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쓰고 우리는 낙인찍힌다...언론은 정신장애인의 ‘낙인화’를 강화해온 권력의 동조자들
당신들은 쓰고 우리는 낙인찍힌다...언론은 정신장애인의 ‘낙인화’를 강화해온 권력의 동조자들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3.02.22 20: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매일경제, 방치된 정신질환자는 위험하다는 기사 발행
잊을 만하면 흘러나오는 정신장애인 대상의 폭력적 기사쓰기 멈춰야
국가책임제는 존엄의 옹호이지 결코 격리와 관리 의미가 아냐
지난해 10월 마인드포스트 옴부즈만센터 회원들이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언론의 정신질환 편견보도 규탄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음. (c)마인드포스트 자료사진.
지난해 10월 마인드포스트 옴부즈만센터 회원들이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언론의 정신질환 편견보도 규탄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음. (c)마인드포스트 자료사진.

또 하나의 ‘헛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신장애인을 격리하고 관리하는 게 국가책임제라고 오도해 이를 기사화한 것이다.

지난 15일 매일경제 인터넷판은 ‘방치된 정신질환자…모두가 위험해진다’라는 제하의 기사를 발행했다(기사 읽기_클릭하면 연결됩니다). 기사는 조울증을 앓는 30대 당사자가 스토킹범죄 혐의로 법원의 접근금지 처분을 받았고 제주도에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가진 술에 취한 20대 남성이 행인을 돌덩이로 내리치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이어 경기 용인시에서 정신응급 상황의 정신장애인을 경찰관들이 병원 이송 과정에서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처럼 정신질환자에 의한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정확한 실태조사와 보호 시스템은 미비한 상황”이라고 의견을 밝혔다.

용인 사건은 정신응급 상황의 40대 남성이 구급 차량 안에서 앞 수갑이 채워진 채 몸부림쳤고 이에 경찰이 과도하게 제압하고 배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는 상황에서 심정지가 발생해 사망한 사건이다.

그런데 여기에 왜 “정신질환자에 의한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일까.

정신응급 상황의 당사자(환자)가 괴로움에 몸부림을 친 지극히 사적인 고통에 대해 침묵하면서 이송 경찰의 과도한, 혹은 위법한 제압에 의한 죽음을 마치 정신질환 당사자가 잘못해서 사망한 것처럼 오도하게 했는가 말이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정신질환이 뭔지 알기는 할까. 그는 정신질환자는 망상, 기분의 장애로 독립적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제약이 있는 사람이라는 정신건강복지법 상의 정의를 전제로 “여기에 조울증, 우울증 등을 앓고 있는 환자도 포함된다”고 적었다.

조울증의 의학적 질병명은 양극성정동장애이고 정신건강복지법상의 우울증은 일반적 우울증세가 아니라 ‘중증우울증’을 의미한다.

기자가 ‘우울증’을 강조해 일시적이고 지속성이 약한 우울을 겪는 전 국민을 다 우울증 환자로 분류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기자는 정신질환자는 위험하다는 명제에 기대 기사를 작성했고 정신질환자가 관리돼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 정보를 오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부가 관리에 손을 놓을 경우 고 임세원 교수 사망 사건과 안인득 방화 사건 같은 참사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사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여기에 다 담겨 있다.

그래서 부제목에도 “국가 책임지고 관리자 늘려야”라고 적었고 본문에는 “국가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정신질환자는 위험하다. 사고를 친 그는 정신질환자이다. 그러므로 모든 정신질환자는 위험하다’라는 낡은 삼단논법에 의거해 모든 정신의 고통을 ‘위험성’으로 분류해 버리는 이 자신감이라니.

한국사회에서 정신장애인은 공동체의 주변부에서 배제된 채 고립된 삶을 살아야 했다. 그 고립의 원인을 기자들이 분석해본 사례가 있을까. 그것 없이 사건사고의 범죄자 중 소수의 어떤 이가 정신질환을 갖고 있었다면 이를 확대해 정신질환자는 모두 중대한 사건사고를 일으킨다는 논리로 전환시켜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당신들, 무지한 기자들이 만들어 놓은 정신질환과 범죄의 문법이었다.

지난해 9월 20일 정신장애인이 강제입원 과정에서 사망한 사건에 대해 경찰의 철저한 조사와 가해자 엄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용인동부경찰서 정문에서 진행됐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음. (c)마인드포스트 자료 사진.
지난해 9월 20일 정신장애인이 강제입원 과정에서 사망한 사건에 대해 경찰의 철저한 조사와 가해자 엄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용인동부경찰서 정문에서 진행됐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음. (c)마인드포스트 자료 사진.

정신장애인들이 왜 공동체 바깥을 배회해야 하는지, 왜 집도 없이 부유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 국가가 어떤 도움과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지, 이들이 왜 개인적 고통에 더해 사회적 낙인까지 짊어진 채 살아가야 하는지 기자, 당신은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고작 몇 개의 사건사고를 갖다 붙여서 정신질환자는 위험하니 ‘국가가 책임져라’라는 무식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당신의 무지한 용기를 내가 칭찬해야 할까. 그런 기사라면 3류 기자인 나도 수백 개는 쓸 수 있겠다.

국가책임제는 국가가 정신질환자를 솎아내서 정신병원으로 보내 감금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 책임제는 정신장애인의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국가가 어떻게 지원하고 도와야 하는지를 담은 국가행동계획이다. 무식한 이 기자는 국가책임을 엉뚱하게 국가의 폭력적 개입을 요청하는 식으로 오도한 셈이다.

정신응급 상황이 오면 사설구급대원에 의해 밧줄로 손발이 묶인 채 정신병원으로 끌려들어가야 하는 폭력적 응급 시스템을 국가가 공적 책임하에 안전하고 존중되는 입원 시스템을 만들자는 게 국가책임제이고 정신장애인 당사자를 돌보느라 정신적으로 소진된 가족에게 국가가 돌봄과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자는 것이 국가책임제이고 정신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직업재활을 하고 안전한 거주공간을 갖고 언제라도 정신건강 서비스 체계 안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가게 국가의 역할을 고민하는 개념이 바로 국가책임제이다.

무식한 이 기자는 그런 인간 존중의 책임제도를 엉뚱하게 ‘격리와 강박’을 옹호하는 방식으로 읽히게 기사를 작성한 것이다.

이 시선은 지난해 6월, 성일종 국민의힘 의원이 “임대아파트에 정신질환자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발언과 겹친다. 성 의원은 임대주택이 거주환경이 사회 문제가 된다면서 “그분(정신질환자)들을 격리하는 조치들을 사전적으로 하지 않으면 국가가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이는 이 기자가 조울증, 우울증, 안인득 사건, 임세원 교수 사건, 스토킹범죄,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심한 우울증 등 사건과 정신질환 유형을 열거하면서 “관리가 되지 않는다”, 혹은 “관리도 미흡하다”는 식으로 상황을 설명한 것과 같은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이 기자는 “국가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는 자신의 소망을 허구의 대중 의견에 기대 기사화한 것이다.

‘관리’는 돌봄의 의미보다 치안의 의미가 강한 개념이다. 정신장애인이 위험하다는 선입견. 그래서 이들에 대한 돌봄보다 사회적 안전을 위한 치안적 관리가 정신보건의 선제적 행위가 된다. 언론은 늘 그 논리에 편승해 왔다. 정신질환자 한 명이 사고를 치면 나머지 10만 명을 가두라는 외침. 그것이 그간 언론이 펼쳐온 정신장애인의 낙인화다. 왜 언론은 반성하지 않는가.

미국과 호주, 영국 등에서는 정신장애인이 설사 사건을 일으켰다고 해도 기사 제목에 정신질환명을 표기하지 말라는 언론보도 가이드라인이 있다. 이 가이드라인에는 ‘정신장애인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라’, ‘정신장애인이 사회적 약자임을 전제해 취재하라’, ‘질환에 대한 과학적 결론이 나오기 전까지 절대 추정적으로 정신질환명을 기사화하지 말라’, ‘정신질환자는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될 확률이 높다는 점을 늘 감안하라’ 등의 요구들이 취재 범주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

여기까지 요청하지는 않겠다. 그러기엔 아직 한국사회 정신질환 보도유형이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의료적 시선이 더 강하고 언론이 기대는 곳이 바로 이들 의료권력 세력이기에 그렇다.

그래서였을까. 매일경제 이 기자는 기사에 정신과 의사와 가족협회 관계자의 발언은 실었지만 그 어디에도 정신장애인 당사자에게 물어본 흔적이 없다. 애초에 이 무지한 기자는 정신장애인이 공적 발언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나는 그렇다고 본다.

기자에게 정신질환자, 혹은 정신장애인은 사건사고의 주체이지 공적 담론의 발화 주체는 아니었다. 부끄러운 줄 알라.

정신장애인 당사자 활동가들이 정신장애 환자 응급 이송 과정에서 사망한 경위를 밝히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음. (c)마인드포스트 자료사진.
정신장애인 당사자 활동가들이 정신장애 환자 응급 이송 과정에서 사망한 경위를 밝히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음. (c)마인드포스트 자료사진.

그래서 정신장애인이 정신병원을 허락 없이 나온 행위에 ‘탈출’이라는 제목을 뽑고 경찰은 비상 사태로 상황을 인식해 ‘검거’에 나서고 혹여나 이탈 환자가 발견되면 ‘체포’ 혹은 ‘검거’라고 무지막지하게 기사 제목으로 쓰는 것이리라. 정신병원이 교도소인가.

정신질환은 아픈 것이다. 아프고 괴로운 상태다. 거기에 왜 언론이 앞장서서 위험하고 불결하고 추한 존재로 정신장애인을 낙인찍는 데 앞장서고 있나. 기자는 정신장애인의 목소리를 들으라. 그 안에 고인 아픔을 느끼고 당사자의 시선에서 세계를 해석해보라. 과도한 요구인가. 그렇다면 한국사회 정신장애인의 표상은 여전히 ‘폭력’과 ‘낙인’의 코드로 작동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저 기자의 ‘헛소리’는 너무나 아프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