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독자 제위께 새해 인사 올립니다
[편집국에서] 독자 제위께 새해 인사 올립니다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2.01.04 19:0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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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포스트 기자 명함.
마인드포스트 기자 명함.

마인드포스트 독자 제위께

다시 한 해 시작됩니다. 어디 멀리 사람 없는 곳 강변에 앉아 홀로 저물어가며 깊어지는 강물소리 듣고 싶다고, 언젠가 제 지인에게 썼지요.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통곡의 벽’이 있다면 거기 가서 눈물 콧물 흘리며 실컷 통곡하다가 오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지요.

하지만 그건 다 마음의 소망일 뿐,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독자 제위께서는 올 한 해 계획은 세웠는지요. 우리 신문의 독자는 대부분이 정신장애인 당사자이거나 가족의 비율이 높겠지요. 그래서 아프지 말라는 말도 상처 같아서 할 수가 없습니다.

수해 전 아버지 돌아가시고 넉 달 전에 어머니까지 돌아가시면서 이제는 제 삶을 증거할 존재가 모두 사라져버린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건 슬픔을 넘은 어떤 황망함이었습니다.

정신장애인 당사자를 가족으로 두고 있는, 특히나 부모는 ‘내 새끼를 두고 어떻게 눈을 먼저 감을 수 있나’라고 탄식합니다. 그래서 내린 소망이 ‘나보다 내 자식이 하루 먼저 가는 거’라고 말하고는 합니다.

이 소망 자체가 슬픔이자 폭력이겠지요. 어떻게 나의 혈육이 자신보다 먼저 죽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정신질환에 대한 오랜 돌봄은 예기치 않게 이런 결론으로 맺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정신장애인 가족의 공통된 마음일 것입니다. 그 소망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바람이 아니라 이 악다구니의 세상에서 연약한 당사자가 살아가는 게 너무나 험하기 때문에 삶을 포기하도록 사유할 수밖에 없는 폭력적 죄의식을 갖게 만들어버립니다.

저의 선친 또한 자식의 오랜 정신적 고통을 바라보며 아파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내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냥 아파하면서 우는 것밖에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싸우고 서로를 미워하면서 서로를 안아야 했습니다.

정신장애인이 가족 내에서 천덕꾸러기가 되고 가족은 당사자를 미워하면서도 체념하듯 그의 삶을 껴안아야 합니다. 그래서 정신건강복지법에 나오듯 부양의무자의 역할뿐만 아니라 보호의무자의 책임까지 지게 만들었습니다. 국가가 책임져야 할 부분들을 빼버리고 가족에게만 그 형벌을 지웠던 것입니다.

최근 23년간 조현병을 가진 딸을 돌보다가 지쳐 살해한 친어머니가 특별사면됐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23년이라고 합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하는데 부모라고 그렇지 않을까요. 이 어머니는 ‘내가 죽고 난 다음에 딸이 세상의 냉대 속에 살도록 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딸을 자신의 손으로 살해했습니다.

그런데 눈에 띄는 건 대법원의 형량에 대한 양형 이유였습니다. 대법원은 중증정신질환자의 치료와 보호를 국가와 사회가 아닌 가족에게만 짐 지운 점에 비춰볼 때 이는 피해자만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우리 정신장애계가 오랜 시간 요구해온 ‘중증정신질환 국가책임제’의 문제의식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정신장애계는 이 국가책임제라는 사회적 의제를 위해 올 한 해 또 정치적 투쟁을 진행하겠지요.

국가책임제는 이처럼 제가 아버지와 단지 질병적 특성 때문에 싸움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개입해 일정 정도의 돌봄의 짐을 국가가 가져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무엇이 달라질까요. 가족이 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해 2월, 정신장애 단체들이 국민의힘 초선의원들의 '집단적 조현병' 발언에 항의해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c)마인드포스트 자료사진.
지난해 2월, 정신장애 단체들이 국민의힘 초선의원들의 '집단적 조현병' 발언에 항의해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c)마인드포스트 자료사진.

번아웃이 아니라 체력과 정신을 단련해 다시 내 아이를 껴안고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의 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바로 ‘내가 죽고 난 다음에 내 자식을 어찌하나’라는 고뇌를 국가가 위로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내가 떠날 때 국가가 아이를 지속적으로 돌볼 것이라는 확신은 ‘자식이 먼저 죽었으면’ 하는 도덕적 죄의식을 거둬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이 국가책임제 의제는 반드시 정치적 투쟁을 통해서 관철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의제는 우리가 가만히 있을 경우, 국가가 만들어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 황량했던 정신장애 운동. 신체장애는 자신들의 권리를 지하철역사에서 정당 앞에서, 국회 앞에서, 청와대 앞에서 요구해 올 때 정신장애의 정치적 세력은 전무했습니다. 몇 명의 정신장애인들이 정신병원에서의 개별적 부조리를 겪은 후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느슨하게 연결됐지만 실제적인 정치적 싸움은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1세기 초반 파도손과 한국정신장애연대 등이 선도적으로 조직을 만들었고 정신장애 의제를 국가에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22년 지금, 우리는 3개의 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세웠고 관련 조직들과 공적 단체들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희망이 보이는 걸까요.

국가 역시 정신장애인이라는 존재를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아직도 정신장애인을 대하는 공무원들의 시선에서 배제와 혐오를 느끼지만 이렇게라도 정치적 운동을 해야 인권의 외연이 확장되기 때문에 이 정치적 싸움은 점점 더 완강해지고 지속적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그 안에 <마인드포스트>도 작은 역할이나마 했다는 것이 위안을 가지게 됩니다. 더 좋은 세상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인류의 역사는 진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혹은 우리가 세상의 진보에 대해 알지 못하더라도 내 자식, 내 부모, 내 형제가 정신질환을 가졌다는 이유로 집단적으로 타자화되는 세상은 분명히 부조리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먼저 치유된, 생존한 이들이 이들을 대신에 정치적 투쟁의 자리에 서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정교한 이론과 정치한 노선 투쟁 등이 아니라 오로지 내 가족, 피붙이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가능한 투쟁인 것입니다.

최근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새로운경기도립정신병원이 인권을 접목한 치료 시스템을 시도하다가 정신병원 내 인권치료의 의미를 모르는 정치권과 기관들로부터 뭇매를 맞고 있습니다. 어떤 도의원은 “너희들만 인권 치료하냐. 너희들만 리커버리 지향하냐”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병원 직원 채용에 원장과 진료부장이 부당하게 개입했다며 이들을 해고하려 하고 있습니다. <마인드포스트>는 이 병원 원장과 직원에 대한 지지와 연대 의사를 밝혔습니다. <마인드포스트>는 어떤 경우에는 정치적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우리가 가는 길을 뒤따라올 또 다른 ‘나’인 ‘너’, 즉 정신장애인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우리 먼저 스스로 깨어져가며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타적 사유가 정신장애 운동 정신을 관통하는 것이 아닐까요. <마인드포스트>도 거기에 동참했고 동참해가겠습니다.

네. 이렇게 한 해가 다시 시작됩니다.

지난해 3월, 파도손 등 정신장애 인권단체들이 경기 수원시 경기도청 정문에서 새로운경기도립정신병원 치료 철학을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c)마인드포스트 자료사진.출처 : e마인드포스트(http://www.mindpost.or.kr)
지난해 3월, 파도손 등 정신장애 인권단체들이 경기 수원시 경기도청 정문에서 새로운경기도립정신병원 치료 철학을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c)마인드포스트 자료사진.출처 : e마인드포스트(http://www.mindpost.or.kr)

지인에게 보냈던 어디 먼 데 가서 홀로 울다 오고 싶다는 메시지. 물론 이뤄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거기 강변에서 울고 싶다는 것. 혹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있는 ‘통곡의 벽’처럼 우리에게도 그런 벽이 있어서 그저 가서 울 수만 있다면 저도 거기 가서 그렇게 통곡하다가 오고 싶을 뿐입니다. 물론 안 된다는 걸 압니다.

그런데 왜 나는 이토록 통곡하고 싶은 것일까요. 삶이 버거워서? 아니면 병과 싸우다 지나쳐 온 청춘이 아파서? 또 아니면 나를 증거해 줄 부모님이 이제는 세상에 안 계신다는 존재론적 쓸쓸함 때문에? 혹은 젊은 시절 한때의 열애의 기억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인간관계가 모두 허물어져버렸던 시절에 대한 사유 때문에? 아니면 이 세계에 대한 연민 때문일까요, 그리고 더 무엇이 있을까요.

정신장애라는 질병을 가진 작고 연약한 존재들을 보면 저는 그저 울고 싶어집니다. 어쩌면 여러분들도 그렇겠지요.

한 해 다시 찾아왔습니다. <마인드포스트>를 아껴주신 독자 제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한 걸음에 <마인드포스트>도 함께하겠습니다.

독자 제위 여러분. 한 해 소망한 것들 모두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정신적 질병으로 아파하는 모든 이들이 치유의 길에 서서 시간을 지나오며 단련된 눈길로 이 세계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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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2022-01-07 03:44:45
외국처럼 보호의무자 제도 자체를 폐지해야 합니다. 비자의입원의 결정을 공인이나 의료전문가가 아닌 가족(보호의무자)가 사실상 결정하는 이런 후진적 시스템을 없애야 합니다.

정신질환자의 자타해 방지 유의 의무조항도 마찬가지입니다. 없어져햐 압니다.

이는 단순히 가족뿐 아니라 당사자를 위해서도 그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