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언니의 책방] 나빠져 가는 세상에서 희미한 희망을 모아
[삐삐언니의 책방] 나빠져 가는 세상에서 희미한 희망을 모아
  • 이주현 기자
  • 승인 2023.08.11 20: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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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언니의 책방 (19) 저만치 혼자서
김훈 지음, 문학동네

요즘 들어, 세상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고 중얼거리곤 한다. 빙하가 녹아내려 북극곰의 터전이 위협받고 있다는 얘기는 이젠 진부할 정도다. 평균 15도 안팎이었던 남반구 나라들에 40도 가까이 펄펄 끓는 겨울폭염이 닥쳤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지구가 인간이란 종을 더이상 인내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더위에 지친 심신은 도심 한복판에서 잇따라 벌어진 흉기 난동 사건에 공포로 오싹해졌다. 인터넷에서 이어진 협박 글, 경기도 어딘가에서 수십 명이 희생된 강력범죄가 벌어졌다는 거짓 뉴스는 이 모든 것이 한바탕 나쁜 꿈이 아닌지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해결은커녕 분열과 갈등만 심화시키는 정치인들의 독설도 스트레스 지수를 한껏 높였다. 

퇴근길 평범한 사람들을 노린 무차별 범죄가 ‘분열성 성격장애’를 진단받은 청년의 소행이었다고 경찰이 발표하자, 울고 싶어졌다. 정신질환에 대한 혐오와 배제의 언어가 또다시 끓어오르겠구나. 섣부른 제도적 개선책이 난무하겠구나. 

김훈, 저만치 혼자서, 문학동네, 2022.
김훈, 저만치 혼자서, 문학동네, 2022.

소란 와중에 집어 든 책이 김훈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였다. 표제작 ‘저만치 혼자서’를 천천히 읽었다. 충남 바닷가마을에 늙은 수녀들이 머무는 호스피스 시설 ‘도라지 수도원’이 있다. 색색의 장미 넝쿨이 흐드러진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데도, 심지어 마당엔 도라지가 없는데도,  ‘성녀 마가레트 수도원’이라는 원래 이름 대신 자연스럽게 도라지 수도원으로 불리게 된 곳이다. 여기에 나환자촌과 미군 기지촌에서 일생을 헌신하다 생의 막바지에 이른 김루시아·손안나 두 수녀가 머문다. 소설은 이 두 수녀에 더해 장분도 보좌신부와 그의 신학교 스승 김요한 주교를 등장시켜 이야기를 전개한다. 

고름과 상처로 뒤덮인 환자의 몸을 씻겼던 김루시아 수녀는 이젠 이따금씩 대소변을 지리는 노인이 됐다. 그는 오물로 더러워진 속옷을 세탁부에 맡기지 않으려 불편한 몸을 이끌고 목욕실로 가서 손수 옷가지를 빤다. 성병에 걸린 ‘특수업태부’ 여성들을 치료했던 손안나 수녀는 과거와 현재를 혼동하며 젊은 수녀들에게 ’엉덩이 주사’를 놔주려 한다. 늙은 몸은 더이상 미래를 기약하기 힘든데, 신은 더이상 그들에게 앞길을 펼쳐놓지 않았는데, 그들은 자신에게 희미하게 남아 있는 존엄성의 몫을 다하려 애쓴다. 

백도라지꽃의 꽃술 밑 가장자리엔 희미한 검은색이 번져 있다고 한다. “삶에서 죽음으로 번지면서 건너가는 수녀들”의 삶은 이 도라지꽃과 닮았다. 두 수녀의 힘겨운 걸음걸이는 결국 검은색을 향한 것이지만, 팔십여 년 동안 간직해온 그 개별성과 고유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도라지꽃의 흰색, 보라색 꽃잎에 검은색이 스며있듯, 검은색엔 흰색 보라색의 과거가 응축돼 있다. 

김루시아 수녀가 손빨래를 하러 목욕실을 오가다가 혹시 넘어질까 걱정이라는 장분도 신부의 얘기를 들은 김요한 주교의 답변이 이를 요약한다. “김루시아 수녀님의 빨래를 수거하지 마십시오. 누구에게나 그에게 맞는 고유하고 개별적인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인간의 예절이며 하느님의 뜻일 것입니다. 죄를 짓는 것도 죄를 고백하는 것도 죄의 사함을 받는 것도 개별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로 수녀님의 결벽과 수줍음을 존중해야 합니다.”

문학평론가 정홍수는 김요한 주교의 말을 이렇게 변주한다. “무력하면 무력한 대로, 아니 무력하기 때문에 그 개별성 속에서 인간은 '겨우' 아름답다.” 

인간의 악행으로 더욱 뜨거워지는 지구. 나는 죄를 낳으며 또 그 죄의 대가를 겪으며 살아가는 미약한 존재이다. 돌발적 폭력에 무력하며 혐오와 배제에 맞설 용기도 부족한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무력함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아름다움을 희망으로 알고 견뎌보고 싶다. 나와 같은 방식으로 희망을 이해하고 있는 이들과 힘을 모으고 싶다.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를 쓴 삐삐언니가 매달 첫째주 <마인드포스트> 독자들을 만납니다. 조울병과 함께한 오랜 여정에서 유익한 정보와 따뜻한 위로로 힘을 준 책들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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