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드인아메리카] 나의 정신건강 깨달음 "빛을 보기 위해 어둔 동굴로 들어갔다"
[매드인아메리카] 나의 정신건강 깨달음 "빛을 보기 위해 어둔 동굴로 들어갔다"
  • 송승연 박사
  • 승인 2019.12.12 19:12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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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스타 R. 스토다드(Starr R. Stoddard)는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의 사회복지사다. 살아있는 정신건강 경험을 보유한 정신장애인 당사자다. 그녀는 심오한 영적 세계, 호기심, 야심찬 진리를 추구하며, 우리가 정신건강을 바라보고 다루는 방식에 다른 관점을 도입하는 데 사명감을 갖고 있다. 해당 글은 '매드 인 아메리카'에 기고한 것으로, 약 200개에 달하는 댓글이 달리면서 큰 호응을 얻었다. '마인드포스트'는 전문을 번역해 싣는다.
'매드 인 아메리카' 기사 갈무리
'매드 인 아메리카' 기사 갈무리

내 정신건강에 대한 이야기는 1993년부터 시작된다. 당시 나는 ‘정신건강'이 뭔지 몰랐던 14살의 고등학교 신입생이었다. 그때 내가 아는 거라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내면에서 느껴졌다는 것이며 있는 그대로의 나에게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뿐이었다. 맙소사. 어둡고, 가차 없고, 끈질기고, 가라앉는 느낌의 그것은 내가 26살이 될 때까지 슬금슬금 스며들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은 감정인 만성적인 슬픈 나날들의 증상은, 가방끈이 길고 말빨이 좋은 사람들에 의해 하이재킹당했다. 그들은 DSM이라 불리는 정신건강선언서(mental health manifesto)를 만들었다.

나는 그것이 변화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매우 일반적인 감정에 꼬리표(labeling)를 붙여서 그 고통을 재정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주요우울증(major depression)은 단지 296.30이라는 청구서 코드로 존재한다. 이 코드는 거의 평생 동안 나를 해롭고, 해로운, 정신건강 산업의 소비자로 만들 뻔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의 고교 시절은 험난했다. 나는 많이 울었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이 함께 걷고, 웃고, 만나고, 주말 계획을 세우는 것을 보면서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꼈다.

나는 어디에도 어울리지 못했다. 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가족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것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은 자신들의 정신건강 문제 때문에 고군분투했다. 부모님이 그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삶에 필연적인 도전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는데 필요한 도구, 기술, 전략, 사회적 숙련도를 배우는데 있어 매우 공허했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나는 ‘정신질환자’로 비난 받기 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사회적으로 어색하고, 불편하고, 호기심이 많고, 격렬하고, 혼란스럽고, 슬프고, 외롭다는 것은 유해한 약물치료를 받아야하는 ‘증상’도 아니며, 시설에 격리되어야 하는 전제조건도 아니다.

정신건강상의 이유로 약물을 복용하고, ‘부적절한’ 행동을 진정시키기 위해 약물을 복용한 아이들 및 십대들의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운 좋게 총알을 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행히도 그것은 내 삶의 이야기의 일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아주 잠깐 동안 상담사를 만났던 것을 기억한다. 그는 친절하고 주의 깊었고, 약물치료를 결코 내 치료의 일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만약 뇌 발달 과정에서 너무 일찍 약물치료에 의한 독성에 노출되었다면 내 삶이 훨씬 더 힘들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2001년 대학시절 졸로프트(zoloft)라는 약을 알게 됐다. 앞서 내가 말했듯이, 무언가 불편한 무거운 느낌이 지속적으로 존재했다. 내가 느끼는 것들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전문가가 나보다 내 마음과 몸과 영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고 믿도록 교육 받았기 때문에, 상담사와 약속을 잡는 것으로 지시를 따랐다. 상담사와의 첫 번째 세션 후에 나는 졸로프트 50mg을 복용했다. 약 2주 동안 그 약을 복용한 기억이 난다. 나는 울음을 그쳤을 뿐 아니라 울 수도 없었다.

이러한 변화는 확연했다. 그때 나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비록 당시 그 일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인식은 부족했지만, 약물치료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졸로프트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지만 내 삶은 영원히 변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다양한 알약이 나의 슬픔의 ‘증상'에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시험 당하는 환자가 됐기 때문이다.

2002년에 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한 이후, 나는 4년 동안 아무런 도움도 없이 주먹을 움켜쥐고 버텼지만 여전히 불편한 그 끈질긴 느낌을 떨쳐내지 못했다. 2006년에 학교로 돌아갔지만 다시 압도당하는 일을 겪었고 정신건강의학과를 자주 다니기 시작했다.

거기서 나는 프로작으로 시작하길 원하는 또 다른 치료사를 만났다. 집에 가서 프로작 관련 논문을 찾아보며 두려움과 성공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던 게 기억난다. 프로작을 복용할지 말지와 관련하여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그러던 중 나에게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연구를 발견했다. 그것은 정신과 약물의 플라시보 효과와 장기적으로 심신에 얼마나 해로운지를 근거로 하여 복용에 반대하는 연구였다. 나는 그 논문을 치료사에게 전달했고, 다음 만남에서 그것에 관해 논의했다.

나는 그 치료사가 그 논문을 읽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나에게 정신과 약물 복용을 권유했기 때문에 그 논문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근본적으로 그는 이러한 약물들이 해로운 측면이 있기보다는 오히려 도움이 더 많이 된다고 말하면서, 평생 동안 이 약을 복용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다 다르다.” 결국, 나는 프로작을 복용한지 1년 정도 후에 중단했다. 아직도 나는 그런 정신과 약물을 복용하는 것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약 2년 동안 어떤 진로를 택할지 헛고생을 하고, 여기저기서 이상한 일을 하고, 열정적으로 시작해서 빠르고 강렬하게 끝나는 관계의 힘들고 기나긴 길을 경험한 후 2008년 1월 나는 생을 마감하려 했다. 히스레저가 자살한 직후였다. 그 소식을 듣고 그가 그렇게 성공적으로 목숨을 끊을 수 있었다는 것이 부러웠다.

어떻게든 3가지 다른 종류의 약물(졸로프트, 트라조도네, 세로겔)을 복용하려 했다. 이 세상을 떠나려고 서둘러, 나는 그것들 모두를 꿀꺽 삼키고 잠에서 깨지 않기를 바랐다. 음, 잠에서 깨기도 하고, 자세한 것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이후 나의 삶이 바뀌었다.

입원 기간 동안 나는 보석을 발견했다. 그때 병원의 어떤 사회복지사가 내게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고, “아하”라는 순간이 찾아왔다. 우리는 내가 한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즉시 희망이 막 문을 두드리는 것과 같은 강력한 흥미가 일어났고, 내 삶을 끝낼 수 있는 환상이 아닌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감동을 받았고, 퇴원하고 나서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나의 투쟁적 경험을 활용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자포자기 상태였다. 자살 시도 때 많은 알약을 복용한 후 나의 뇌 화학자(brain chemist)는 내 마음을 안정과 균형의 상태로 되돌리는 데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다. 나는 여전히 어떻게 내 삶을 끝낼 것인가의 문제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두 달 후, 이전에 복용한 알약들이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코스트코 사이즈의 타이레놀 병을 삼켰다.

음, 그것도 효과는 없었다. 다른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거기서 ‘양극성장애 1형, 경계성인격장애, 기분부전장애, 범불안장애’까지 다양한 진단 목록이 달린 나를 발견했다.

나 자신이 상실의 원인이라고 믿기 시작했고 매우 두려웠다. 그러나 여전히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살아있는 내면의 목소리가 나의 신성(divinity)이 깨어나도록 쿡쿡 찌르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두 번째로 입원했을 때, 정신적 어려움과 투쟁하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게다가 우울증에 대처하는 방법, 불안관리 도구, 분노 관리, 인지행동치료, 미술치료 등에 참여하면서 이러한 모임을 진행하는 정신건강 종사자들에게 주목했다.

그곳에서 또 다시 보석 같은, 빛 같은 순간, 이 난장판에서 빠져나갈 길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통해 내가 겪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우연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의 목적을 발견하게 됐다.

이 모든 것은 내가 가는 길의 일부였다. 나의 정신건강에 대한 살아 있는 경험과 새로이 발견한 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한 열정을 함께 가지고, 다른 동료들을 위한 등불이 될 것이라 결심하고 병원을 떠났다.

나는 많은 이들이 이런 사람을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부른다는 것을, 정신건강 분야에서 가장 훌륭한 전문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상대방의 정신건강을 이해하려고 할 때라야 당면한 수수께끼를 이해하고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2008년 두 번째 자살 시도 이후 어떤 약물도 다시는 복용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다른 길로 가려는 내면의 결정이 나에게 매우 명확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입원 후, 나는 집으로 이사를 했고 부모님과 함께 거주했다.

하지만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몇 년 동안 나를 괴롭혔던 그런 모든 부적절한 감정들이 다시 추악한 머리를 치켜들었다. 당시 직장에서 건강보험을 들었기 때문에 직장을 잠시 쉬면서 집중적인 외래 프로그램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선의에서 비롯됐겠지만 프로그램화된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또 다시 정신과 약물을 복용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나는 지속적으로 거부했다. 늘 그렇듯, 약물 기반 패러다임(drug-based paradigm)은 내게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느끼게끔 만들어 버리는 것으로 말이다.

약물 치료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프로그램의 치료사는 내가 떠나기 전 매일 구두로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도록 했고, 나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겠다는 계약서에 서명을 하게 했다. 나는 약물 치료를 하지 않으면서 내 영혼의 어두운 밤과 삶의 불가피한 좌절을 다룰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 새로운, 그리고 보다 더 준비가 갖추어진 프로그램을 수료했다.

2009년 1월, 나는 사회복지 영역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신건강 재활 분야의 석사 과정을 시작했다. 변화가 나에게 항상 어렵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도전은 나에게 엄청난 양의 벽돌처럼 다가왔다.

학교를 다닌지 첫 주 만에 온전히 잠을 자기가 어려웠고 4주 동안 나는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했지만, 수면부족으로 매우 편집증적인 상태가 됐다. 내 마음은 최악의 시나리오와 두려움으로 쿵쾅거렸고 슬프게도 나는 곧 무너질 것 같은 상태가 돼 결국 정신과 의사와 진료 약속을 잡았다.

그는 레메론(Remeron)이라는 항우울제를 복용하라고 설득했고, 이것은 “또한 수면을 도와줄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약을 곧바로 복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플라시보 효과도 있었고, 의사로부터 언제든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이내 잠을 잘 수 있었다.

그 정신과 의사는 내가 몇 년 후에 레메론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동안 마주치게 될 지옥 같은 경험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거나, 어쩌면 그는 진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 약을 처방했다. 정신건강 분야에서는 환자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적용되지 않는다.

학위를 취득하는 2년 동안,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내가 누구이고 누구인지를 받아들이는 것과 관련된 내면적인 문제를 경험했다.

나는 디톡스 시설(detox facility)에서 물질남용 상담사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너무나 기분이 좋했다. 왜냐하면 마침내 현장에서 나의 개인적인 경험과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활용해 다른 사람들을 도울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직장에서 처음 몇 주 동안 일하면서 벤조류약물(benzos), 항우울제, 진통제 등과 같은 합법적 약물들이 한 개인이 중단하기 가장 어려운 현실이라는 것을 마주하게 되면서 완전히 충격을 받았다.

이 현실은 나에게 너무 당혹스러웠다. 왜냐하면 나는 이 약물들에 중독되어 있었고 약물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마법의 약을 먹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왜냐하면 수면을 잘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살하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알약을 먹었다. 다시는 약물을 복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디톡스 시설을 그만두고 정신건강 상담사로서 지역사회 정신건강기관에 입사했다. 나는 그룹의 리더였고 꿈꾸던 일을 하고 있었다. 2011년에 클래스 중 수석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미래에 대해 흥분했고 중독과 정신건강으로 고생하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정말 능숙했다.

하지만 동시에 신경안정제, SSRI, 항우울제, 벤조류약물 등의 장기적인 사용으로 인한 치명적인 결과를 다시 한 번 목격했다. 일하면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경험했던 것과 유사하게 시작했다. 슬픈 일이었다.

삶에서 낙담하고, 방임과 불행한 사건으로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이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그들은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복용한 향정신성 약물의 영향으로 장애를 얻었다. 나 또한 그런 약물을 복용하고 있었다. 그 약이 내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났기 때문에 현실은 나를 엄습했다. 그 순간이 ‘나의 정신건강 깨달음’의 기폭제가 됐다.

그 당시에 내 꿈도 다시 나타났다.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 사는 꿈이었다. 졸업 후, 그 지역에서 비슷한 일을 하게 됐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완전히 무감각해지고 지쳐버렸다. 그리고 내가 목격한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 위한 강력한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레메론(Remeron)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2015년 초, 나는 레메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안전한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다. 그 의사는 약물을 계속 복용하라고 설득했지만 나의 주장이 완고하자 약물에서 벗어나는 것은 쉬우며 2~3주 안에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 그것이 얼마나 틀린 말인지 곧 알게 됐다.

그 약을 복용한 지 6년 만에 나는 불면증, 극심한 우울증과 불안감, 자살 충동을 동반한 공황발작을 경험하지 않고는 약을 중단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려웠다. 슬프게도 나는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평생 동안 이 약을 복용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내가 레메론에서 '벗어나기(tapering.약물을 서서히 줄여나가는 기법)' 시작할 때, 매우 익숙한 증상들이 다시 나타났다. 그것은 나를 두렵게 했고, 내가 이 인생에 불행한 운명일 수밖에 없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많은 연구 끝에 CITA(Counsel for Information on Tranquilizers, Antidepressants, and Painkillers: 신경안정제, 항불안제, 진통제에 대한 정보 상담)의 과학 고문(scientific advisor)과 접촉하게 됐다. CITA는 "Back to Life"라는 핸드북을 제공함으로써 이러한 약물을 중단하려는 사람들을 지원한다. 이 핸드북에는 다양한 약물에 대한 중단 과정을 설명하고 매우 천천히 안전하게 테이퍼(taper)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과 표들이 담겨있다.

그것은 내게 충격적이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듣는 것보다 이 약물들에서 테이퍼하는 것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를 도와준 CITA 관계자는 나에게 많은 영감을 줬다. 그는 나에게 계속하도록 격려하는 한편, 이러한 약물의 특이성 때문에 지속적으로 어려움을 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해, 레메론에서 벗어나려는 많은 시도 끝에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나는 세 번째로 입원했다. 또 다른 석사 과정을 시작했으며 사회복지를 전공했다.

내 삶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은 이 시기다. 세 번째 입원하는 동안 나처럼 소진되었다고 느껴지는 정신과 의사를 만났다. 의사가 차트를 읽다가 고개를 들기를 기다리며 앉자 그가 물었다. “리튬을 복용한 적이 있나요?”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내 몸을 흠뻑 적신 소름이 기억난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리튬, 정말, 그건 제대로 된 독이야.’ 나는 그에게 “신장 기능을 확인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혈액 검사를 받아야 하는 약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네, 하지만 양극성 장애가 있는 게 분명하고, 이게 당신의 세 번째 입원이에요.”

그는 여전히 나를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나는 크고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는 “알았어요”라고 말했는데, 왜냐하면 이 게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와 언쟁을 하거나 도전한다면 그는 나를 범죄자처럼 가둬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직 그 병원에서 나오기 위해서 그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마음의 어두운 그늘진 구석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바로 그 때, 그 눅눅하고 음울하고 무정했던 사무실에 앉아서 나는 이 합성약물들 없이 내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하루 뒤 리튬 처방전을 받고 퇴원했다. 부모님은 나를 매우 걱정했다. 부모님은 제발 약을 끊지 말라고 애원했다. 나는 약을 먹을 때마다 울었고, 그렇게 일주일을 보냈다.

CITA의 과학고문으로부터 받은 핸드북과 천천히 테이퍼하는 방법에 대한 과정을 설명하는 도표를 다시 참고했다. 그가 옳았다. 정신과 약물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그 과정을 끝내고 약물치료를 중단한 후에도 나는 6개월 동안 계속해서 금단 증상을 느꼈다. 지금은 약을 완전히 복용하지 않은 지 약 4년이 되었다. 게다가 나는 사회복지학 석사 학위를 받은 진정한 사회복지사로서 면허교부(licensure)를 취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내가 지금보다 더 살아있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이겨왔던 많은 전투들이 매우 다채롭고 복잡한 한 폭의 그림을 이루기에(이는 나를 걸어다는 예술작품으로 만든다) 축하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라. 나는 오늘 정말 힘든 날들을 이겨낸 100%의 트랙 기록을 가지고 여기 앉아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제 덜 두렵고 덜 외롭고 내 소중한 삶을 마감하고 싶은 욕망을 덜 느끼고 있다.

비록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할 권리를 인정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나는 ‘정신질환자’가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한 ‘역동적인 영적, 정서적 민감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빛을 보기 위해서 매우 어두운 동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만 했으며 이는 내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그리고 정신건강을 치료하는데 또 다른 현실과 방식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내 남은 인생 동안 약을 복용해야 하는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직면하고, 느끼고, 그리고 나서 그것에서 해방됐다. 진실을 직면하는 데는 아름다움과 자유가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관한 나의 진리를 말함으로써 이 모든 것을 다시 겪을 수도 있는 나를 구해줄 수 있다.

그게 바로 내가 놓쳤던 것이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고, 나의 진리 속에서 살고 있지도 않았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화학적 불균형'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영적 불균형'과 관련이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건강 분야에서 나의 영웅들 중 한 명인 『A Mind of Your Own』이라는 책을 쓴 전체론적 정신과의사(holistic psychiatrist)인 켈리 브로건 박사의 말을 인용하며 마치고자 한다.

“추악하고, 종종 말하지 않는 진실은, 이러한 약물치료들이 습관을 형성하고 심신을 약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유발하는 금단증상은 긍정적이고 단단한 자기임파워먼트(self-empowerment) 태도로 치유하는 과정에 전념하는 당신의 능력을 잠재적으로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재발의 위험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정신과의사 피터 브레긴(Peter Breggin)은 약물중단프로그램을 ‘정신의학 분야에서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개입’이라고 말했습니다.”

Starr R. Stoddard, MSW © 2019 Mad in America Foundation
Starr R. Stoddard, MSW © 2019 Mad in America Foundation

원문읽기(클릭) My Mental Health Awake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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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연 2019-12-15 18:38:36
(박미선 선생님이 언급한 것처럼 소비자나 생존자나 이전환자냐 이용자냐에 따라 입장의 차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저 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결정권'과 '선택권'에 대한 부분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여전히 어려운 부분들이지만 보다 치열한 토론과 고민이 계속해서 진행되면 좋겠습니다.

송승연 2019-12-15 18:37:32
좋은 의견 제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우석 선생님. 저 또한 이 글을 올리기 전에 약간 고민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소위 너무나 '쎈'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죠. 어쩌면 저 글에 표현되었던 것처럼, 저 또한 '약물 기반 패러다임(drug-based paradigm)'에 압박을 받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 그리고 저 또한 저 글의 당사자 활동가가 말하는 것이 100%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 글 또한 한 명의 당사자, 그리고 그의 살아있는 경험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한 번은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생각해보고 논의해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현석 2019-12-13 22:44:45
이 세상에 대한 ‘역동적인 영적, 정서적 민감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빛을 보기 위해서 매우 어두운 동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만 했으며 이는 내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그리고 정신건강을 치료하는데 또 다른 현실과 방식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내 남은 인생 동안 약을 복용해야 하는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직면하고, 느끼고, 그리고 나서 그것에서 해방됐다. 진실을 직면하는 데는 아름다움과 자유가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관한 나의 진리를 말함으로써 이 모든 것을 다시 겪을 수도 있는 나를 구해줄 수 있다.


맘에든 글 중 발췌

정현석 2019-12-13 22:43:15
어려운 단어들이 많아서
제대로 이해 했는지 모르겠다.
특히 자살은 공감대가 아니지만
짧게나머 나의 느낌은

이 당사자는 약을먹으면서 자기를 돌아봤고
단약을 꿈꿨고 나도 가끔 느끼지만
마치 약이 바뀔때마다 인생의 사건이 될 수도
있다. 또다른 고통과 부작용들
하지만 약을 벗어나고 할때마다 강한 약물이 투여되고
증상을 완하하려 먹는 약들이 장애와 부작용을
수반한다는 것에 공감된다.

그리고
치료라는 이름 으로
난 진짜 살고 있는가?온전한 나인가?

글 말미에
"4 년째 약을 먹지않고 있다.
내가 지금보다 더 살아있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이감정 느낌은 정말 나도 느껴보고 싶다.
도대채 어떤건지 잃어버린 건지
잊은건지 모르지만

이당사처럼 확신과 경험이 있어야 가능한가 싶다.




우선 긴 글중에 맘에들었던 부분



비록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할 권리를 인정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나는 ‘정신질환자’가 아니라

장우석 2019-12-13 18:10:50
송승연 박사님 좋은 사례와 연구들로 회복의 패러다임과 당사자패러다임으로 나아가는데 힘써주세요~!
귀한 연구들 잘 이어가시고 좋은 논의들과 의견들 부탁드립니다~! 한국정신건강에 발전이 앞당겨지고 당사자들이 살만한 세상으로 되어가길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