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경계에서 말을 걸다] 우리에게는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지만 그건 혼자만의 노력으로 만들어지지 않아요
[정신의 경계에서 말을 걸다] 우리에게는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지만 그건 혼자만의 노력으로 만들어지지 않아요
  • 마인드포스트 편집부
  • 승인 2023.03.29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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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 박여리 씨와 박목우 씨의 정신의 서재①

여기, 정신장애라는 10만 볼트의 터널을 뚫고 나온 두 명의 여성 정신장애인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고통 속에서 가꾸어온 성찰의 언어들, 그리고 고통에 단련되면서 깨달은 삶의 비밀들이 있습니다. <마인드포스트>는 이 두 분이 서로를 향해 보내는 편지를 2주마다 한 번씩, 올해 말까지 연재합니다. 타자화가 아닌 주체라는 정신장애인의 정체성을 온몸으로 밀고 온 그들의 경계에 선 언어들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박여리 씨가 참여하고 있는 함께하는사회적협동조합. 정신장애인이라는 소외된 약자들을 위한 자발적 결사체로 자율·자립과 어울림의 정신으로 공동체 생활을 만들어가고 있다. 경기도 성남시 위치. 사진은 농장활동을 체험하는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의 모습. [사진=함께하는사회적협동조합 누리집 갈무리]
박여리 씨가 참여하고 있는 함께하는사회적협동조합. 정신장애인이라는 소외된 약자들을 위한 자발적 결사체로 자율·자립과 어울림의 정신으로 공동체 생활을 만들어가고 있다. 경기도 성남시 위치. 사진은 농장활동을 체험하는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의 모습. [사진=함께하는사회적협동조합 누리집 갈무리]

 

목우님께

샤워를 하고 차가운 보리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책상에 앉았습니다. 첫 번째 편지이네요. 그전에 오늘 목우님 얼굴이 말갛게 빛나고 예뻤던 것 아시나요? 보는 제가 다 기분이 좋아져서 타인의 행복한 얼굴은 내 마음도 햇살처럼 환하게 밝혀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요.

그럼 본론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함께하는사회적협동조합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였죠. 저는 첫 편지에 어떤 이야기를 들려드릴지 고민하다가 함께 신나는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근무하며 겪은 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1월의 어느 날이었어요. 저는 카페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죠. “야! 이 xx 년아” 아뿔싸, 그 친구였죠. 그 친구는 카페로 갑자기 쳐들어와서 제 목을 뒤에서 잡고 욕을 하며 저를 잡아 끌어내었습니다. 저는 너무 놀랐고 몸이 자유롭게 되자마자 경찰에 신고를 했답니다. 그 친구는 저를 밀어 누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카페를 부수기 시작했어요.

저는 너무나도 놀랐지만 그 친구가 카페를 부수는 일은 벌써 세 번째였기 때문에 처음처럼 놀라지는 않았어요. 이윽고 치료진과 경찰, 원장님이 카페에 오셨어요. 저는 신고를 했기 때문에 경찰과 대면해야 했죠. 이름과 주민번호를 말하고 일어난 사건에 대해 진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어요. 물론 당시엔 그 친구에게 당한 게 황당했고 고소를 해서 버릇을 고쳐주고 싶었죠.

알고 보니 그 친구는 제가 집단치료시간에 원장님에게 한 이야기를 자신을 저격했다고 생각했고 저를 공격한 것이었어요. 저는 원장님에게 한 이야기를 그 친구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당황했고 곧이어 피해망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 친구는 피해망상으로 넘겨짚곤 제가 자신을 공격했다고 생각해 저를 공격하러 온 거였고요.

너무나도 놀라고 억울하고 분하고 이번에야말로 고소를 해서 버릇을 고쳐주고 싶었어요. 지난번에도 그 친구가 카페를 부순 것을 목격했기 때문인데요. 경찰이 고소를 하겠냐고 물었을 때 저는 하루 말미를 달라고 말을 했어요. 그 이유는 원장님 때문이었죠. 원장님은 그 친구가 증상이 심한 상태로 피해망상이 있어 일을 저질렀다고 설명했고 평소에는 착한 친구라고 말했어요.

마음 같아서는 그 친구를 고소해서 감히 나에게 덤빈 것에 대해 처벌하고 싶었지만 한눈에 봐도 정상적이지 않았답니다. 증상이 있어 보였고 제가 고소할 거라 생각해 오히려 자포자기한 듯 보이기도 했고요. 저는 때마침 방문한 보건소 선생님께 상황을 설명하고 상담을 받게 되었어요. 그 친구를 고소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을 받았죠. 증상이 있을 때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거잖아요.

저는 원장님을 만나 고소를 취하하겠다고 말하고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놀란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어요. 그 순간 칼이나 가위 같은 위험한 물건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저는 만약의 상황들, 즉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들에 대해 생각하며 밤을 지새웠어요. 다음 날 외래를 통해 그 친구로부터 사과를 받을 수 있었어요. 그 친구는 자신이 정말 잘못했다며 고소를 해도 할 말이 없다고 말했고 무릎을 꿇으며 사과를 했고요.

저는 고소는 하지 않기로 했다며 치료를 잘 받으라 말을 했습니다. 그 친구는 중학교 시절 왕따를 당했고 어머니와 함께 어렵게 살고 있다고 알고 있어요. 착한 친구이지만 증상으로 인해 사건사고를 저지르고 다시 그 사건사고에 대한 죄책감에 빠져드는 것 같아 보였죠.

생각해보면 저도 증상이 있을 때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창피한 경험이 분명 있거든요. 그때 사람들이 얼마나 내게 너그러웠는지, 얼마나 기꺼이 용서해 주었는지 생각하자 그 친구가 더 이상 밉지 않았어요.

무거운 이야기였죠? 함께하는사회적협동조합에서는 이런 일들을 세상의 방식이 아닌 공동체 내에서의 문제로 규정하고 공동체 내에서 지혜롭게 풀어가는 경우가 많답니다. 저 또한 옳고 그른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게 되는 사건이었어요.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야 할까요? 세상에서 보면 그 친구는 고소를 당하는 게 맞겠죠. 하지만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공동체 내에서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되고 그건 그것대로 사과와 용서 처벌이 존재해요.

이런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증상으로 인한 폭력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대처해야 할지 고민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사회의 시선과는 다른 증상을 가진 우리들 내에서 일어나는 폭력에 대해 목우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저는 위의 사건을 겪으며 말과 행동을 더욱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의 의견일지라도 타인이 피해망상으로 오해를 한다면 너무 슬플 것 같거든요. 가급적 서로 상처를 주지 않고 보듬으며 살아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니까요.

아침저녁으로 쌀쌀하기만 한 초봄, 여리 드림.

뭉크의 '절규'. Edvard Munch, The Scream, 1910, tempera on board, 66 x 83 cm (The Munch Museum, Oslo)
뭉크의 '절규'. Edvard Munch, The Scream, 1910, tempera on board, 66 x 83 cm (The Munch Museum, Oslo)

여리님께

여리님, 제가 함께하는정신과의원에 다닌지도 몇 년이 지났네요. 고영 원장님께서 사회적협동조합을 하신다는 것을 듣기는 했지만 제가 사는 서울부터 병원과 협동조합이 있는 성남까지의 거리가 부담스러워 선뜻 조합원으로 가입하겠다는 말씀을 드리지 못했어요. 원장님께서는 늘 저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주셨지만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시는 당사자분들의 이야기를 듣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저는 여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왜인지 폭력보다는 고통에 오래 눈길이 머물렀어요. 어떤 고통을 겪고 있기에 뒷목을 잡고 험한 욕설을 하며 집기들을 부쉈던 것일까, 그런 생각이요. 고통을 겪는 사람은 대개 자신의 고통이 절박하고 절대적이어서 그것이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어떤 아픔을 주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거든요. 알더라도 쉽게 멈출 수 없는 것, 그것이 고통의 잔인함입니다. 삶의 어느 맥락에서인가 당사자분에게 여리님의 말씀이 큰 고통을 만들었기에 그렇게 폭력적인 행동을 한 것은 아닐까요.

여리님의 잘못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저는 고통의 곁에서 그 고통을 지켜보게 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말씀하신 당사자분은 자신의 그런 폭력들 때문에 사회에서 배척받고 그것이 또 아파서 고통을 키우고 계신 건 아닌가 해서요. 나도 모르는 나로 인해 세상에서 고립되어 버리는 것 같은 공포를 느끼면서요. 그럴 때 그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또 그 곁을 지키는 사람에게 필요한 도움은 어떤 것일까요.

저는 그 작은 실마리를 여리님의 글에서 찾았습니다. 당사자분의 고통을 여리님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 그것입니다. 많이 놀라고 당황하시고 상처를 받으셨지만 여러님은 당사자분의 고통을 이해하려 노력하였습니다. 그 폭력을 여리님이 어떻게 느끼셨고 여리님의 곁을 지키시는 분들이 어떻게 당사자분을 이해하고 계셨는지를 통해서요. 그리고 이렇게 언론이라는 공론장에 문제를 제기하셨습니다.

저는 그 시도가 너무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신장애인 공통의 문제이고 이 문제들에 대해 서로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자신의 고통에 매몰되어 있는 당사자분에게 다른 사람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들은 첫 번째 청자로서 제가 하는 역할도 거기에 있겠지요.

저는 이렇게 여리님의 문제제기에 응답하려 노력합니다. 그것은 저와 여리님이 고통의 당사자가 아니어서 가능한 일입니다. 고통의 당사자는 고통이 너무 아파 울부짖는 것밖에는 할 수 없기 때문이죠. 어쩌면 철저히 혼자가 되어서요.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어떤 담론도 부재한 채로요. 세상은 정신장애인의 목소리에 관심이 없고 듣고 싶어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저와 여리님은 그 울부짖음을 들은 사람들이고 이것은 당사자분의 주위로 어떤 공동체가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고통을 듣고 그가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를 받아들이고 기다려 줄 수 있는 공동체가 말입니다. 저는 여리님의 글에서 당사자분의 고통에 공감하는 분들의 조언이 뜻깊게 다가왔습니다. 당사자분의 입장에서 그를 이해하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그를 보살피며 그의 고통 속에 어떠한 진실이 숨어 있는지를 알아본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말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사자분이 행한 현재의 폭력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염려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당사자분을 세심하게 배려하고 고통의 원인과 그럼에도 쉽게 치유되지 않는 증상들을 깊이 있게 바라봐 준 시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이죠. 그런 눈길로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그래서 그가 이해받고 고통을 표현할 충분한 기회를 가지고 그의 과거와 미래가 다시 시작되는 현재로 인해 바뀌어진다면 더 이상 폭력을 행사할 이유가 없어질 것이라고요.

그러나 그런 시작이란 얼마나 드문 것일까요. 그것이 따뜻한 염려를 담은 여리님의 글이 소중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돌보는 일을 시작할 수 있게 해 주는 말씀을 해 주셨으니까요. 서로가 서로의 곁이 되어 주는 일은 지금 여기에서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정신장애인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생각해요.

언젠가 발달장애인분들이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에 대해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중증의 발달장애인분들의 세계는 마치 비 오기 전 천둥과 번개가 내리칠 것 같은 음산한 바람이 몰아치는 풍경과도 같다고 합니다. 귀로는 무언가를 긁는 듯한 쇠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요. 세상과 소통하기 어려운 이분들은 자기 안에 고립된 채로 그 풍경에 저항하기 위해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라고 해요.

그래서 저는 여리님이 당사자분의 고통에 대해 조금 더 귀를 기울여 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의 어려움과 상처와 여리님에게도 있을 고통에 대해 또다른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눠보셨으면 합니다. 저에게 하시듯이요. 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해 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응답을 들을 거에요. 그렇게 고통의 곁이 늘어날 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며 나의 아픔과 아주 멀리 있다고 생각한 사람에 대해서도 이웃으로, 친구로 다가갈 수 있을 테니까요.

우리에게는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혼자만의 노력으로 만들어지지 않아요. 수많은 곁과 곁이 함께 힘겹게 일구어내는 기적입니다. 그러니 그 기적을 믿으며 다음 편지를 기다리겠습니다. 봄이 와도 캄캄한 갇힘을 느끼고 있을 누군가의 고통을 느껴봅니다. 시름하는 봄에 여리님의 목소리가 있어 희망을 봅니다. 아프게 봄이 왔습니다.

흐린 하늘을 보며 세상을 씻어줄 봄비를 기다리며

목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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