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여리의 고백 2화] “나는 길을 잃었고, 기억을 잃었고, 가진 모든 것을 잃었다”
[박여리의 고백 2화] “나는 길을 잃었고, 기억을 잃었고, 가진 모든 것을 잃었다”
  • 박여리
  • 승인 2021.11.09 19: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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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마인드포스트 대표 메일로 글이 도착했다. 정신적 어려움이 가져온 날것으로의 세계의 폭력, 그 폭력에 대한 고찰, 살아가겠다는 선포가 어울려 있는 글이었다. 마인드포스트는 총 3회에 거쳐 당사자 박여리 씨의 고백을 게재한다.

 

이야기 4.

원장님은 내게 묻기 시작했다. 나이, 직업, 가족관계, 어릴 적 꿈 등. 원장님은 보호자 연락처가 필요하다며 할머니 연락처를 묻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펑펑 울음을 터트렸다. 일찍이 내게 질렸던 할머니는 그런데 자신을 갖다 붙이지 말라고 못 박아 둔 터였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끝까지 할머니 연락처를 말하지 않았다.

할머니를 제외한다면 연락이 끊긴 동생들과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이 가족의 전부였으므로 내게 보호자는 없는 셈이었다.

간단한 외래 진료를 마치고 팀장님과 함께 이곳에서 운영하는 함께신나는카페라는 곳으로 향했다. 평소에 내가 카페를 좋아하는 것을 알았던 서울의 주치의 선생님은 이곳에 카페가 있다며 내가 이곳에 적응할 수 있도록 귀띔을 해주었던 터였다.

카페는 아늑했다. 우드 계열의 디자인에 제멋대로인 테이블과 의자였지만 나름 편안한 분위기의 장소였다.

이곳에서 처음 아이스카라멜마끼아또를 먹고 나는 이곳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때의 기분은 마치 잘은 알 수 없지만, 곧 아주 많이 좋아하게 될 것 같은 그 무언가를 만났을 때의 감정이었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c)cafe.esp.br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c)cafe.esp.br

이곳은 특이한 점이 의사 선생님부터 간호사 선생님까지 모두 가운을 입지 않은 거였다. 모두 다 평상복이었다. 신기했다.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곳. 누가 환자이고 누가 치료진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고 팀장님과 함께 담쟁이라는 공동생활가정으로 향했다. 이곳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다 같이 한 가족처럼 생활을 하는 가정이었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함께 먹고 잔다는 의미에서 한 식구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의사도 간호사도 흰 가운을 입지 않은 곳에서 나는 울었다

처음 도착한 집에서 내 룸메이트는 곱게 생기신 어르신이었다. 우리 할머니보다는 나이가 어려 보였고 부모님이 살아계셨다면 그보다는 많아 보였다. 나는 그분께 인사를 드리고 팀장님이 제한한 이모라는 호칭보다는 그분의 이름에 ‘님’ 자를 붙여 부르기로 했다.

평범한 가정처럼 생긴 집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두 달 동안 고시원에서 사느라 평범한 집이 너무나도 그리웠기 때문이다.

이곳은 병원처럼 갇혀있는 곳도 아니고 고시원처럼 갇힌 거나 마찬가지인 곳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가정에 마음이 아픈 분들이 함께 살고 있는 곳이었다.

나는 이곳으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서울역에서 이곳으로 오지 않고 그대로 자살을 하기 위해 알 수 없는 곳으로 기차표를 사서 떠났더라면…. 아차 싶었다. 이제 할머니댁에 맡겨 둔 옷가지와 짐을 가지고 와서 전입신고를 하고 이곳에 살면 될 터였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앞으로의 시련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이야기 5.

공동생활가정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나는 서울의 할머니댁으로 향했다. 고시원에서 정리한 짐을 할머니댁에 맡겨놓았기 때문에 성남으로 짐을 가져와야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성남으로 향할 때도 꽤 아픈 상태였던 것 같다. 아이팟으로 음악을 듣다가 지하철 한가운데서 서글프게 울거나, 저녁 약을 먹고도 잠에 들 수가 없어 밤거리를 돌아다니다 침대로 돌아왔던 일 등, 조증이 일어나기 전 전조 증상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나를 일관성 있게 지속적으로 곁에서 관찰해 온 사람이 없었고, 거취를 옮기는 큰 스트레스 상황에 놓여 있었기에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되었다. 할머니댁에서 짐을 가지고 성남으로 가기 위해 탄 지하철에서부터 기억은 끊겨버렸다.

까만 밤 위로 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했고, 짙은 거리의 쓰레기 냄새가 선명하게 맡아졌으며, 초현실주의적인 장면들이 내 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멀쩡히 길을 걷고 있는데 한쪽 다리가 보이지 않았고, 거리에선 링거를 맞고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를 지나쳤으며 버스운전 기사는 이미 식어버린 관을 싣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핸드폰을 파는 아저씨들은 나를 보고 호객 행위를 했으며, 나물을 파는 아줌마는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과 내 망상 속의 시선들이 겹쳐져 처음 보는 장면들이 계속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말을 잃었고, 잠을 잊었다.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채로 나는 밤낮으로 길을 걷고 있었다. 어느 때는 한낮의 편의점에 있다가, 어느 때는 한밤의 도로 위 위험한 상황에 처해 경찰에 손에 붙들려 있었다.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렇게 위험천만하게 낮과 밤 사이를 무자비하게 방황하던 나의 끝은 역시나 강제입원으로 끝을 맺었다.

성남으로 가던 길에서 다시 강제입원

벌써 두 번째였다. 정신을 잃고 정신병원의 침대에 온몸이 묶이는 일 말이다. 응급입원은 자타의 위험이 있을 때 의사의 동의 하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번엔 또 어떻게 된 걸까?’ 눈을 떠보니 의사들은 내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내 머릿속에서 대답이 조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릿속으로는 서울에서 성남의 병원으로 가던 중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언어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없음. (c)amenteemaravilhosa.com.br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c)amenteemaravilhosa.com.br

그 순간 나는 와해된 언어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잠들다 깨어나기를 반복하며 나는 응급입원 3일의 시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정신이 조금 돌아온 나는 보호사 선생님께 내 짐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보호사님이 보여주신 내 짐은 당시 내가 입고 있던 청바지와 스웨터뿐이었다. 모든 짐은 발견 당시 없었다고 말씀해 주셨다. 할머니 댁에서 성남으로 가져가려 했던 그 모든 짐을 길에서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 순간 멍청한 나는 내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보다 몇 년간 모은 내 물건들이 없는 것에 더 크게 슬퍼했다.

물건을 확인한 뒤, 나는 하나씩 조각난 퍼즐들을 맞추어 가기 시작했다. 병동을 걸어다니며, 잃어버린 기억들을 맞추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머릿속은 마치 한차례 전쟁을 겪고 복구가 불가능하게 변한 황폐화된 마을 같았다.

어디서 뭘 어떻게 기억하고 연결해야 할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망상과 현실 속에서 위태로웠던 내게 시간은 마냥 주어지지 않았다. 응급입원 3일의 시간을 다 채우고 이제 다시 위험천만한 세상으로 나갈 시간이 된 것이다.

보호사 선생님은 신발을 잃어버린 내게 병원 슬리퍼와 양말을 주셨고, 서류에 노숙자라고 적은 뒤 삼천 원이 충전된 교통카드를 주셨다. 그러면서 나를 발견한 경찰서에 한번 가보라며 경찰서 위치를 알려주셨다.

그렇게 알려주신 경찰서로 향했지만, 역시나 나를 발견했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말을 하지 못했기에 지문을 찍어 신원을 확인하고 병원에 인계했다고 말했다. 그게 다였다.

나는 길을 잃었고, 기억을 잃었고, 가진 모든 것을 잃었다. 발견한 사람들도 치료를 한 사람들도 나도 내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 순간 철저하게 혼자라는 실감이 강렬하게 들었다.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그토록 죽음을 갈망했지만, 막상 죽음의 문턱에서는 죽지 않았다. 서울의 주치의 선생님은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다행입니다”라고 말했다. “정말 다행일까?” 나는 그렇게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성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삶으로의 향함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더 이상 죽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야기 6.

그렇게 낯선 성남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성남의 함께하는 공동체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공동체였다. 정신질환으로 인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다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마을 공동체.

언제나 혼자가 익숙했고, 혼자서 살아온 세월이 길었던 나는 처음에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밥을 같이 먹고, 같은 집에서 함께 잠을 자고, 서로의 일상을 나누는 일이 내게는 너무나도 낯설었던 것이다.

성남으로의 발걸음은 삶의로의 향함이었네

평범한 사람들과도 함께 지내면 갈등이 생기기 마련인데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들끼리 함께 지내면 의외의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곳은 ‘함께하는 정신건강의학과’라는 병원과 ‘함께신나는 카페’, ‘함께한상’ 이라는 식당, ‘담쟁이’라는 주거공간으로 이루어진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먹고, 자고, 놀 수 있는 공간들이 갖추어진 공동체였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c)franklincovey.com.br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c)franklincovey.com.br

공동생활가정인 ‘담쟁이’ 식구들의 대부분은 조현병을 앓고 계셨다. 그분들이 앓고 있는 조현병의 증상으로는 환청, 망상이 대표적이었는데 처음에 혼잣말을 하는 식구 한 분을 보고 굉장히 놀랐었다. 알고 보니 그 분은 환청이 있었고, 그 환청의 물음에 대답을 하느라 내게는 혼잣말을 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대개는 망상으로 현실과 다른 자신의 모습을 욕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욕망이 일반인과 다른 점은 일반인은 그 욕망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지만, 조현병 환자들은 그 망상을 자신의 실제 삶이라고 믿는다는 것이 차이점이었다.

하지만 뭐 어떤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 사람이 믿는 신념이 사실이 아닐 뿐이지 않은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였으며 그들에게 편견을 가질 명분이 내게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렇게 각자의 일상에 초대된 식구들은 서로의 증상을 보듬으며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해 나갔다.

‘담쟁이’ 에서 생활할 경우 병원의 ‘낮 병동’이라는 곳을 다녀야 했다. ‘낮 병동’은 주간 재활센터로 아침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정신질환을 치유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에 진행되는 곳이었다.

나의 하루는 ‘담쟁이’에서 자고, 주간에는 ‘낮 병동’에서 생활하고, 오후엔 카페에 가서 차를 마시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먹고, 자고, 배우고, 즐기는 삶. 혼자 살거나 고시원에 살았더라면 증상에 매몰되어 끝도 없이 나를 괴롭혔을 시간이었다.

서울을 떠나 처음 오게 된 낯선 곳이지만, 이 전에 내게 결핍되었던 부분들을 모두 채워준 곳으로 나는 이곳에 점점 잘 적응하고 있었다. 담쟁이 근처 성당을 찾아 미사를 드리고, 동네의 도서관을 찾아 회원등록을 하고 서울에서처럼 매일 도서관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이 시기 기억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돈이 없던 나는 휴대폰을 파는 대리점에 들어가 믹스 커피 하나를 얻어서 일회용 패트병에 커피를 넣고 도서관 정수기에서 찬물을 받아 아이스 라떼처럼 만들어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내내 마셨던 일이다.

공동생활가정의 구성원들은 증상을 보듬으며 내 결핍을 채워줘

의외로 수줍음이 많았던 나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지금은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일들을 했다. 그렇게 새로운 동네에 새로운 도서관에 정을 붙여가며 나는 이곳 생활에 잘 적응해 나갔다.

 

이야기 7.

나의 건강 상태는 몰라보게 회복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약을 먹고, 낮 병동의 주간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오후엔 카페에 들러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고 저녁엔 담쟁이에서 일기를 쓰며 잠드는 삶.

혼자 살았을 때, 고시원에서 괴로워하던 삶에 비하면 몰라보게 생산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c)horaminas.com.br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c)horaminas.com.br

이때 생긴 소중한 추억들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가장 기억나는 것들로만 예를 들어보자면, 어느 날 철학자 강신주 선생님이 성남시청에 강의를 오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평소 강신주 철학자의 팬이었기 때문에 나를 담당하는 사회복지사 선생님께 성남시청에 강의를 들으러 가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 나는 빠듯한 경제 사정에 처해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차비를 포함해 딱 오천 원만을 용돈으로 주시며 허락해주셨다.

나는 차비 삼천 원을 티머니 카드에 충전하고, 천 원은 캔커피, 천 원은 삼각김밥을 사서 버스를 타고 성남시청에 가서 강신주 철학자님을 실제로 보고 강의를 들었다.

강의가 끝나고 난 뒤에는 직접 뵙고 조울증을 앓고 있는데 선생님의 책을 읽고 많은 용기를 얻었다고 말하며 사인을 받았다. 선생님은 건강을 잘 챙기고 꼭 병원에 가라고 말씀을 해주셨다. 성남으로 왔기 때문에 경험한 기분 좋은 추억이었다.

또 한가지는 평소 인디 음악과 공연을 좋아하던 내가 돈이 없어 공연을 보러 갈 수 없었는데, 평소 좋아하던 밴드가 출연하는 공개방송에 사연을 보내 표를 얻은 일이었다.

추첨제였던 그 공연에 나는 내 사연을 메일로 썼고 사연이 당첨되어 공연의 표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나 그 공연은 나를 담당하는 팀장님과 함께 관람을 해서 굉장히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또 주말마다 나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마을에 어린이도서관밖에 없어서 어린이들과 함께 뒤섞여 책을 읽었던 일이다.

작고 귀여운 어린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책장을 넘기는 것을 볼 때면 너무나도 귀엽고 예뻤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도서관에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면 나와 방을 같이 쓰시는 어르신께서 저녁을 차려주셨던 기억이 난다.

공동생활가정에서의 삶은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시절

마치 자식처럼 끼니를 거르지 않게 챙겨주시고, 도서관에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드리면 항상 차를 조심하라고 말씀해 주셨던 것. 알게 모르게 나는 그 어르신을 의지하며 적응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나는 나만의 세계에 갇혀있던 시간을 지나 사람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하고 타인의 일상에 귀를 기울이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나의 일상으로 타인들이 드나드는 일은 의외로 기분 좋은 침범이었다. 나 또한 타인들의 일상에 긍정적인 추억으로 남기 위해 나라는 삶을 더 노력하고 싶어지는 마음마저 들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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