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언니의 책방] 다행이다, 산이 거기에 있어서
[삐삐언니의 책방] 다행이다, 산이 거기에 있어서
  • 이주현 기자
  • 승인 2023.04.07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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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 언니의 책방 ⑮ 산에 오르는 마음 

로버트 맥팔레인 지음·오만수 옮김, 글항아리

본래 나는 ‘평원주의자’에 가까웠다. 대학생과 사회초년생 시절 20대에 살았던 서울의 집들은 모두 언덕에 있었다. 꽝꽝 언 비탈길을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며 쩔쩔매던 어느 겨울날 귀갓길, 결심했다. 평평한 곳에서 살기로. 그 뒤 이사한 곳은 과거 침수지역으로 유명했던 저지대였다. 걷기나 달리기 같은 다리 위주의 운동은 좋아했지만, 오르막-내리막이 반복되는 등산은 별 취미가 없었다.

로버트 맥팔레인, 산에 오르는 마음, 노만수 옮김, 글항아리, 2023년.
로버트 맥팔레인, 산에 오르는 마음, 노만수 옮김, 글항아리, 2023년.

그런데, 언젠가부터 산이 좋아졌다. 아마도 회사 생활에 위축돼 있던 7~8년 전쯤부터였던 것 같다. 몸도 마음도 쾌청하지 못한 데다 몇몇 동료들과 불편한 사이가 되면서 기가 좀 죽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서울 인왕산에 오르게 됐다. 높이 300m 조금 넘는 산이지만 커다란 화강암 바위가 내뿜는 기운이 씩씩했고 조금만 올라가면 전망이 탁 트여 서울 시내는 물론 경기도 산봉우리들까지 보였다. 

이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산을 찾았고, 밤차를 타고 당일치기로 지리산, 설악산에 다녀오는 고단함조차 즐기게 됐다. 일 년 전 이사 온 곳이 마침 북한산 북사면 쪽이라 출근길에 백운대·만경대·노적봉을 만나는 게 큰 즐거움이다. 

나는 매일 아침 그 봉우리들을 보면서 이름을 불러본다. 그러다 보면 산허리를 두른 구름처럼, 저 높은 어딘가에 내 마음을 올려놓는 기분이 든다. 산에 마음이 머물다 보면, 원망도 짜증도 우울도 분노도 바람에 씻겨 나갈 것 같다. 

최근 신문 북 섹션에서 <산에 오르는 마음>이란 책을 소개한 글을 읽었다. 산에 오르는 마음이라니. 매일 산에 오르고 싶은 내 마음과 ‘찌찌뽕’이었다. 물론 여기서 다루는 ‘산’은 내가 마음 편히 오르는 동네 야산과는 거리가 멀다.

지은이 로버트 맥팔레인은 20대 초반부터 톈산 등반 원정대에 참가하는 등 뛰어난 산악인이다. 그래서 그가 오르는 산은 “견고하고 가파르고 날카로운 암석과 얼어붙은 눈, 극심한 추위, 위장에 경련을 일으키고 창자를 쥐어짜는 육체적 현기증, 혈압의 급상승, 메스꺼움, 동상”을 유발하는 위험한 산이다. 

지은이는 풍부한 등반 경험을 바탕으로 등산의 역사, 산에 대한 지적인 태도의 변화,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공포 중독’,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열망을 상술하고 인공이 닿을 수 없는 순수한 초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절절히 토로한다. 

물론 나야 알피니스트는 언감생심이고 초보 등반자에 가깝다. 그런데도 늦은 밤 침대에 누워 이 두꺼운 책을 펴들었다가 새벽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왜 사람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이 모험을 감수하는 걸까. 이 아름다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거칠고 험한 자연 앞에서 자신이 한없이 무력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감정은 어떤 것일까.

영국인 조지 맬러리는 1921년, 1922년, 1924년 세 번이나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했다가 결국 산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히말라야에서 영국에 있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다음에는 절대 이곳에 오지 않을 거요’라는 다짐이 적혀 있다. 그런데도 그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떠나고야 말았다. 산에서 죽기 한해 전 어느 강연에서 맬러리는 왜 계속 에베레스트로 되돌아가는지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우린 에베레스트로 돌아갈 것 같은데 (…) 한마디로 우리는 헤어날 방법이 없으니까요.” 그는 이 유명한 말을 남겼다. “산이 거기 있으니까 오른다.” 

어렴풋하지만 좀 알 것 같았다. 내가 왜 산에 끌렸는지. 말뚝에 목줄이 걸린 가련한 존재처럼 나는 땅밑으로 꺼져 드는 듯한 우울의 원점으로 되돌아가곤 한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의식적 노력을 통해 헤쳐나오곤 했지만, 어쩐지 나의 운명은 우울함이 박혀 있는 말뚝과 내내 함께할 것이라는 예감이 있다. 하지만 산은 이 헤어나올 수 없는 감정의 기복과 불안을 잠재워준다. 수십억년 지구의 역사를 담고 있는 저 큰 존재는 마음의 잡음을 잦아들게 만든다. 

지은이는 이렇게 표현했다. “손을 내밀어 아래쪽을 만져 빙하가 지나간 암석에 남은 융기와 긁은 자국을 느끼고, 소나기가 내린 뒤 콸콸 흐르는 물로 산비탈이 어떻게 활력이 넘치는지를 엿듣고, 늦여름 하늘빛이 주룩주룩 내리며 고갈될 줄 모르는 액체처럼 수 마일의 풍경을 가득 채우는 대자연을 볼 때, 이들 중 하찮고 의미 없는 경험은 없다. 산은 현대적 생활 방식 탓에 너무나 무의식으로 침출되어 유체이탈해버릴 수 있는, 이 경이감이라는 대단히 귀중한 능력을 인류에게 되돌려준다. 더불어 산은 그런 경이감을 일상생활에서 쏟아내라고 재촉한다.”

그래, 참 다행이다. 산이 거기 있어서.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를 쓴 삐삐언니가 매달 첫째 주에 <마인드포스트> 독자들을 만납니다. 조울병과 함께한 오랜 여정에서 유익한 정보와 따뜻한 위로로 힘을 준 책들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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