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미친 존재의 미래를 결정하지 마라! 미친 존재의 삶을 존중해라!
[기고] 미친 존재의 미래를 결정하지 마라! 미친 존재의 삶을 존중해라!
  • 손성연
  • 승인 2023.03.31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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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연 기획자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사진=연합뉴스]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사진=연합뉴스]

나는 정신과 병원에서 ADD(주의력결핍장애) 진단을 받았다. 정신과 병원에서 진단명을 받을 때 해방과 억압을 느낀다. 그래서 어떤 감정 상태여야 하는지 감이 안 잡힌다.

치료될 수 있다는 믿음이 점점 사라졌다. 평생 약물을 복용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화가 나기 시작했고 갈등과 싸움이 잦아졌다. 의사는 그런 날 보며,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로 진단명을 바꿔줬다.

오랫동안 화가 났고 우울했고 지쳤다. 급성기란 용어가 있다. 정신의학에서 급성기를 이렇게 정의한다. ‘자·타해 위험이 있는, 병식(병에 대한 인식)이 없는 상태.’ 급성기 때 대부분 폐쇄병동에 입원한다. 급성기에 대한 정의를 다시 쓰고 싶다. ‘미쳤다는 것을 언어로 탐색하고 삶으로 수용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당함.’ 미쳤다는 것에 대해 사회적, 의료적 태도는 싸늘하다. 미친 존재의 일상은 모욕으로 가득하다.

‘아무튼 전 미친 게 아니었어요! 제가 가끔 듣게 되는 그 음악이 일종의 정신이상의 징조라고 생각했고 비웃음거리가 되거나 미쳤다고 생각될까 봐 두려워서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보 같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다이애나 도이치(2023), 왜곡하는 뇌 : 음악과 언어가 밝히는 뇌의 비밀, 박정미(역) 박종화(역), 에이도스, 244쪽]

음악환청이 들리는 사람이 조현병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 하는 말이다. 그 누구도 미치고 싶지 않다. 그건 당연하다. 그렇다고 해서 미쳤다는 게 비웃음거리나, 두려운 것,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살다 보면 모두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루치아  정신병 환자를 부상 환자와 함께 두면 어떡해? 안 좋잖아. [카릴 처치(2019), 미친숲, 강태경(역), 지만지 드라마, 103쪽]

희곡을 읽다가 이 대사에서 멈춰 오랫동안 생각했다. ‘환자’는 혁명을 일으키고 부상을 당한 가브리엘이 불편해하는 말들을 계속해서 쏟아낸다. ‘환자’는 가브리엘에게 민폐를 주는 도구적인 캐릭터다. 작가는 ‘환자’를 ‘증상’으로만 생각해서 썼다.

정신병 환자는 따로 격리해야 된다는 대사는 차별이다. 이런 문학작품은 정말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은 <미친 숲>이다. 이 희곡에는 미친 존재의 삶이 없다.

인터넷에 정신병자를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에 ‘정신병자 뜻’ ‘정신병자 대처법’ ‘정신병자 테스트’ ‘지하철 정신병자’ ‘동네 정신병자’ ‘정신병 있는 친구’들이 나온다. 미친존재는 일상생활에서 직간접적으로 모욕을 당한다. 이런 세계에서 어떻게 미쳤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까. 혐오는 미친존재의 삶을 망가뜨린다. 과거에 나는 나를 혐오했다.

나는 그때 급성기였다. 이 문장을 썼다, 지우길 반복한다. 불쾌한 기억들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단 한 번도 급성기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내가 정의한 급성기의 의미라면 나는 그때 급성기였다.

언제나 나를 소개할 때 미쳤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한다. 1)꼭 약물을 복용해야 돼? 그거 부작용도 심하잖아. 중독될 수도 있고. 2)야, ADHD? 나도 그래, 나도 집중 못 해. 3)약점은 말하지 않는 게 좋아. 이 세 가지 말 모두 불쾌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말을 듣고 웃었다. 이런 말들이 나에게 상처가 된다고 그들에게 설득할 힘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나의 고통은 설득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그나마 듣기 편했던 말은 ‘그럴 것 같았어’다. 언제나 내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독특하다”, “특이하다”란 말이 내 질병의 다른 호칭이었다는 걸, 이젠 알고 있다.

‘솔직하다.’ 이게 나에겐 자해였다. 자해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다. 실수할 때마다 ‘정신병자’라고 자조했다. ‘나는 결함이 있어, 당신들이 생각하는 고정관념과 딱 맞아.’ 미쳤다는 걸 숨기는 것보다 솔직한 게 덜 아프다. 사실 말해도 말하지 않아도 아프다. 차라리 말하고 고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사진=픽사베이]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사진=픽사베이]

의사는 약물을 복용하면서 습관화된 ‘잘못된 행동’을 개선해야 된다고 했다. 나의 결함을 열심히 찾았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나’에 대한 자료수집 연구가 되었다. ‘나’의 증상은 정말 광범위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날 보며 사람들은 “자의식 과잉인 것 같아”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의식 과잉이라고 확신했다. 제일 먼저 날 의심했고, 날 믿지 않았다. 어떤 상황을 경험하고 나서 기분이 나쁜 게 맞는지, 기분이 좋아야 되는지, 다른 사람에게 물어봤다. 그 사람이 화를 내면 나도 화가 났다. 이런 얘기를 의사에게 하면, 의사는 자아가 훼손되었다고 한다.

“나는 자아가 없어.”

자주 하던 농담이었다, 아무도 웃진 않았지만. 굉장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면서 관찰력이 뛰어나고 소수자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난 존재가 지원을 해줘야 한다고 믿었다. 가스라이팅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가스라이팅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런 관계가 반복되면서 꼼짝없이 갇혀버렸다. 안으로도 들어갈 수가 없고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았다. 정말 갇혔구나.

“정신병원 가기 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아.” 이 말을 들었을 때, 관계적으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생겼다. 사건들의 공통점이 있었다. 매번 내 옆에서 조언을 해주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은 나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나를 고쳐주려고 했다. 나의 일상생활까지 쳐들어왔다.

어느 날은 집에 와서 저녁밥을 먹고 있었다. 전화가 왔다. 밥을 먹지도 못하고 전화를 했다. 통화가 끝나자 엄마가 말했다. “누군데 널 그렇게 혼내?” 나는 기분이 나빴지만 내가 혼나고 있는지는 인식하지 못했다. 내 삶의 주도성을 잃었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모르겠고 내가 욕망하는 것은 무엇이며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몰랐다. 불안하고 화가 났다. 나는 치열하게 싸웠다.

“화가 난다, 화가 많이 난다, 화가 나 미치겠다!”

사람들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다시는 그 사람들을 만나고 싶진 않다. 현재의 나는 변했는데, 모두 과거의 ‘나’와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었다. 현재의 ‘나’는 언제나 구석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 개인의 문제라고 여기지 않는다. 관계는 누구나 어렵고 관계는 누구나 실패한다. 나는 이것을 변명하고자 적은 것은 아니다.

그래도 나는 두렵다. 나의 급성기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이 날 위험하다고 생각할까 봐, 분노조절장애가 있다고 생각할까 봐, 불안하다. 나는 통제되어야 한다. 나 때문에 모든 관계가 망가진다. “그렇지 않아.” 말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미친 내가 위험한 것 같다.

[분노조절장애, 분노조절장애는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고 폭력적인 사건을 일으키는 사람의 호칭으로 자주 사용된다. 분노조절장애는 일상용어가 되었다. 나는 분노조절장애란 용어가 악랄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감정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분노라는 강력한 특정 한 가지 감정만을 조절하지 못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인간의 감정은 다양하고 겹쳐지기도 한다. 분노의 감정은 꼭 집어서 설명할 수가 없다. 분노조절장애는 ‘미쳤다.’를 두려워하는 사회와 정신의학이 암묵적으로 합의해 창작한 용어다.]

여전히 폐쇄병동은 그곳에 있다. 폐쇄병동은 치료하는 곳이 아니라 병식을 길러내는 장소다. 병식은 한 인간의 복잡한 신뢰성을 모두 산산조각낸다. ‘미쳤다’와 삶은 분리된다. 미친존재는 빈 공간이 생긴다. 빈 공간 안에 눈부시게 따끔한 불이 타오른다. 타오르는 불, 속삭인다. 모두 모욕적인 말들.

여전히 폐쇄병동이 그곳에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 사회는 암묵적으로 미친 존재가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없으며,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없다고 합의했다. 정신의학은 그러한 합의를 이행해주는 대리인이다. 미쳤다는 것 자체가 개인의 책임이 되었다. 폐쇄병동은 사회적 능력에 따라 미친존재를 선별한다. 왜 미친존재의 말은 듣지 않는 걸까.

‘별 거 아닌 경험’, ‘사소한 경험’, ‘작은 경험’, 이렇게 경험의 가치를 구분 짓는 게 싫다. 미친존재에게 일상이 된 혐오는 트라우마다. 이 트라우마는 ‘별것 아닌 경험’, ‘사소한 경험’, ‘작은 경험’이 누적돼서 트라우마가 된다.

미친존재가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환경이다. 미친존재가 정신과 치료를 받을 때 자기 낙인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대안적 환경을 설계해야 된다. 미친존재를 중심으로 Mad Studies 개념을 확산시켜, 미친존재가 자신의 삶을 탐색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많아져야 한다.

정신의학은 ‘치료’와 ‘자기관리’ 언어를 미친존재에게 주입한다. 의사에게 미친존재감 프로젝트 활동에 대해서 말하면, 아직도 그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냐며 인상을 찌푸린다. 화를 내지 않고 웃는다. 그 말이 참 우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전 세계에 있는 폐쇄병동은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의사는 이런 농담을 한다. 이 농담은 전혀 웃기지 않았다. 이런 농담을 하고도 수치심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이게 ‘권위’다. 나는 권위를 3주에 한 번씩 보고 듣고 느낀다.

그럼 병원을 바꾸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미친존재는 대부분 정신과 진료실을 1주 ~ 3주 간격을 두고 방문한다. Mad 담론을 이끌어 가는 건 정신의학이다. 정신의학이 주류 학문이 된 건 약물 덕분이다. 미친존재들은 대부분 약물치료를 받는다. (모두가 약물 치료를 받는 것은 아니며, 자신만의 치료방법은 존중 받아야 한다) 그러나 약물치료만으로는 완치될 수가 없다. 어느 정도 증상이 완화되거나, 증상이 멈춰진다. (완치되는 경우도 있다)

미친존재 중에는 약물을 복용하지 않으면 바로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정신의학은 이미 미쳤다는 것을 ‘제거’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정신의학은 적어도 미친존재의 삶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이상 그때처럼 화가 나지 않는다. 혐오가 죽었다. 아찔한 기억이 있다. 가족들은 나를 병원에 입원시키려고 했다. 매일 안절부절못했다. 가족이 의사를 만났는데, 의사는 내가 입원할 정도로 심하지 않다고 했다. 만약에 의사가 그때 입원을 결정했다면, 아직도 미쳤다는 것을 수용하지 못하고 고립되었을 수도 있다. 미쳤다는 것이 정체성이 될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은 나를 안전하게 해준다. 이 안전함이 미친존재에게 필요하다.

매드 프라이드 축제. [마인드포스트 자료사진]
매드 프라이드 축제. [마인드포스트 자료사진]

미친존재를 어떤 태도로 만나야 되는지 미치지 않은 존재들은 학습해야 된다. ‘정신장애인의 대안적 접근으로서 Mad Studies에 대한 탐색적 연구’에 이런 문장이 있다.

Mad Studies는 이처럼 현재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Mad를 되찾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다시 말해 정신적 고통에 대한 생의학적 설명에 도전하기 위해, 정신과의사와 같은 전문가그룹에 의해 부여된 정체성에 저항하기 위해 ‘Mad’라는 정체성을 만들어낸 것이다(LeFrancois et al., 2013) [송승연,「정신장애인의 대안적 접근으로서 Mad Studies에 대한 탐색적 연구」, 비판사회정책, 301쪽]

나에게 저항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동료를 만나는 것이다. 동료를 만나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 누구도 정체성을 찾아 줄 수 없다. 그 누구도 정체성을 알려줄 수 없다. 하지만 모호한 정체성이 부딪히며 명료한 순간을 발견해 낼 수는 있다. 미쳤다는 것은 누구도 경계 지을 수 없고 정의내릴 수 없다.

난 변했다. 아니, 변한 나의 삶에 적응하고 있다. 아침에 약물을 복용하고 잘 때도 약물을 복용한다. 약물은 내 몸에서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정서적, 신체적 변화가 발생되고 나의 사회생활에 영향을 준다. 약물을 복용한 ‘나’는 삶의 시간을 변화시킨다. 사회적 시간과 나의 시간이 불화한다. 사회적 시간에서 요구하는 ‘청춘’은 내게 ‘고통’으로 치환됐다. 사회적 시간에 맞춰 나갈 수가 없다. 남들은 쉽게 가는데, 남들처럼 쉽게 못 간다.

미쳤다는 걸 수용하면서 나만의 시간을 활용하는 방법을 마련했다. 나만의 시간 활용방법은 평가 대상이 아니다. 삶이기 때문이다. 모든 질병은 예측불가능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질병을 외면한다. 그러나 나는 정면으로 마주봤다. 갑자기 우울해져, 집 밖에 나가는 게 힘들어졌다가 어느 날은 또 밀려있던 일들을 한꺼번에 처리한다.

관계에서 실수를 할 때 내 성격 때문인지, 내 질병 때문인지 매일 고민한다. 어느 날은 약속을 잘 지키다가 어느 날은 약속을 못 지킨다. 감정의 상태를 착각할 때도 많다. 삶을 존중해줬으면 한다.

“미친존재의 미래를 결정하지 마라, 미친존재의 삶을 존중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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