 겨울녘에 저자 설운영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정신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돌봄과 국가의 정신장애 친화적 정책을 강조했다. 가족 중에 한 명의 정신장애인이 있으면 가족이 그의 삶을 온전히 맡을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에서는 정신장애인도 가족도 피해자가 된다는 의미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죽을 때까지 지팡이 짚고 늙은 부모가 휘청휘청거리면서 다 늙은 정신장애인 애를 데리고 이 병원, 저 병원 데리고 다녀야 되는 게 얼마나 참담하냐고요. 그럼 국가가 책임을 이행해라. 복지? 말만 하지 말고 보살피고 커뮤니티 케어 안으로 들어오게 해야 하는데 국가가 이를 다 배제시키고 있다는 거죠.”

그러면서 “내 배로 애를 낳았다는 죄 때문에 죽을 때까지 끌고 다닐 수밖에 없는 이 비참한 현실을 언제까지 대한민국은 보고 있을 거냐”고 토로했다.

결론은 어쩌면 하나일 것이다. 정신장애 대한 국가책임제의 구축과 완성. 치매와 암의 국가책임제처럼 정신장애도 국가가 보살핌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정신장애 가족들이 국가에 바라는 핵심적 요청일 것이다.

그래서 저자 설운영은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고 있다. 지난 20년간 조현병 아들을 돌보면서 그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했다. 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지, 왜 국가 정책에서 정신장애인 돌봄은 늘 뒷전으로 밀려나야 하는지, 왜 가족은 정신장애인 아들과 딸을 뒀다는 이유로 본인의 인과론에 치우친 ‘죄(罪)’를 들고 나와야 하는 것인지.

몸이 아픈 것처럼 정신이 아픈 것도 생물학적이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질병인데 유독 정신장애에는 부모의 ‘죄의식’이 들어가야 하는 것일까. 저자 설운영은 그렇게 묻는다.

그는 “그들(정신장애인들)이 원하는 것은 거창하게 들어주기 힘든 것이 아니다. 사람으로 대접받고 사람답게 사는 것, 그들의 꿈이고 희망”이라고 적었다.

가족의 바람 역시 그렇다. 설운영은 “아픔의 그늘 속에 있는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강요가 아니라 고통의 나눔과 연대를 통한 거듭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말한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함께 살아간다. 더불어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고통을 나눈다는 건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된다. 한 사람의 고통에 타인이 공감할 때, 인간은 그 고통에 질문을 던지고 고통의 제거를 위해 연구하고 국가에 필요한 것들을 요구하게 된다. 그 고통에 대한 질문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다. 그래서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저자 설운영은 아들의 절규를 듣는다. “나 같은 놈을 왜 낳았어. 차라리 밟아 죽여버리지.” 아들은 컴퓨터 게임에만 집중했다. 그것이 치유가 아니라 환영으로의 도피였다는 걸 알게 된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들에게 “그것 봐, 네가 다른 것에 집중하면 잊을 수 있어. 다 헛것들이야. 넌 반드시 좋아질 거야”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내 목소리는 벽을 타고 흐르는 공허한 울림으로 되돌아야 가슴을 두드렸다”고 토로하고 만다.

저자처럼 조현병 딸을 둔 한 어머니는 “내가 엄마를 죽일 수 있어요. 환청이 들리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밤에 문 걸어 잠그고 주무세요”라는 딸의 최후통첩 같은 말을 듣는다. 노모(老母)는 방문을 잠그지 않았다. 딸에게 그 환청이 거짓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묵주를 돌렸다. 딸은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고야 만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것일까.

그 노모는 저자 설운영에게 말한다. “정신질환 회복에 대한 교육을 받은 가족과 안 받은 가족은 확연히 다르다. 증상을 알아야 고치고 극복할 수 있는데 왜 배우려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라고.

기자는 많은 정신장애인 당사자와 그 부모들을 만나왔다.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때로는 울었고 때로는 웃었다. 기자는 그 목소리의 원형에 “이해받고 싶음”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인간은 이해받고 싶어 하는 존재다. 내가 당신을 위해 싸운다는 것은 당신의 고통을 이해하고 있고 당신을 사랑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정신질환을 공동체가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면 공동체는 어쩌면 함께 목소리를 내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는 그런 공통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가족은 사회의 뒷배경에 숨어 나오지 않는다. 그 사회는 정신장애인을 더 타자화시킨다.

저자 설운영은 사회적 냉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토록 혐오 폭력이 뒤섞인 세계를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살아갈 수는 없는가. 이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면 어떤, 꿈 희망을 가져야 할까. 그것이 가능할까?”

그리고 “너희 중에 누구든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지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 간통한 사마리아 여인을 뭇 대중이 비난하고 돌을 던지려 할 때 예수는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고 했다.

이 신화는 너희 중에 정신의 아픔 없는 이들이 정신장애인들에게 돌을 던지라는 의미에 포개질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그가 누구든 삶의 의무적으로 상처가 담긴 보따리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존재다.

그래서 저자 설운영은 미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을 인용해 “가장 정상적인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병들어 있는 사람들이다. 또한 병들어 있는 사람들은 가장 건강한 사람들이다”라고 말한다.

설운영은 부모가 자식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습지의 나뭇가지에 있는 둥지의 새끼 새들에게 어미 새는 부지런히 먹이를 날랐다. 어느새 커진 새끼들이 창공으로 날았지만 한 마리는 날지 못하고 둥지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어미 새는 퍼덕거리는 어린 새를 두고 끝내 그 곁을 떠나지 못했다.

그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울었던 적은 처음이었다”고 전했다.

그렇다. 부모는 자식을 놓을 수 없다. 그 사랑은 맹목적이고 필사적이다. 이유 없는 사랑, 그것이 부모의 사랑이다. 더운 혓바닥으로 차가운 자식의 정신을 핥는 사람, 그가 바로 부모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놓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자식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저자 설운영은 국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부모가 자식의 미래를 염려하지 않고 눈을 감을 수 있는 사회. 그 길은 우리 모두의 소망의 길이자 희망의 별이다. 국가가 책임지라는 슬로건처럼.

저자 설운영은 자식을 돌보는 과정에서 깨달은 삶의 의미도 적었다. “마음대로 안 되기 때문에 인생은 가치 있다. 내가 겪었던 것들, 그 아픔은 내 생애 최고의 경험이었다”. 이어 “우리는 죽음과 같은 절망과 시련을 통해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라고 고백하고 만다.

론 파워스는 자신의 책이 즐거움이 아니라 ‘상처’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저자 설운영은 어떨까. 혹시 ‘고통에 대한 공감’이 아닐까. 그대의 아픔을 통해 내가 성숙해간다는 것. 불교의 유마힐 거사가 말한 “중생(衆生)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던 그 공감. 그 고통에 인연 없는 이들도 함께 참여해 좀 더 나은 사회로 전진할 수 있는 공감. 그래서 국가의 존재 이유를 함께 사유하는 공감. 그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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