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탈된 권리를 찾아서...당신은 정신병원 폐쇄병동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해 본 적이 있나요?
박탈된 권리를 찾아서...당신은 정신병원 폐쇄병동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해 본 적이 있나요?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3.03.30 2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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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병사들도 일과 이후 스마트폰 사용 가능해져...국방부는 전면 허용 시범사업 중
자유가 일정 정도 박탈되는 군에서도 사용되는데...정신장애인은 복합적 차별
정신장애인은 폐쇄병동 공중전화기도 사용 못해...인권위, 검찰에 해당 병원 고발
정신보건법 제정 후 30여 년...아직 변하지 않은 권력의 시선들 작동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사진=연합뉴스]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사진=연합뉴스]

1992년 여름 무렵이었다. 김형우(가명·52) 씨는 충남에 소재한 을씨년스러운 정신요양시설에 입소했다. 잦은 정신병원 입원으로 병원비를 감당하기 어렵게 된 가족 중 누나가 ‘어디어디로 가면 월 5만 원에 먹이고 재워준다더라’라는 풍문을 듣고 형우 씨를 그곳으로 보낸 것이다.

입소 이튿날이었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100여 명이 환자들이 오전 작업을 하러 나갔다. 풀 뽑기 작업이었다. 그런데 시설 한쪽 방에 반장으로 불리던 보호사가 잠을 자고 있었다. 형우 씨는 그에게 “반장님은 일 안 하세요. 주무세요”라고 물었다.

그 순간, 보호사는 형우 씨를 향해 따귀를 때렸다. 반장은 욕설을 걸쭉하게 뱉어냈다. 형우 씨는 그때 느꼈다고 한다. “아, 내가 잘못된 곳에 들어왔구나.”

삼 년 넘게 그곳에 갇혀 살던 그는 스트레스가 극에 이르자 가위로 자신의 배에 생채기를 내면서 내보내 달라고 시설 측에 요구했다. 얼마 후 그는 그곳으로부터 ‘석방됐다’.

그곳을 나온 후에 누나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자기 입소 후 1주일 지나서 면회를 갔는데 시설 보호사가 형우 씨가 정신적으로 어려움이 심하니 안정을 위해 면회가 불가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한 달 후에 찾아가도 같은 답변이었다. 형우 씨는 생각도 못 했던 일이었다.

형우 씨는 시설을 나온 후 좀 더 안정적인 지방의 국립병원으로 옮겼고 그의 말대로 그곳에서 “살이 찌기 시작했다.”

정신보건법도 제정되기 훨씬 전인 그 시절, 어쩌면 많은 정신장애인들이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치료가 아닌 권위에 대한 굴복과 강압적인 질서에의 편입, 대화 없는 닫힌 창 안에서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기자는 2009년 봄, 정신병원에 있었다. 정신보건법이라는 모법이 만들어져 있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때 기자는 그런 법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나마 다행은 그 병원이 전국에서 인권적 치료 방법을 선도적으로 모색하던 공간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부당하게’ 신체가 묶이기도 했지만 별 트라우마 없이 그곳에서 지냈다.

그 병원은 화요일 밤이면 노래방 기기를 갖다 두고 폐쇄병동에서 노래를 불렀다. 병동 환자들이 다 나와서 노래를 불렀고 일부는 춤을 췄다. 기자는 별다른 감흥 없이 박수를 치며 동료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불렀다.

3층 건물의 그 병원은 폐쇄병동이 3층에 있었고 개방병동은 2층이었다. 그리고 이건 유동적이었다. 개방병동에 있어도 하나 꼬투리가 잡히면 어김없이 보호사들에 이끌려 3층으로 올라가야 했다. 그럼, 거기서 개방병동으로 내려가기 위해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 폐쇄병동 안에서 당사자가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공간은 구석의 작은 흡연실과 공중전화부스였다. 우리는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며 미래가 없는 듯 연기를 탁한 공중으로 올려보냈다.

폐쇄병동의 어느 날이었다. 병동 안에 하나 있는 공중전화기 앞에 전화카드를 든 20대의 앳된 여성이 서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공중전화기에 대고 “엄마”를 불렀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엄마, 나 잘할게. 나 퇴원 좀 시켜줘. 여긴 매일매일이 똑같은 일상이야.” 잠긴 목소리였다. 마침 그 근처에 있던 기자는 우연히 그녀의 그 절박한 통화내용을 들었다.

그 이후 별다른 기복 없이 기자는 그곳에 3달 정도 머물렀고 퇴원했다.

서두를 길게 쓴 건 이런 생각 때문이다. 앞의 형우 씨가 그 시설에서 전화를 할 권리가 있었다면 그는 시설의 부당한 폭력의 질서를 문제삼았을 거고 그것을 누나에게 알려 그곳을 더 빨리 나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때는 환자의 기본적 권리는 없었다. 그리고 그건 그 시절 너무나 당연해서 아무도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았다. 사적 통화는 꿈도 꿀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폐쇄병동의 그 앳된 여성이 그토록 절박하게 가족에게 퇴원을 요청하는 모습이 형우 씨의 당시 고통과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니 그렇다.

형우 씨가 척박했던, 군대 질서보다 더 엄격했던 그야말로 ‘수용소’로 들어가 있었던 시절은 1990년대였다. 그리고 앳된 여성이 전화를 걸던 그때는 2009년이었다. 지금은 2023년이다. 30년의 시간 간격이 있는데 그 기간 동안 우리나라의 정신병원 인권은 지속적으로 변화 발전돼 온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특히 전화를 사용할 수 있는 기본권인 헌법 제18조의 통신비밀의 자유를 환자들은 전면적으로 누리고 있을까.

헌법 제18조는 모든 국민은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자유가 통제될 때 우리는 기본권과 자기결정권, 행복추구권을 침해당했다고 인식한다.

일부 의료 집단은 정신병원에서 통신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이유로 정신건강복지법 제74조를 들이민다. 이 조항은 ‘치료 목적’으로 정신과 전문의 지시에 따라 통신과 면회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공중전화기. [사진=연합뉴스]
공중전화기. [사진=연합뉴스]

‘치료 목적’이라는 용어가 가지는 모호성을 들여다본다면 그 속에는 전문의가 가지는 권위가 작동하는 걸을 알 수 있다. ‘나는 의사이므로 내가 하는 행위들은 당신을 치료시키기 위한 결정적 조치들이야’라고 그들은 말할 수 있다. 환자는 순응해야 한다.

그런데 정신질환이라는 질환이 드러나지 않는 비가시적 특수성을 감안할 때 어디까지가 의사의 권한이고 어디까지가 환자의 기본권이 제약당하는 지점인지 모호한 순간이 있다. 통신 자유의 문제가 그렇다.

어쩌면 1990년대 형우 씨가 겪었던 고립된 입소 생활과 2009년 여성 환자의 절박한 요청, 그리고 2023년의 현 시점에서도 통신, 즉 타자에게의 말걸기는 일방적으로 거세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럼 무엇이 변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지난 2020년 7월부터 군(軍) 장병들은 일과 후에 휴대전화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오후 6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말에는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9시까지 기본권으로서 통화가 허용된 것이다.

국방부는 더 나아가 지난해 11월부터 육군 28사단 등 3개 사단 소속 병사들이 휴대폰을 24시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시범운영에 들어간 상태다. 게다가 윤석열 정부는 국정 과제의 하나로 ‘병사 휴대전화 소지 시간 확대’를 발표한 바 있다.

만약 군의 특수성 때문에 일방 사병이 휴대폰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는 이를 납득할 수 있을까. 아마 다수는 그 ‘특수성’ 하나 때문에 휴대폰 보급을 중단하라고 요청할 것이다. 왜냐하면 군인이고 군인은 기강을 위해 일정 정도의 자유를 박탈할 수 있다는 ‘군바리스러운’ 사유가 군인의 자유 개념을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만큼 군은 규율에의 복종과 자유의 박탈에 근거해 작동한다.

그럼 정신장애는 어떨까. 정신장애인이 병원에서 자유롭게 휴대폰을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 일반 시민은 거기에 찬동할까. 기자는 찬동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사회적 약자의 지위에 있지만 경험해보지 못한 이질적 인구집단, 그들이 사회에 표상되는 기호는 ‘살인’과 ‘폭력’이데 이런 위험한 자들을 통제하고 규율하지 못한다면 사회생태계를 당장이라도 훼손할 수 있다고 생각할 개연성이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성이 마비된 자들이 통신의 자유에 근거해 정신병원에서 이곳저곳에 함부로 전화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불편할 것이다. 그들은 사유할 수 있는 지적 역량이 없기에 전화를 사용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바흐친에 따르면 독재 체제에서 인민은 독백을 하고 민주 체제에서 대화를 한다. 쌍방향 다이얼로그가 제한될 때 인간은 자기 자신을 향한 의미 없는 독백에 빠져드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대화에 근거해 작동하는 체제다.

정신장애인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비정신장애인 인구집단이 생각하듯이 눈을 뒤집고 괴성을 지르는 괴물들이 아니다. 슬플 때 울고 기쁠 때 웃는 인간이다. 환청 등에 의해 정신적 어려움을 겪지만 장애를 가진 인간인 것이다. 그런데 군에서도 허용되는 휴대폰 사용을 정신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환자라는 이유로 가로막아야 하는 것일까.

지난 28일 국가인권위원회는 폐쇄병동에서 통신의 자유를 제한한 인천의 한 정신병원을 검찰에 고발했다. 인권위가 권고가 아닌 고강도의 고발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의미다.

이 병원의 공중전화기 이용 제한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2020년 12월에 이 병원 폐쇄병동 공중전화기 사용을 보호사들이 가로막았고 전화기 자체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는 진정이 접수된 바 있다. 인권위는 지난해 9월 해당 병원을 직권 조사했다.

인권위에 따르면 1층 개방병동에는 공중전화 1대가 있었지만 2층 폐쇄병동은 공중전화기가 없었다. 간호사실 앞에 일반 가정용 전화기가 놓여 있었을 뿐이다. 그건 환자들이 사용할 수 없었다.

병원 측은 병원 집기를 부수는 환자로 인해 전화기가 자주 고장나 운영업체가 회수해갔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환자들과 운영업체 관계자들의 진술은 달랐다. 병원의 보호사가 환자들이 경찰서에 신고를 하고 파손을 해 공중전화기를 철제 박스에 넣거나 전화선을 아예 빼놓는 등의 방식으로 사용을 막았다는 주장이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음. [사진=연합뉴스]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음. [사진=연합뉴스]

특히 이 병원은 입원환자의 94%(168명 중 158명)가 자의입원과 동의입원 환자들이었다. 자율적 결정에 의해 입원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인권위 조사 결과 이 유형의 입원환자 중 10명은 의사소통이 전혀 불가능했고 6명은 간단한 의사소통을 가능하나 입원 절차와 유형에 대한 개념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병원은 개방병동 일부 병실의 문을 수시로 자물쇠로 잠그고 출입을 통제했다. 시설은 낙후됐고 환자복, 침구용품은 부족하거나 낡아 있었다. 의료기관평가인증원이 정신건강복지법 제31조에 근거해 3년마다 실시하는 평가에서도 이 병원은 2019년과 2022년에 불합격 평가를받았다.

하지만 불합격 판정을 받아도 그 기관에 대한 구체적 처벌 규정이 없는 상황이다. 정부도 이 병원들에 대한 ‘맞춤형 지원’을 말하지 시설 환경을 개선할 강제적 규범을 예시하지는 않는다.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이게 2023년 현실의 정신병원의 풍경이다. 스마트폰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공중전화기 하나 없다는 것, 그것이 정신장애와 관련된 박탈의 본 모습이다. 정신장애인은 사회적으로 비난받고 정신병원에서 통제받는다. 이들은 아무에게도 연락해서는 안 되는 비이성적 인간들에 불과하다.

사회 계급의 가장 하층에 위치한 존재들. 그래서 아프리카와 제3세계는 정신질환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발에 족쇄를 차야 하고 그 질환을 가졌다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비난받는다.

그러므로 언급된 인천 그 병원에서 자격 없는 보호사들이 개방병동의 병실 문을 바깥에서 잠그는 것과 낡아빠진 환의를 입게 하는 것과 전화선을 빼놓는 행위들을 거리낌 없이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2월,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정신건강복지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개정안의 제74조는 통신과 면회의 자유 제한의 금지를 규정하고 있다. 의사가 치료 목적으로 통신 자유를 규제할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는 그 병원의 장이 지자체장의 허가를 얻어야 하도록 했다.

특히 통신과 면회의 자유가 제한돼도 절차조력인과 변호인이 입원 정신질환자를 대면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도록 했다. 병원에 입원하면 아무도 법적 제도적으로 지원받을 수 없고 그저 ‘살아가야’ 하는 환자들의 권리 보장이 적극적으로 적용인 것이다.

개정안은 또 보호의입원과 동의입원 제도를 폐지하도록 했다. 보호의무자 규정도 삭제했다. 현행법은 보호의무자가 정신질환자를 보호해야 하며 타인에게 해를 끼치게 하면 안 된다는 등의 과대한 돌봄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이를 없애고 가족에게 교육과 휴식을 제공하는 등의 더 많은 권리를 주자는 취지다.

기자는 앞에서 두 가지의 사례를 들었다. 통신면회의 자유와 그 제한의 문제, 그리고 동의입원에 대한 문제가 그렇다.

모든 모순은 상호의존적이다. 이 하나의 모순만을 제거한다고 다른 모순이 동시에 제거되지는 않는다. 이들은 의존적이며 서로를 필요로 한다. 특히 정신질환과 관련해서는 내밀한 권력이 병원 안에서 작동한다. 비정신장애인인 내과 환자나 외과 환자들이 존중받는 것과 달리 비이성적이라는 이유로 통제와 규율을 강제한다. 이를 어기면, 폭력이 따라온다. 정신병원은 저 긴 세월동안 철저하게 내적 폭력에 그 존립 근거를 두고 있었다.

전화기를 사용할 수 없게 하는 이 전근대적 사유의 밑바닥에 바로 폭력적으로 환자를 대해 규율화시켜야 한다는 권력자의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필립 피넬. 1795년 살페트리에르 정신병원에서 광인의 쇠사슬을 모두 풀어주었다. [by Tony Robert-Fleury]
필립 피넬. 1795년 살페트리에르 정신병원에서 광인의 쇠사슬을 모두 풀어주었다. [by Tony Robert-Fleury]

1793년 38세의 젊은 프랑스 정신과 의사 필립 피넬은 비세트르 정신병원 원장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당시 위험하고 폭력적인 존재로 규정된 광인(狂人)들의 발에 묶인 쇠사슬을 풀어주었다. 주변의 치료진들은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그는 쇠사슬에서 광인들을 해방시켰다.

2년 후 옮긴 살페트리에르 정신병원에서도 광인들의 쇠사슬을 풀어주었다. 그 쇠사슬이 풀린 광인들이 필립 피넬에게로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감사합니다(Merci)”

기자의 결론은 그렇다. 입원환자에게 스마트폰 사용을 전면 허용하라는 것. 규율과 질서의 정점이 있는 군인에게 그 권리를 허용했듯이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입원과 동시에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모순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통신의 자유를 부과해야 한다. 무리한 요구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1990년의 시설 정체성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형우 씨가 대화를 시도했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어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돼야 했던 그 시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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