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된 은밀함, 정신병원 내 노동 착취...모든 정신병원을 개방화하라
강요된 은밀함, 정신병원 내 노동 착취...모든 정신병원을 개방화하라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2.04.12 20: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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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원환자들에게 노동 강요한 정신병원...병원측 “환자들이 하고 싶어 했다”
작업치료라는 이름으로 환자의 노동력 착취...정신병원 권력 속성 내재돼

입원한 정신장애인 환자에게 잡일을 시키던 전남의 한 정신병원이 인권침해 의혹을 받고 있다. KBC 취재에 따르면 이들 환자들은 병동 청소뿐만 아니라 식사 시간에 배식 담당까지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병원 측은 환자 스스로 좋아서 한 일이었다고 해명하는 한편 입원환자들은 강요에 의한 인권침해라고 주장했다.

정신장애인이 입원 병원에서 이른바 ‘작업치료’라는 이름으로 강제노동에 동원되는 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금도 지방의 정신병원들에서는 이 같은 노동으로 하루를 보내는 환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건 정신병원이 가진 태생적 한계인 폭력 공간이라고 생각한다면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오랜 기간 그것은 치료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돼 왔고 국가는 이를 묵인하거나 방치했던 결과물인 것이다.

정신장애인은 치료를 위해 입원하지 병동을 쓸고 닦기 위해 입원한 것은 아니다. 신체질환으로 입원한 환자가 해당 병동의 복도를 쓸고 닦는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신체질환자가 자기 병동을 청소하는 걸 봤다면 가족이나 보호자들이 가만있겠는가.

그러나 정신병원은 그것이, 그 행동들이 베일에 가려져 있고 보호의무자도 원하는 시간에 정신병원에 들어가 입원한 자식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폐쇄적이다. 아니, 폭력적이다. 병원의 ‘선의(善意)’가 아니면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곳. 그 정신병원에 입원하면 더 이상 소식을 알 수 없는 공간에 빗대 기자는 ‘정신병원에서 길을 잃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싶다.

들어가면 '함흥차사'처럼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사각지대. 그 공간에서 정신장애인이 어떤 폭력과 억압에 시달리고 있는지, 어떻게 그 억압을 내면화해서 정신과적 질환이 더 악화되는지 우리는 모른다.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정신병원의 폭력성. 그 억압과 폭력을 고발한 것은 정신병원에서 ‘생존해’ 돌아온 정신과 입원환자들이었다.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남편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던 한 여성이 있었다. 정신과 의사는 면담에서 남편에 대해 분노하는 그 여성을 향해 ‘분노조절장애’라는 딱지를 끊어줬다. 퇴원 요구는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그 여성은 퇴원하는 동료환자에게 쪽지를 건넸고 쪽지를 받은 여성의 변호사가 병원을 방문했을 때, 그토록 열리지 않던 정신병원의 퇴원 절차가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그녀는 ‘석방됐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도 병원의 훈육적 질서에 반항했다는 이유로 철제 침대에 사지를 묶인 채 하염없이 하얀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을 입원한 정신장애인들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덩치 큰 보호사들에게 대들었다는 이유로 아무도 지켜주지 못하는 공간으로 끌려가 신체 린치를 당하고 있는 이들 역시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인권은 공허한 목소리에 불과하다.

한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있었다. 그는 병원의 억압적 환경에 대해 병원장에게 항의했고 그 ‘덕분에’ 침대에 묶였다.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독자들은 그 공간에서 그가 어떻게 했다고 생각하는가. 저항했을까, 아니면 그들의 신체적 구속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였을까.

그 당사자는 그 보호사들에게 침을 뱉었다고 한다. 아무도 구원해주지 못하는 사각지대, 그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 공간에서 그가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한 일은 바로 보호사로 대변되는 치료 권력에 침을 뱉는 것이었다. 나는 존엄하다고, 내가 발언할 수 있는 권리를 왜 너희들이 가로막느냐고. 나의 육신은 침대에 묶이지만 너희들은 내 삶의 존엄을 침해할 수도, 억압할 수도 없다고.

기자는 그의 침뱉음에 대해 깊은 울림을 느꼈다. 보호받지 못하는 공간에서 그가 실존의 존엄을 위해 했던 그 연약한 행위. 그래서 그가 침을 뱉으면 보호사는 주먹으로 얼굴을 두들겨팼고 다시 침을 뱉으면 또 얼굴에 린치를 가했다. 그의 얼굴은 만신창이가 됐다.

그는 빼앗길 수 없는 인간의 존엄을 요청했던 것이다. 어느 누구도, 어떤 권력도 정신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가둠을 정당화할 수 없다. 그리고 잠시 잠깐 들어가 정신적 고통을 치료받아야 하는 이들에게 그 치료의 공간이 부조리하게 폭력적이라면 우리는 그 폭력의 공간을 향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침뱉음으로 존엄을 상징화했던 그의 저항이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면 그보다 못한 ‘작업치료’를 명목으로 한 불법적 노동과 강압적 지시들은 지금도 횡행하고 있을 거라는 건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곳. 그곳이 개방화되고 민주화되지 않는 이상 육체적 린치와 노동에의 강요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정신병원에 절차보조인이 들어가고 동료지원가가 들어가고 필요할 경우 지자체 공무원이 들어가고, 언제든 가족이 가면 만날 수 있는 공간. 그 공간이 보장되지 않는 한 나는, 우리는, 영원히 폭력의 자리에서 결코 치유받지 못한다.

한국형 정신병원에는 특이한 문화가 있다. 온돌 문화다. 침대 대신 넓은 공간에서 취침 시간에 군대에서나 사용할 법한 낡은 매트리스를 깔고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이를 접어서 한 곳에 쌓아두는 걸 의미한다.

그러니까 그곳은 취침에만 이용되는 공간이 아닌 일상과 깨어남, 잠듦, 훈육, 징계가 동시적으로 작동하는 저열한 공간이라고 말해야겠다. 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사회에서 그런 온돌형 병상을 갖고 있는 병원이 16%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국립서울병원이 국립정신건강센터로 직제와 명칭이 바뀌고 그 장소에서 병원을 새로 건립하려 했을 때 중곡동 주민들이 반대를 외쳤다. 그들은 지역 주민과의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한다. “병원을 어디 산 좋고 물 맑은 곳에 만들어서 정신질환자들이 거기서 치료를 받고 치유되면 된다”고.

그 ‘산 좋고 물 맑은’ 공간에 가기 위해 외래를 가는 정신장애인이 몇 시간이나 버스를 타야 하는지 그들은 모를 것이다. 알려고 하지도 않을 것임은 물론이다. 그저, 땅값이 정신병원 하나 때문에 떨어지고 있다는 자본에 대한 욕망이 그들로 하여금 국립서울병원의 전면적 이전을 요구하는 외침이 됐던 것이다. 부끄러운 줄 알라.

이번 사건은 분절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다. 이는 막혀 있고 통제되고 훈육적이고 의사의 정치적 신체가 곳곳을 감시하는 정신병원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기자는 감히 말하고 싶다.

청소를 시킨 해당 병원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환자에게) ‘하지 마세요’, ‘이 부분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라고 해도 이 분들(환자들)이 돌아서면 자기가 하고 싶으면 그냥 하시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있어 자신의 치료와 상관없는 청소를, 그것도 그 청소가 너무도 하고 싶어서 담당자나 보호사에게 ‘청소를 하게 해주세요’라고 읍소할 수 있을까. 이 경우, 정신병원에서의 치료는 무의미해진다. 다만, 그 병원 환자들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 외에는 없다. 생존자로 살아남아야 한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환자라면 더더욱 그 공간의 지배권력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담배 한 갑이라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정신건강복지법의 개정과 더 나은 정신장애 인권, 복지의 담론들이 나오고 있다. 기자는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시설의 모든 공간을 철저하게 개방하라고 요구한다. 함흥차사와 같은 그들 내부의 부당한 은밀성은 이제 한계를 넘어섰다. 전면 개방하라. 그 병원과 요양소의 작동 체계가 민주화될 때, 어쩌면 치료는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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