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여리의 고백 1화] “나는 아파서 왔는데 머물 수가 없는 곳이 정신병원이었다”
[박여리의 고백 1화] “나는 아파서 왔는데 머물 수가 없는 곳이 정신병원이었다”
  • 박여리
  • 승인 2021.11.08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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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마인드포스트 대표 메일로 글이 도착했다. 정신적 어려움이 가져온 날것으로의 세계의 폭력, 그 폭력에 대한 고찰, 살아가겠다는 선포가 어울려 있는 글이었다. 마인드포스트 총 3회에 거쳐 당사자 박여리 씨의 고백을 게재한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c)oabbutant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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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1.

가을의 서늘함을 느끼며 반짝반짝 빛나는 한낮의 거리를 걷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응급입원 당시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다행입니다”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은 정말 다행인 걸까? 하고 말이다. 지금의 내 삶은 조증이 재발을 할 만큼의 스트레스도 없고, 누군가 날 괴롭히지도 않는다. 경제적 어려움도 없고 그저 나 하기 나름인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가끔 생각하곤 한다.

극심한 조증이 재발했을 때 길에서 죽었더라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이런 잔인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것은 가끔씩 느껴지는 ‘비교’로 인한 좌절감 때문이다.

보통사람들이 평범하게 수행하는 생애주기의 다양한 일들이 내게는 주어지지 않을 때마다 그들의 삶과 나의 삶을 비교하며 비관하곤 하는 것이다. 마음먹기 나름이겠지만, 앓고 있는 지병의 증상으로 인해 삶에서 제한되는 것들이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나는 참 큰 오류에 빠져있다고도 볼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나 같은 극심한 조증을 겪지 않는다. 그런데 왜 나는 그들의 경험을 못 하는 것에 대해 개탄해 하는 걸까? 세상 모든 것들을 다 경험해야만 하는 걸까?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왜 모두 조울을 경험하지 않는 것일까? 라는 끝도 없는 물음이 계속된다.

어쩌면 지금의 나의 삶은 죽지 않고 살아서 주어진 행운일지 모른다. 거의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울증과 함께 남은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거의 알지 못한다. 누군가 알려줄 수도 없고, 또 다른 조울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삶을 들여다봐도 나와 다른 맥락을 살아온 사람의 삶을 무작정 따라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다행입니다”

내 경험을 기록해 두는 것이 누구나 참고할 수 있는 스테레오타입은 아니지만 적어도 다른 정신질환을 앓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작은 영감은 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마음에서다.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생존자로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누군가는 내가 험난한 삶을 살아왔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복에 겨웠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삶을 두고도 이렇게나 의견이 분분한 걸 보면 나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들을 필요가 있다.

내용이 정신질환이라고 해서 그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사람 자체가 온통 정신병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그저 나를 구성하는 수많은 것들 중 하나가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조울증일 뿐이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들을 놀래킬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정신질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잘 알지 못하는 것이 태도나 가치관이 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서로에 대해 모든 걸 경험하고 이해해 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불행하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의 조울증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야기 2.

스물여섯 해였던 것 같다. 동생들이 떠났다.

그 당시에 나는 내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의사 선생님의 말대로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생긴 우울증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이었던 것만큼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있는 거라고 굳게 믿었다.

부모님의 사망보험금으로 부양의무나 먹고 살기 위한 부담이 없었던 나는 마치 부모님이 없는 자리에 대신 생긴 어떤 대상처럼 우울증을 강렬하게 사랑했다. 공허하기만 했던 내게 그렇게 우울증이란 무엇이 찾아온 것이다.

침대 밖으로 두 발을 내려놓을 수 없었고, 일주일치의 약을 한 번에 털어먹고 삼일을 물만 마시며 침대에 누워있기도 했다. 매일 밤 악몽을 꾸었으며, 악몽을 꾸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악몽 없이는 잠들 수 없었던, 악몽이 두려워 잠들 수 없었던

악몽을 꾸는 것이 두려워 잠들기를 주저한 적도 많았지만 모두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비상시에 먹으라고 지어준 자낙스를 남용했고, 나는 어느새 새벽에 텅 빈 도로를 걷거나, 상점에서 립스틱을 훔쳐 친구에게 선물하거나, 한 여름에 털모자를 쓰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이상한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계절에 맞지 않는 옷들을 걸쳤으며 옷들을 레이어드(겹쳐입기) 하듯, 우울증은 다양한 감각으로 분쇄되어 상황에 맞게 나에게 기분이라는 이름의 행동과 태도를 입혔다. 심각한 조증은 1년에 1번, 엄마가 돌아가신 그 계절에 찾아왔다.

정신건강복지센터의 담당 선생님은 내가 엄마가 돌아가신 겨울에서 봄 사이에 조증을 앓는다고 말해주셨고 정확하게 스물여섯에서 스물아홉 동안 4번의 극심한 조증을 앓았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c)pt.depositphot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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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한 건, 보호자나 부양의무자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제대로 된 입원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정신건강복지센터의 선생님과 함께 병원에 가서 입원을 하면 나는 꼭 다음날 퇴원을 하였다.

병원이란 그런 곳이었다. 감정이라는 감각에 화상을 당해 진물을 흘리며 병원에 입원하면 그 상흔에 모래를 뿌리는 곳이 바로 병원이었다. 침대와 음식 모두 아픈 사람을 위한 곳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아파서 온 것인데, 치료를 받기 위해 온 것인데 도저히 머물 수가 없는 곳이 정신병원이라고 말하고 싶다. 의사 선생님은 말했다. 약을 조절하기 까지는 버텨보자고 말이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 정신병원의 입원 병동이라는 곳이 먹을 만한 음식이 나오고, 편안히 잠을 청할 수 있는 침대가 있는 곳이라면 내가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나왔을 리가 만무하다. 나는 가족의 동의 없이 퇴원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정신병원의 부당함에 대해서는 명징하게 남아있는 한 가지 기억이 생각난다. 의사의 동의 후 입원을 한 당일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CR룸 이라는 독방에 갇히게 된다.

그 당시 나는 신경이 모두 날이 선 것처럼 고통스러운 상황이었는데 바로 옆방의 환자가 밤새도록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온 신경이 다 할퀴어진 기분마저 들었다. 간호사님에게 일반병동에 입원하도록 되어 있다고 사정을 해 보았지만, 미친 개를 보는 듯했던 눈빛으로 다음날 의사가 오면 확인해 보겠다는 말뿐이었다.

화장실에 보내달라고 하자 초록색으로 된 오줌통을 독방에 던진 것 또한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난 다음날 의사가 와서 CR룸이 아닌 일반병실 입원이었다는 사실을 말하자 어젯밤의 그 간호사는 의사소통에 착오가 있었다며 사과를 요구하는 내게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다.

이런 일들이 반복된다고 생각해 보라. 제정신으로 그 정신병동 안에 입원할 수 있는 사람은 단연코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런 부당함들을 견딜 수 없었기에 자의입원 하루 만에 매번 병원을 뛰쳐나왔고, 병은 더욱더 악화되기에 이르렀다.

이야기 3. 

스물여덟, 정신을 차려보니 청량리정신병원에 사지가 묶여 있었다. 나는 정신이 들 때마다 간호사의 명찰의 이름을 읽고 간호사를 불렀다. 제발 풀어달라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어떨 때는 정신이 들고 어떨 때는 정신을 잃었다. 3일이 지나서야 나는 두 발로 설 수 있게 되었다. 응급입원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나는 죽으려고 욕실 하수구를 막고 물을 틀어 칼로 자해를 했다고 했다. 이를 발견한 집주인이 신고해 경찰과 구급대의 도움으로 응급입원을 한 것이었다. 응급입원은 3일이었고 강제였다. 나의 제대로 된 첫 입원은 기어이 강제로 이루어진 것이다.

입원 3일 동안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옷을 안 입고 있던 내가 옷을 입고 다시 묶이고 간호사들의 얼굴이 아른거리고 며칠 뒤 병실에 내가 서 있던 것 외엔 전부 기억이 없다.

정신병원 CR룸, 그 폭력의 기억…화장실 보내달라니 오줌통을 넣어줘

스물아홉, 의사로부터 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나는 그 당시에 우울증 외엔 정신질환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기에 미친 듯이 울며 날뛰었다. 웃기는 일이었다. 스스로 약물을 과다 복용하고 자해한 주제에 우울증에서 조울증으로 바뀐 게 뭐가 그리 대수인가 말이다.

정신이 언제까지 그런 학대를 견딜 거라고 생각한 건가? 나는 나의 멍청함에 치를 떨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뇌의 신경전달 물질의 불균형으로 인해 예상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차라리 암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암이었다면 개복수술로 절개를 하고 방사선 치료로 깨끗하게 없앨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걸린 병은 그런 병이 아니었다. 일단 그게 무슨 병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면 일들이 저질러져 있고, 제정신이 들면 나는 그 저질러진 일들로 인해 우울해지기를 반복했다.

여전히 혼자였다. 모두가 다 떠나버렸다. 가장 친했던 친구는 내게 시간을 갖자고 말했다. 자해 소동으로 인해 살던 집에서도 쫓겨나 고시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고시원에서의 생활은 건강을 악화시키기에 최고의 조건이었다.

조그마한 창문에 사방이 막힌 방음이 되지 않는 길거리에 누워있는 기분이었다. 매일을 울며 잠들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던 나를 보던 의사는 자신이 아는 병원에 입원을 권유해 입원을 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그곳에서도 자의입원으로 인해 퇴원을 하게 되었다. 막다른 길이었다.

나는 자살을 꿈꾸었고, 그것은 실행만이 남은 것만 같았다. 그때, 주치의 선생님은 성남에 집처럼 지낼 수 있는 곳이 있다고, 그곳에는 카페도 있다고 한다며 함께하는정신건강의학과라는 병원의 지도를 출력해주셨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c)exitoysuperacionperso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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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에서 짐을 정돈해 출력된 지도에 나와 있는 성남으로 가기 전에 나는 서울역에 들렀다. 평소 좋아하는 강신주 박사가 역에는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노숙자들이 머문다고 한 말이 생각나서였다.

나는 성남으로 갈지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죽을지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다. 수년간 병원에 질렸기 때문에 낯선 장소의 병원에 가서 또 다시 적응을 한다는 것이 내게는 상당한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서울역에 들러, 나는 결국 선생님을 생각해 한번 가보기라도 하자고 마음먹었다. 낯선 도시 성남에 도착해 지도를 보며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 도착해 진료실에서 처음 본 의사 선생님은 하얀색 가운을 입지 않은 검은색 등산복 차림의 수염도 깎지 않은 등산화를 신은 사람이었다. “정말 저 사람이 의사인가?” 복장에서부터 신뢰가 가지 않았다. 이때는 알지 못했다. 이 의사가 나라는 사람의 인생이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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