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환수 “장애인위원장으로서 정의당 의원들에게 장애인복지법 제15조 개정하라고 건의할 것”
박환수 “장애인위원장으로서 정의당 의원들에게 장애인복지법 제15조 개정하라고 건의할 것”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1.03.22 18: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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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환수 정의당 중앙장애인위원장 인터뷰
시설은 자기결정권 없는 공간...“한번 가서 살아보라”
월 720시간 활동보조인 지원 정책으로 탈시설에 긍정적
교도소도 아닌데 왜 재소자처럼 시설에 갇혀서 살아야 하나
시설에 창살? 창살 없어도 이미 ‘창살 없는 감옥’
신체장애 자립생활운동은 의료에서 사회적 모델로 전환
신체장애·정신장애 다르지만 소외받는다는 점에서 공통 의미
장애인위원장으로서 정신장애 단체와 소통하고 연대하고 싶어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박환수(36) 정의당 중앙장애인위원장을 만난 건 지난 18일이었다. 그날 전후로 우리는 비대면으로 5~6차례의 메일을 주고 받았다.

그는 뇌병변장애인이다. 1984년 태어날 때 어머니의 난산으로 출생 6개월만에 뇌성마비 진단을 받게 된다. 뇌성마비 장애인 전문 유치원과 장애인 특수학교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쳤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는 그는 학교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때 교내 방송반 작가와 학생회 학습부장으로 활동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 시절, 교내 인터넷방송국에서 구성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는 향후 연극 연출도 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26살이던 2010년, 한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간사로 근무하고 2012년 서울장애인연맹(서울DPI)에서도 1년 남짓 간사로 활동했다. 그때 ‘반시설 국토대장정’이 있었다. 그는 부산에서 울산까지 휠체어를 끌며 참여했고 시설생존자연대 회원으로 국회 앞 일인 시위에도 함께했다.

2016년 장애인자립생활센터 체험홈에 입주했다가 이 센터가 문을 닫으면서 2017년 서초구청 소유의 주택으로 들어가 생활했다. 성인이 된 이후 처음 경험하는 자립생활이었다. 그는 “자유가 있었지만 식비와 관리비는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고 그때를 전했다.

재택 근무자 채용 공고에 입사지원서를 넣었지만 장애가 심하다는 것을 자기소개서에 쓰면 어김없이 연락이 오지 않았다. 돈이 없었다. 그리고 그해 10월, 그는 다시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돌아갔다. 2018년 가족은 경기도 광명시로 이사를 했다.

그 무렵,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주최하는 장애정책 토론회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A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월 56시간의 장애인 복지일자리를 갖게 된다. 이후 업무 형태가 바뀌면서 월 80시간의 노동을 하게 됐다.

장애인에게 자립은 노동을 통한 인격의 복원이다. 그가 그랬다. 그는 자립생활주택에 거주하는 장애인과 동료상담을 했고 장애인 단체가 주도하는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이후 몇 달째 공석으로 있던 정의당 중앙장애인위원장을 맡게 됐다.

그는 오랜 시간 장애인 이동권 투쟁과 탈시설, 혹은 반(反)시설 운동에 동참했지만 자신이 ‘투사’ 이미지로 비치는 것에 부담감을 느낀다고 했다. 다만 중증 뇌성마비장애인의 몸으로 정당의 장애인위원장을 맡은 것을 중심으로 자기 삶을 설명하고 싶어 했다.

기자가 그를 만나고 싶었던 건 각 정당의 장애인위원회가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다. 그리고 당의 장애 의제에 정신장애는 어떤 형식으로 접근하는지 역시 궁금했다. 박 위원장과는 이메일로 질문지를 보냈고 이후 한 차례 서울 여의도 정의당 중앙당사에서 만났다.

언어장애를 가진 그는 말 대신 탁자에 손으로 뭔가를 썼고 옆의 활동지원사가 이를 설명했다. 30분 정도의 만남 후 우리는 헤어졌고 다시 이메일을 통해 나머지 몇 개의 답을 받았다. 다음은 일문 일답.

박환수 정의당 중앙장애인위원장 (c)마인드포스트.
박환수 정의당 중앙장애인위원장 (c)마인드포스트.

-정의당 중앙장애인위원회에 정신장애인은 있습니까.

“제가 아는 바로는 두 명의 정신장애인이 있습니다. 한 분은 예전에 인천시당 장애인위원장을 맡으셨고, 다른 한 분은 지난 기수에서 서울시당 대의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정의당에 젠더폭력근절 및 차별금지법 추진위원회, 성소수자위원회는 있는데 정신장애 의제는 없습니다.

“성소수자위원회는 제가 소속한 장애인위원회와 같이 부문위원회고요, 작년에 만들어졌던 차별금지법처럼 그때의 이슈에 대응하기 위하여 과제별 위원회를 둘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젠더폭력근절 추진위원회가 있는지요. 젠더인권본부는 있는데 말이에요. 위원회와 의제는 다르죠.

위원회는 해당 부문위원회와 이슈에 맞는 의제를 발굴하고 입법 등의 활동을 해야죠. 따라서 정신장애 의제는 저희 장애인위원회가 담당해야 하는데 정신장애를 가지신 분들이 소수밖에 없어서요. 앞으로 <마인드포스트>에서 정신장애에 대한 의제를 저희 장애인위원회에 제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위원장님은 정신장애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습니까.

“실제로 저도 정신장애 기질도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은데, 기자님에게 한 번 상담을 받아도 되는지요. 정신장애를 깊이 고민해 보기보다는 제가 그동안 만나보았던 정신장애인 분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 봐도 될까요?

정신장애인을 처음 본 건 2011년 서울장애인연맹에서 주최한 장애인청년학교였어요. 이 교육에 정신장애인 두 분이 들어왔는데, 한 분이 공교롭게도 저와 같은 조인 거예요. 근데 저랑 같은 조인 정신장애인 분은 중간에 교육을 포기하셔서 몇 번밖에 보지 못했어요.

근데 정신장애인을 직접 봤더니, 제가 그동안 가져왔던 정신장애인에 대한 생각과는 정말 완전히 달랐어요. 정신장애인을 실제로 보기 전까지 이 사람들이 대체로 기분과 감정의 기복이 되게 심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분은 정신장애를 안 가진 사람들보다 오히려 차분하고 조용했어요. 이게 우울증 때문일 수도 있지만요.

또 다른 정신장애인 분은 겉으로 보기에 전혀 정신장애를 갖고 있지 않는 것 같았어요, 후에 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이 되어서 토론회에서 발표하는 거 들어보니까 장애를 갖게 된 당시에는 너무 힘들어했는데, 이제는 회복이 많이 됐다고 하더군요.”

-장애운동을 2010년 동작장애인자립생활센터 간사로 시작했더군요. 그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대학에 다녔죠. 휴학을 몇 번 하고. 사정이 있어서 대학을 10학기 다니다 보니까 학업을 늦게 끝마쳤네요.”

-2012년 7월 창립된 시설생존자연대에서 일하셨더군요. 그때가 장애운동을 막 시작할 때였는가요.

“시설생존자연대라는 사무처가 따로 존재한 건 아니고요. 그 당시 제가 다녔던 서울장애인연맹이 주도로 만든 단체입니다. 물론 서울장애인연맹이 시설생존자연대 사무처고요.”

-그렇게 사회운동을 하게 된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장애운동도 사회운동의 한 부분이라면, 10년 전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 다니게 된 것이 계기라면 계기겠죠.”

박환수 정의당 중앙장애인위원장 (c)마인드포스트.
박환수 정의당 중앙장애인위원장 (c)마인드포스트.

-그때 300일에 걸친 국회 앞 릴레이 시위를 인상 깊게 봤습니다. 그때 요구 조건이 탈시설이었는데 지금 상황은 좀 나아졌습니까.


“시설생존자연대의 궁극적인 목적이 ‘반(反)시설’이었고요. 반시설은 탈시설과 다르게 시설을 반대한다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중증장애를 가진 시설 거주인이 지역사회로 나오기 위해서는 활동보조서비스 720시간 확보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의제로 삼았습니다.”

-2012년 시설생존자연대 운동 방향성이 장애인자립생활보장법 제정 및 활동보조서비스 확보였습니다. 그때 위원장님은 서울 DPI 간사로서 시설생존자연대 집행위원장으로 일했습니다. 10년 전부터 요구해온 장애인자립생활보장법은 어떻게 됐습니까.

“먼저 사실부터 말씀드리자면 제가 시설생존자연대 집행위원장으로 맡았던 건 아니고요. 저를 정의당 당원으로 인도해 주신 장애인 선배가 맡았어요. 그리고 장애인자립생활보장법은 장애인연맹, 즉 DPI가 주도하여 입법 활동을 했었는데, DPI의 활동 성격이 변화해 흐지부지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때 내건 어젠다가 활동보조서비스 월 720시간 확보였습니다. 지금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그 이후 활동지원사가 없어서 장애인들이 사망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해서 서울시 등에서 월 720시간 활동보조지원 정책이 실시됐어요. 월 720시간 활동보조 지원 정책으로 많은 시설 거주 장애인이 탈시설을 해 지역사회에서 살고 있거나 반대로 지역사회에서 살고 있는 장애인이 나중에 시설에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을 더이상 하지 않게 된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인 거죠.”

-혹자는 그렇게 활동보조를 장시간 받아야 한다면 병원이나 시설에서 살아야 하지 않느냐는 무지한 의견도 내놓더군요.


“병원이나 시설에서는 자기결정권이 없잖아요. 거기에서는 정해진 시간에 주는 음식대로 밥먹고, 또 정해진 시간에 취침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 한 번 병원이나 시설에서 살아 보라고 해요.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말이 나오나.”

-장애인거주시설의 중증장애인에게 국가는 서비스라는 명목으로 시설에 돈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 돈이 어디 시설 거주 장애인에게 돌아가나요? 시설이나 시설 원장에게 돌아가는 거 아닌가요? 설사 그 돈이 시설 거주 장애인의 통장으로 꽂아 줬어도 그 장애인이 이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을까요.”

박환수 정의당 중앙장애인위원장 (c)마인드포스트.
박환수 정의당 중앙장애인위원장 (c)마인드포스트.

-어떤 여성 신체장애인은 자신이 탈원화를 하게 된 이유는 ‘자유’ 때문이었다고 하더군요. 위원장님이 탈시설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저도 삼육재활원이라는 시설 부속 학교를 나왔으니까 시설 생존자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제 경우는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까 자동적으로 탈시설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시설에서 살아서 ‘생존했다고’, 시설생존자라고 말하기가 부끄럽네요.

그리고 무조건 탈시설하여 지역사회에서 살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범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들처럼 왜 시설에 갇혀서 살아야 하냐는 거죠. ‘먹여주고, 재워주는데’라는 건 이유가 안 되잖아요.

실제로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한테 딱 일주일만 살아보라고 하세요. 적어도 백이면 구십 정도가 시설에서 나오고 싶다고 할 겁니다.”

-정신장애인은 불법 요양소나 정신요양시설, 정신병원에서 규율과 폭력을 당하면서 깊은 트라우마를 겪습니다. 신체장애도 그런가요.

“사람들은 누구나 심각한 충격과 상처를 받으면 트라우마를 겪잖아요. 신체장애인도 인간인 이상 마찬가지죠. 제 지인 가운데 시설에서 살다가 탈시설해 10년 넘게 자립생활을 하고 있는 장애인이 있어요. 그는 밤 동안 시설장애인이 죽어 나가는 광경을 참을 수 없어서 시설을 탈출했다고 하네요.

저도 좋지 않는 일을 겪으면 기억에 많이 남는 편이에요. 제가 중·고등학교 때 기숙사 생활을 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때 여기에서 ‘경증’이라고 하는 척수장애인 두 명. 그들은 저보다 한 학년 아래였죠.

이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하대하고 함부로 대하는 거예요. 저는 그들보다 상급생이었고 공부도 잘한다는 평판이 있어서 저에게 그들이 거의 하대하지 않았지만, 이런 행동을 보고서도 하지 말라고 말 못 한 것이 부끄럽다고요.”

-일반 장애인 시설도 창문이 창살로 돼 있습니까.

“정신장애인 시설의 창문이 창살로 되어 있는 건 시설 거주인이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것을 막으려는 목적이죠? 장애인 시설도 창문이 창살로 되어 있는지, 되어 있지 않는지 잘 모르겠지만, 되어 있지 않는다고 한들 흔히 하는 말로 ‘창살 없는 감옥’ 아닌가요?”

-정의당 장애인위원회에서 정신장애 어젠다를 개발할 수는 없을까요.

“저희 정의당 장애인위원회에 정신장애를 가진 당원이 소수이고, 저 역시도 신체장애인이기 때문에 그동안 정신장애인에 대해서 그동안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앞으로 정신장애인단체들과 <마인드포스트>와 소통하고 연대하겠습니다. 지금 생각나는 것은 ‘어떻게 정신장애인들의 사회 참여를 증진할 수 있을까’와 같은 건 어떨런지요?”

-신체장애와 정신장애 운동은 어떻게 결합되고 연대할 수 있을까요.

“신체장애인과 정신장애인은 서로 다른 부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양쪽 모두 비장애인 주류사회에서 억압과 소외받는 장애인이라는 것에 공통점이 있죠. 그래서 서로의 장애에 대해 학습하고 이해한 후 서로가 주장하는 사항을 공감하고 공유하면 되지 않을까요. 신체장애인 당사자와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기자회견이나 집회 등에 결합하고 연대한다면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박환수 정의당 중앙장애인위원장 (c)마인드포스트.
박환수 정의당 중앙장애인위원장 (c)마인드포스트.

-장애인차별금지법이 2007년 제정됐습니다. 장애를 바라보는 변화들이 있었다고 피부로 느껴지시던가요.

“글쎄요.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된 후 ‘대놓고 하는’ 직접적인 차별은 거의 사라졌다고 하지만, ‘은근하고 교묘히 하는’ 간접적인 차별은 지금도 많이 발생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요즘도 국가인권위원회의 장애 관련 진정 사건이 많이 발생하죠. 물론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된 후, 그전에는 그냥 참아왔던 것들이 이제는 차별이라고 인식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요.

어린이나 청소년이 매일 거울을 봤을 때는 키가 어제와 같다고 즉 자라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몇 달 후 혹은 1년 후에 훌쩍 커버린 자기 모습을 볼 수 있잖아요. 장애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도 몇 달 혹은 1~2년 사이에는 별로 변화된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10년 정도 지나고 보면 정말 많이 변화되었구나라고 새삼 느끼게 되죠.

제 경우를 들자면, 아주 어렸을 때는 어린아이들이 휠체어를 탄 저를 마치 동물원 우리 속에 있는 짐승마냥 쳐다보고요. 또 불쌍하다고 바라보는 눈빛으로 혀를 쯧쯧 차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있었지만요, 요즘은 그런 경우가 거의 없잖아요.

그리고 음식점이나 미용실과 같은 가게에서는 장애인을 자신의 상품 또는 서비스를 사는 고객으로 생각해야지, 동냥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다가는 큰일나죠.

그렇지만 엘리베이터에 뛰어가서 먼저 타는 어르신들과 지하철 휠체어 석에 떡하니 버티다 저 본 후에야 자리를 비켜주는 사람들이 보고 있으면, 우리 사회가 변화해야 할 게 아직 있구나라고 느끼게 되죠. 이것도 10년이 지나야 안 볼 수 있을까요?”

-장애인복지법 제15조는 정신장애인의 복지서비스를 막고 있습니다. 혹 이 법 제15조 폐지를 위해 신체장애도 같이 움직일 의지는 없습니까.

“죄송하지만 장애인복지법 제15조가 무슨 내용인지 잘 몰라서 인터넷으로 찾아봤는데요. 아마도 정신장애인을 치료가 필요한 정신질환자로 인식하고 있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네요.

신체장애 경우에는 자립생활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의료적 모델에서 사회적 모델로 전환되었지만, 정신장애 경우에는 아직까지도 의료적 모델이 팽배한 것 같아요. 일단 정의당 장애인위원장으로서 저희 당 의원들에게 장애인복지법 제15조를 개정하라고 건의하겠고요. 정신장애인 진영에서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같은 단체들과 접촉해 보시면 어떨까 하네요.”

-장애인이동권 투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장애계가 계속 운동을 지속하고 있습니까.

“2021년 현재도 ‘저상버스 법정대수 증차’, ‘고속버스 휠체어 리프트 설치 도입’, ‘세종시 장애인콜택시 공공성 강화’ 등의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세종시 장애인콜택시 공공성 강

화’ 투쟁은 약 100일 동안 이어지고 있습니다.”

박환수 위원장이 탁자에 뭔가를 손으로 쓰고 있다. 옆의 활동보조사가 그 내용을 이해하고 기자에게 설명을 해줬다 (c)마인드포스트.
박환수 위원장이 탁자에 뭔가를 손으로 쓰고 있다. 옆의 활동보조사가 그 내용을 이해하고 기자에게 설명을 해줬다 (c)마인드포스트.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장애인은 어떤 정치적 활동을 하고 있습니까.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는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맞이해 탈시설장애인당을 창당해 각 주제별 장애인 공약 1인 유세전을 하고, 각 당 서울시장 후보들과 장애인 정책협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희 정의당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정책 협약을 맺지 않았는데요, 전임 대표 성추행 사건이 일어나 반성한다는 의미에서 시장 후보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가 여기서 메일 답변을 멈췄다.

기자는 더 물어보고 싶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이유, 연극 연출자로 활동한 계기, 시설 봉사자가 바라보는 시혜적 시선의 불편함, 활동보조인이 퇴근한 이후의 지체장애인은 어떻게 나머지 시간을 견디는지, 세계는 당신의 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무엇보다 인간은 평등한 존재인가라는 그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서면 인터뷰에서 모든 답을 받을 수 없었다. 그 질문들을 중간에 멈춰야 했다.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기자는 시인 황지우의 시 구절을 떠올렸다. “나는 너다. 너는 나다. 우리는 전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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