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언니의 책방] 슬플 땐 절대순수가 필요하다
[삐삐언니의 책방] 슬플 땐 절대순수가 필요하다
  • 이주현 기자
  • 승인 2023.03.03 18:17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삐삐언니의 책방 ⑭ 비에도 지지 않고 

미야자와 겐지 글, 야마무라 코지 그림·엄혜숙 옮김, 그림책공작소

새해 들어 고단한 날들이 이어졌다. 1월 초 마침내, 대한민국 3000만 명이 걸린 코로나에 걸렸다. 며칠 동안 호되게 앓았다. 밥 먹고 약 먹고 줄곧 잤다. 외출 금지였으니 머리를 감을 필요도 없었다. ‘합법적 폐인’으로 살았다. 

우울했다. 코로나도 코로나였지만 내가 다니는 회사에 큰 어려움이 닥쳤기 때문이었다. 널브러져 있던 중 택배 알림 문자가 왔다. 언니가 그림책을 보내온 것이었다. 백희나 작가의 <이상한 엄마> <연이와 버들도령>. 

<이상한 엄마>는 워킹맘을 위로하는 동화다. 어린 아들 ‘호호’가 열이 나서 학교를 조퇴했는데 사무실에서 일하던 엄마는 당장 달려갈 길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른다. 그런데 어쩌다 엄마의 전화를 받게 된 ‘선녀님’이 엄마 대신 호호를 돌봐준다는 얘기였다. 선녀 옷을 입은 ‘이상한 엄마’가 끓여주는 달걀국을 먹으면서 호호는 곤히 잠든다. 아마도 언니는, 혼자 격리된 동생에게 뜨거운 수프를 끓여주고 싶어 <이상한 엄마>를 보내줬던 것 같다. 

전래동화 <연이와 버들도령>은 심술궂은 어른에게 학대받는 소녀 연이가 자신을 도와준 초인적 존재 '버들도령'의 목숨을 구한다는 스토리다. 어릴 적부터 들어 다 아는 내용인데도 눈물이 똑, 떨어졌다. 연이가 버들도령을 살린 ‘살살이꽃’ ‘피살이꽃’ ‘숨살이꽃’이 현실에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소중한 가치가 불타버린 폐허에 살이 돋아나고 피가 돌고 숨을 불어넣는 그런 보물을 상상 속에서 꿈꿔보았다. 

미야자와 겐지(지은이), 야마무리 코지(그림), '비에도 지지 않고', 엄혜숙 옮김, 그림책공작소, 2015.
미야자와 겐지(지은이), 야마무리 코지(그림), '비에도 지지 않고', 엄혜숙 옮김, 그림책공작소, 2015.

언니로부터 받은 책을 읽은 뒤 내친김에 또 다른 동화책을 주문했다. 일본의 동화작가 미야자와 겐지(1896~1933년)가 쓴 시 <비에도 지지 않고>에 그림을 곁들인 책이었다. 

일본 이와테현에서 전당포를 하는 아버지를 둔 미야자와 겐지는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나 자랐으면서도, 죽어라 일하면서도 늘 굶주리는 주변 농민들의 궁핍한 삶을 잊지 않았다.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쌀 소출량을 늘리기 위해 비료를 개발하고 새로운 농업기술을 시도한다. 그러나 장마와 냉해로 모두 실패하고, 돌아오는 것은 외로움뿐이었다. “부잣집 도련님 나으리, 꽃으로 밥을 지을 순 없답니다.” 가난한 이웃들은 하늘에 이마를 올려놓고 사는 것 같은 이상주의자 미야자와 겐지를 조롱했다. 

더욱이 미야자와 겐지가 살았던 때는 일본에 군국주의적 분위기가 짙게 드리운 시기였다. <비에도 지지 않고>가 쓰인 1931년은, 일본이 대륙을 노리며 민주사변을 일으킨 해였다. 전쟁의 광풍이 불며 사회 분위기는 더욱 위축됐다. 평화주의자 미야자와 겐지가 설 곳이 없었다. 작가로서도 미야자와 겐지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생전에 책 두권을 자비로 출판했는데 열권도 안 팔렸다고 한다. 

결국 미야자와 겐지는 영양실조, 폐결핵으로 37살 젊은 나이에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동화와 시, 메모 등 그가 남긴 원고는 후일 그 가치가 재발견되며 주목을 받았다(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원작인 <은하철도의 밤>은 수십 년 동안 사랑받는 베스트셀러다)

정말 이런 순수한 인간이 있단 말이야? 의심스러워진다면 <비에도 지지 않고>를 읽어보라. 너무나 이타적이어서 ‘바보’ 같았던 미야자와 겐지의 삶 그 자체니까. 

비에도 지지않고

바람에도 지지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건강한 몸을 가지고

욕심은 없고

절대로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웃고 있는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야채 조금을 먹고

여러 가지 일에 자신을 계산에 넣지 않고

잘 보고 듣고 이해하고

그리고 잊지 않고

들판의 소나무 숲 그늘의

조그마한 이엉 지붕 오두막에 살며

동쪽에 병든 아이가 있으면

가서 간호를 해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가 있으면

가서 볏단을 져 주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말라 달래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시시할 뿐이니 그만두라고 말리고

가물 때는 눈물을 흘리고

찬 여름에는 허둥지둥 걸으며

모두에게 얼간이라 불리고

칭찬받지 못하고

근심거리도 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네

기도문을 읽듯 천천히 낭독했다. 여러 번 낭독했다. 몽실몽실하고 따뜻한 어떤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음 저 깊숙한 곳에서 용기,라고 불러도 좋을 어떤 느낌이 피어올랐다.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를 쓴 삐삐언니가 매달 첫째 주에 <마인드포스트> 독자들을 만납니다. 조울병과 함께한 오랜 여정에서 유익한 정보와 따뜻한 위로로 힘을 준 책들을 소개합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이지원 2023-03-05 21:28:12
저는 동화책 가시고기를 감동적으로 읽었어요 동화책도 좋은것 같아요.요번 기사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