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강박증, 문고리를 잡고 울었던 시간들…“이 일상의 평범함과 소중함이라니”
어느 날 찾아온 강박증, 문고리를 잡고 울었던 시간들…“이 일상의 평범함과 소중함이라니”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2.05.06 17:5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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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자릴 복용 시 강박증 걸릴 확률 높아…기자가 직접 체험해
직업을 갖고 일을 시작하면서 강박 강도 낮아져…치유 통한 삶의 의미 확인
클로자릴 알약. 사진=매드인아메리카.
클로자릴 알약 © 2022 Mad in America Foundation

기자의 기억이 맞다면 정신과 약인 클로자릴(클로자핀)을 복용한 지 3~4년 지났을 때였다. 어느 날, 집을 나서야 하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자는 가스레인지 불이 꺼졌는지, 그 밸브가 잠겼는지, 화장실 물을 내렸는지, 형광등은 꺼졌는지, 세면대 물은 잠갔는지, 재떨이의 담배꽁초 불이 꺼졌는지, 창문은 잘 잠겼는지, 심지어 신발이 가지런하게 정리됐는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 행동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수십 번 반복됐다. 기자는 가스레인지 밸브를 직접 손으로 만지며 “잠겨 있어. 잠겨 있다고”라고 중얼거렸다. 형광등 점멸도 확인하면서 “꺼졌어. 꺼져있다고”라고 나직이 말했다.

고통스러운 건 집을 나가기 위한 ‘의례’ 중 가장 나중의 것, 바로 현관문의 잠금에 대한 확인이었다. 겨우 방을 탈출해 나왔지만 복병처럼 최후 관문인 문으로부터의 탈출은 더 긴 시간이 걸렸다.

분명히 열쇠로 잠갔지만 기자는 문 앞에서 문고리를 계속 돌리며 “잠겨 있어. 잠겨 있어”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겨 있다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잠겨 있잖아. 봐봐, 문고리를 아무리 돌려도 잠겨 있으니까 문이 열리지 않지? 그렇지? 잠겨 있어. 그러니까 돌아서서 집밖을 나서면 되는 거야.

어떤 정신과 전문의는 이 강박의 해결책으로 “불안을 안은 채로 현장을 벗어나라”고 조언했다. 문이 잠겼는지, 가스 불이 꺼졌는지, 형광등이 꺼졌는지, 세면대 물꼭지가 잠겼는지 같은 끊임없는 의심에 눌려 현실적인 질서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냥, 나가라. 그 말이었다.

물론 기자도 해봤다. 현관문을 잠근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5층에서 1층으로 불안을 안은 채 뛰어내려갔다. 불안의 탄력성이라고 해야 할까. 1층에 내려온 그 순간, 의식은 집에 대한 불안과 의심, 두려움이 더 강하게 밀려왔고 기자는 다시 헉헉거리며 5층으로 뛰어올라가야 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그 임대주택에서 5층까지 올라갔다가 내려가기를 수십 번 반복하면 진이 다 빠져버린다. 어느 날은 잠긴 문고리를 잡고 소리 없이 울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웠다. 다시 집을 나서야 하는 ‘과업’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심할 때는 집안 내부의 질서를 다 확인하고 현관문을 열고 지상 1층으로 내려가 지하철을 타러 가는 시간이 2시간 가까이 걸릴 때도 있었다.

한번은 심리적 불안을 안고 지하철역까지 갔지만 불안은 누그러들지 않았고 기자는 다시 지하철 개찰구를 나와서 집으로 뛰어간 적도 있다.

왜 이런 강박증이 생긴 걸까. 어떤 이들은 생애의 한 시점에서 자신도 알 수 없게 강박이 생긴다고 했다. 이후 기자는 정신과 전문의로부터 ‘클로자릴’을 오래 복용하게 되면 그런 강박 현상이 생긴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물론 기자는 그 약을 복용하기 전에 이 약을 오래 먹으면 ‘강박증이 생긴다’는 사전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다. 물론 담당 의사도 그런 얘기를 해 준 적이 없다. 어쨌든 좋다. 아니, 괜찮다. 강박증이 생기니 당신은 앞으로 정신과 약을 먹지 말고 감기약을 먹으라고 의사가 권할 수는 없지 않은가.

수많은 정신과 약 중 기자의 특성과 심리적 안정에 가장 적절한 약이 클로자릴이었고 그렇다면 그 약의 부작용에 대해 의사가 말해주지 않았다고 해서 의사를 나쁘게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제는 집안에서 나가고 현관문을 ‘탈출’해 나가는 과정을 다 거친다고 해서 다른 모든 행동의 오류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릴 때면 내가 앉았던 자리를 계속 눈여겨봐야 했고, 앉아 있던 자리로 가서 아무것도 없는 그 의자를 손으로 만지고 비비면서 스스로에게 “자, 여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내리자”라고 속으로 말하고는 했다.

사진=픽사베이.
클로자릴 복용 시 강박증 걸릴 확률이 높다. 이는 기자가 체험한 것이다.

혹은 아이스 커피를 사서 편의점 벤치에 앉아 다 마시고 일어서 갈 때, 기자는 100미터를 갔다가 다시 돌아와 앉아 있던 벤치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고, 다시 100미터를 갔다가 돌아와 아무것도 없는 벤치를 어루만졌다.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다는 걸 눈은 확인했지만 마음과 행동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때로는 담배꽁초를 길거리에 버렸는데 혹시 불이 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 때문에 길을 걸어가다가 현장으로 돌아오고를 수십 번을 한 적도 있다.

도서관에서 강박증과 관련된 몇 권의 책을 읽었지만 그 원칙은 하나였다. ‘지금 행동하는 걸 당장 멈추라’는 것이었다. 현관문을 수십 번 확인하고 있는 그 순간의 행위를 그대로 멈추고 돌아서라는 조언은 너무도 옳은 치료적 방편이었지만 그에 대한 고무줄 같은 현실의 반발력은 행위의 멈춤보다 10배나 강했다. 그러니 기자는 지하철로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기자는 2018년부터 <마인드포스트>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박은 기자가 취직을 했다고 해서 선물처럼 사라져주지는 않았다.

여전히 기자는 집안에서, 현관문 앞에서 길을 잃은 자처럼 수십 분을, 아니면 한 시간을 서성였다. 병은 알리라는 속담에 혹시 치료법이 있나 싶어 지인과 동료들을 만나면 “나, 오는 현관문을 한 80번 확인했어”라고 웃으며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강박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어쩌면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정신장애로부터의 회복은, 그 가치를 어디에 두냐에 따라 갈라질 수도 있지만 기본적인 것은 우리가 인간이고,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노동과 수렵을 통해 살아왔다는 걸 전제할 때 인간은 우선은 노동하는 존재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의 의미와 가치가 훼손됐지만 인간은 노동을 하는 존재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에 대한 임금이 지불되는 시스템 안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기자 역시 그렇다. 일을 하고 비록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노동의 대가를 받았다. 그 돈으로 기자는 먹고 싶은 것을 사 먹기도 하고, 담배도 사고,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고, 집에 라면을 사 두기도 한다. 돈이 있으니 그렇게라도 소비를 하면서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정신장애인 자식을 둔 부모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아들이(혹은 딸이) 회사에 나가 일을 하고 오니까 너무나 기분이 좋다”고. 중증 질환으로 인해 하루에 4시간밖에 일을 하지 못하더라도 우선은 일이 있어 노동을 하는 것에 어느 부모가 감사해하지 않을까. 게다가 그 일의 대가로 월급까지 받아온다면, 그건 어쩌면 생애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작은 선물일 것이다.

노동을 이야기한 이유는 기자 역시 그런 노동의 과정을 통해 강박을 이겨내왔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다. 어느 날, 원치 않게 강박이 찾아왔는데 다시 어느 날, 조금씩 강박이 내 삶에 개입하는 힘을 잃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 깨달음을 얻는 데 10년이 넘게 걸린 것 같다.

사진=픽사베이.
직업을 갖고 일을 시작하면서 강박 강도는 낮아졌다.

강박을 치유해가는데 여러 가지 장치들이, 문법들이, 조언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자에게는 노동이, 아침에 나가고 저녁에 돌아오는 그 일상적 과정이 치유로 가는 여정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지금, 기자는 집밖을 나서는, ‘탈출’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한 10분 정도 걸린다. 빠를 때는 5~6분이 걸리기도 한다. 강박이 심할 때는 물건을 직접 손으로 만져가며 “꺼졌어, 잠겼어, 비웠어”라고 말했다면 이제는 눈으로만 집안의 질서를 확인하게 된다. 지금 하는 행동을 당장 멈추라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이다.

기자는 방의 질서를 확인하고 현관문을 잠그고, 뒤돌아서서 계단을 내려온다. 한번은 그 강박으로부터 치유로의 나아감이 감사해서 현관문을 잠그고 돌아서 계단을 내려오며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원치 않은 강박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특히 집안의 물건을 버리지 않고 쌓아두는 저장강박증을 안고 사는 이도 많을 것이다.

오늘자 신문들에서 기자는 ‘저장강박증’에 빠진 주민을 위해 지자체가 집을 방문해 청소를 해주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저장강박은 당장 버려야 할 불필요한 물건이지만 언젠가 사용될 때가 있을 거라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해 집에 쌓아두는 행위다.

한때 지자체 행정복지센터에는 집안에 쓰레기더미를 저장하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집 안팎의 청소를 진행해주었다. 하지만 당장은 깨끗해졌지만 그 주민은 다시 물건들을 집에 쌓아두기 시작했고 집안은 버리지 못한 쓰레기들도 원상복귀됐다.

이후 지자체는 이들에게 물리적이고 청결성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게 된다. 정신과적 상담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이 사례관리에 정신건강복지센터도 함께하고 있다.

사람들은 묻는다. 강박이 뭐냐고. 그건 치유가 뭐냐는 질문만큼 난해하다. 다만 기자는 강박이라는 고통의 벽을 조금씩 넘어가다보면 조금씩 살아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느낄 수는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한다. 그건, 일상의 평범함이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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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민우 2022-05-09 21:47:39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