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우 “아무리 악한 사람의 마음속에도 마음의 고향이 있을 거예요…그건 사랑이에요”
박목우 “아무리 악한 사람의 마음속에도 마음의 고향이 있을 거예요…그건 사랑이에요”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0.12.21 23: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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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 박목우 작가 인터뷰
내가 나를 믿을 수 없었기에 정상성의 잣대에 기대
세상과 다른 경험을 이야기하면 낙인 찍히고 배제당해
고통 속에서 환대받았던 경험들이 살아가는 힘이 돼
정신장애 등록은 당사자 요구 사회에 알리는 기회가 돼
정신장애인 아버지와는 삶의 동료...이야기 많이 나누고 싶어
엄마와의 갈등은 사랑하려 했던 방식의 차이였다는 걸 알게 돼
노력하면 된다는 말은 사회적 모순을 개인 책임으로 축소시켜
비정신장애인들이 정신장애인 세계를 이해하고 배워야
종교적 용서는 타자의 고통 외면...정치적 책임 필요해
소외된 삶에 귀기울이는 건 삶을 바꿔내는 힘이 돼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스무 살, 꽃처럼 아름다웠던 시절, 그가 타의에 의해 끌려들어간 곳은 정신병원이었다. 어두컴컴했고 입원해 있던 언니들은 영혼을 태우듯 담배를 피웠다. 자욱한 연기로 가득한 흡연실은 그에게 정신장애인은 이토록 헐벗은 정신으로 세상에 표상된다는 걸 알게 해줬다.

아버지는 조현병 당사자였고 골방에 누워 있다가 어떤 때는 폭력을 행사했다. 어머니는 자신을 그런 아버지를 빗대 힐난했다. 어린 시절의 그가 슬픔을 위로받을 곳은 없었다. 방안에 들어가 우는 것 외에는. 그리고 머리가 커지면서 어머니에게 대들기 시작했다.

이 모든 자기 세계의 아픔은 저 무능한 아버지와 생을 비난하던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나'는 정신질환을 앓지도 않았을 것이고 정신병원에 들어가 인형처럼 꽂혀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입원 후 대학을 쉬었다. 3년 뒤 복학하고 국문학과로 전과를 했다. 그렇지만 자신이 아는 이들은 교정에 없었고 다시 그는 지독한 혼자만의 세계에 웅크리게 된다. 집에 있으면 빗소리마저 자신을 비난하는 환청으로 들렸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더욱 알 수 없었다. 그렇게 20년 가까이 그는 자신의 동굴 안에서 세계를 쾡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은 어디까지 고통받아야 비로소 삶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일까. 이 피로하고 필사적인 삶의 악다구니들이 난동하는 세계에서 그는 선택해 나아갈 방향이 없었다. 자신의 환청과 망상의 경험은 오롯이 그를 ‘정신병자’로 낙인찍었고 그럴수록 그는 더 자신의 세계로 들어가야 했다.

희망버스라는 게 있었다. 회사의 부당한 해고에 항의해 부산 영도의 한진중공업 크레인에 올라 시위하던 해고노동자 김진숙 씨를 응원하는 사회적 연대를 담은 버스였다. 어느 날 그는 그 버스에 올랐다. 그가 세상에 발을 다시 내딛는 시간이었다.

삶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빠르다. 어떨 때는 한없이 느리지만 아프고 외로울 때, 슬플 때 가장 빠른 모습으로 세계를 지나쳐버린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는 건 자신의 이마의 주름을 알려주는 얼굴과 조금씩 하얗게 변해가는 머리카락을 어느 날 거울 속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는 조금씩 세상으로 나왔다. 누가 나오라고 하지 않았지만 어떤 단체에서는 그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환대를 해 주었고 반겨주었고 그의 슬픔과 고통을 들어주었다. 사랑이었다. 종교적 사랑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대한 존중을 담은 사랑이었다.

특히 정신장애인들의 문학 모임인 ‘천둥과 번개’에 가입하면서 기존에 자신이 알던 정신장애인의 사회적 모습 대신 확고하게 자기 철학으로 연애하고 시를 쓰고 사랑하는 이들을 알게 된다. 놀라움이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회복을 근거로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방황하는 정신장애인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먹는다. 아버지를 이해했고 엄마의 사랑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느라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문제였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지금, 이만큼 그는 걸어왔다. 그리고 문학을, 생을 이끄는 힘으로 보고 있다. 최근 그는 <마인드포스트> 문예대전에서 수필로 은상을 수상했다.

박목우(44·여) 씨를 만난 건 지난 17일 <마인드포스트> 사무실에서였다. 다음은 일문일답.

박목우 작가 (c)마인드포스트.
박목우 작가 (c)마인드포스트.

-스무 살, 처음 경찰차에 의해 강제입원을 당했습니다. 어떻게 입원하게 됐습니까.

“지금은 상호작용이었다는 걸 이해하는데 그 당시에는 제가 일방적으로 가족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의 대응은 분노를 표출하는 거였고 그런 방식으로 계속 악순환됐어요. 한쪽이라도 조금씩 양보를 하면 관계가 좀 괜찮아질 건데 서로 한 치의 양보 없이 계속 자기 감정만 발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상황들에 고통을 받았고 그러다가 모든 인간관계가 끊어지고 라디오를 듣게 됐어요. 가수 신해철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신해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망상을 하게 된 거죠. 집이 싫어서 집밖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는데 엄마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셨나 봐요. 그래서 이모 집에 있을 때 경찰차를 불러서 강제입원을 시켰죠.”

-강제입원 당할 때 의식은 있었습니까.

“저는 제가 정신장애가 아니라 단지 화가 많이 나 있는 상태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래서 의사한테 가족치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어요. 이건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전체가 회복돼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가족치료를 요구했는데 의사는 ‘입원을 해야 한다’는 말만 반복해요. 결국 입원하는 걸로 끝났죠.”

-지금까지 몇 번 입원한 겁니까.

“한 3~4번.”

-발병 이후 선생님은 침묵하거나 정상성이라는 집단에 동원되거나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정신장애 운동 자체가 없었어요. 그때 저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정신병자 하나였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저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과 너무 다른 경험을 하고 있었고 그 경험을 얘기하면 곧장 정신병자라는 낙인이 돌아왔기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정상성에 동원된다는 건 저를 믿을 수 없고 제 자신으로 살 수가 없기 때문이었어요. 너는 비정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의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암묵적 강요가 있었기 때문에 정상성을 끊임없이 욕망하고 그들 기준에 맞춰가려고 했어요. 나 자신은 이상한 존재, 왜곡된 존재로 남으면서 완전한 정상성의 잣대에 기대려고 했던 시기들이었어요.”

박목우 작가 (c)마인드포스트.
박목우 작가 (c)마인드포스트

-세상에 나오기까지 20년 동안 골방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선생님이 깨달은 삶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을 따라다니면서 쌍용자동차나 재능교육 같은 사업장의 해고와 파업 문제에 대해서 알게 됐어요. 또 진보적 지식인들의 모임인 ‘말과 활’에서도 자원활동을 잠깐 했는데 그 분들이 저에게 되게 잘해줬어요.

제가 말도 없고 어떤 도움을 주는 존재도 아니었고 연대 단위가 있어서 같이 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혼자 와 있는데도 환대해주는 분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 환대를 받으면서 느낀 건 반겨주고 사람의 구실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게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 힘이 된다는 거였어요.

그 환대의 경험을 통해 이제는 저도 제가 아닌 사람들, 정신장애인 당사자이거나 가난하거나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에 대해 환대의 자리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병원 첫 입원 후 20년 뒤에야 정신장애인 등록을 했습니다. 국가에 어떤 도움을 받고 싶었던 겁니까.

“그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어요. 아파서 공부를 할 수가 없었고 직업을 가질 수도 없었고 그냥 집에서 약 먹고 자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일 년 정도 같이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정신장애 등록을 했어요. 그리고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까 내가 장애인으로 등록하면 뭔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죠. 사실 그때 바닥을 친 거죠. 그러면서 정신장애인으로 등록을 하고 내가 국가로부터 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받아야겠구나 생각을 하게 됐어요.”

-장애 등록을 망설이는 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 주고 싶습니까.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우리 자체로 온전하고 완전한 인격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으면 해요. 정신장애인으로 등록한다는 건 국가적 시스템에 포함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힘이 결집돼서 당사자의 요구를 사회에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환자 정체성만 가지고 있으면 자신의 증상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정신장애인들을 틀 짓고 있는 구조라든가, 정신장애인 보편의 문제에 대해 모르게 되는 것 같아요. 오히려 정신장애인이 돼서 당사자의 목소리를 냄으로써 우리의 권리를 스스로 만들어가고 찾아가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는 조현병 환자였고 어두운 골방에 누워있는 무능한 존재였습니다. 아버지는 선생님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아버지는 저에게 큰 난제(難題)이긴 해요. 그런데 지금은 아버지를 이해해요. 아버지는 어린 시절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어요. 항상 지적당하고 비판당하고 어른들 말이니까 따라야 한다는 이야기를 아버지는 늘 들어온 거죠. 그래서 사랑하고 관계 맺고 소통하는 과정에 굉장히 미숙하세요.

아버지가 50년 전에 정신장애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어떤 서비스도 없었어요. 이제는 아버지는 정신장애를 같이 겪고 있는 동료이기도 하고 당사자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동료가 된 것 같아요. 아버지도 제가 등록하는 걸 보면서 이번에 정신장애 등록을 하셨어요. 아버지랑 정신장애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싶어요.”

-어머니는 선생님의 청소년기에 폭언을 했고 침을 뱉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상처를 ‘증오의 방식으로밖에 어머니를 사랑할 수 없었다’고 했는데 무슨 말씀입니까.

“사랑했기 때문에 증오하는 거였죠.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했지만 어머니에게서 돌아온 건 차디찬 말들이었거든요. 오빠에게는 굉장히 배려를 하면서도 저에 대해서는 ‘아버지를 빼다 박은 무능한 아이’라며 많은 상처를 줬어요. 어렸을 때는 울고 말았는데 나이가 드니까 그게 분노와 증오로 바뀐 거에요. 증오의 방식으로 바뀌면서 어머니를 사랑할 수 없게 된 거죠. 싸우고 상처 주는 관계로밖에 서로를 사랑할 수 없게 된 거였죠.

저는 그게 불행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주변에 그런 분들이 많더라고요. 저의 생애사를 돌아보니까 그런 사람들이 이해가 됐어요. 정말 가슴 속에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껴주고 싶은 마음, 평화를 짓고 싶은 마음이 있겠죠. 그런데 그 마음이 꺾이면서 증오의 방식으로밖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경험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어요.”

박목우 작가 (c) 마인드포스트
박목우 작가 (c) 마인드포스트

-아주 늦게, 오랜 상처 뒤에 어머니와 나의 관계는 더 이상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상처를 이해하면서부터였을까요.

“그렇죠. 어머니와는 굉장히 좋아졌어요. 누가 그러더라고요. 여자 혼자서 자기를 끌어줄 인맥도 재력도 없는 상태에서 사회생활을 하고 한 가정을 건사해야 하는 건 당시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라고요. 저의 어머니를 굉장히 이해할 것 같다고 저에게 얘기를 해 주신 분이 있었어요. 저도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를 바라보게 됐고요.

그러고 나니까 어머니가 겪었을 어려움이 보이더라고요. 어머니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에 미숙했던 거 같아요. 사람하고의 관계는 소통과 마음의 교통이 중요한데 외적인 것에만 항상 중점을 뒀거든요. 그래서 제가 대학교 다닐 때 부자들이 다니는 학교니까 기죽지 말라고 용돈도 많이 주시고 예쁜 옷을 사준다든가 제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원 밥이 맛이 없을 테니까 반찬을 해 온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어머니 나름의 애정 표현을 해 온 거죠.

그런데 저는 그때 어머니의 그런 사랑의 방식을 느끼지 못했어요. 임계점(臨界點)이라고 하죠. 어느 순간 어머니가 노래 한 곡을 들으면서 ‘아, 목우를 사랑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변하기 시작했어요. 제 얘기를 들어주고 안아주고 포용해 주고 하면서 변화가 있었어요. 저도 굉장히 노력을 했고요. 지금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려고 했던 사람들이었구나, 그런데 서로의 방식이 달랐고 복잡한 가정사가 우리 마음을 막았던 거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고향의 훼손 때문에 고통받았고 고향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이데거는 치유의 개념을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자, 사명으로 나아가는 자라고 했는데 그 이미지와 겹쳐지더군요.

“그렇게 큰 의미를 두고 얘기를 한 건 아니고요. 그 생각을 했어요. 아이들을 보면 굉장히 잘 웃고 순수하고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반응을 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우리 마음 안에는 돌아가야 할 고향이 있는 거 같아요. 어린 시절, 편견 없이 사람을 사귀고 누구나 반기고 세상의 다정한 경험들을 껴안았던 기억들이 있어요. 동물이든 친구든 세상의 다정한 기억들에 가까이 갔던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거든요.

아무리 악한 사람의 마음 속에도 마음의 고향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증오의 방식을 얘기했지만 결국 그 발단이 된 건 사랑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사랑이 상처를 입으면서 조금씩 증오로 변해간 건데 누군가를 사랑했던 그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고향을 실현할 수 있어요. 그 고향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조금만 더 노력하면 정상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자기 계발류의 용기는 어떤 잘못과 오류를 담고 있을까요.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는 말은 뒤집어 말하면 네가 잘 못 되는 이유는 다 너의 책임이라는 말과 마찬가지잖아요. 실업이나 삶의 곤경에 빠진 건 그 사람만의 잘못이 아니거든요. 여러 사회적 관계들이 연동해서 실패나 상처의 경험을 하게 되는 건데 사회는 그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넘겨요. 사회는 완벽한데 개인이 잘못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거죠.

사랑도 그래요. 너와 나의 만남으로 이뤄지는 사랑도 있겠지만 두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은 둘이서 사랑하는 것만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내가 노력해서 나만 회복이 되면 돼가 아니라 아픔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나는 그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고 무엇을 함께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보는 게 사랑의 시작이에요.

나만 치료해서 행복해지면 된다는 생각은 사회적 연대에서 볼 때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주류 사회는 우리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지 않습니다. 다만 이상 심리, 임상심리라는 의료적 시선으로 접근해요. 이는 어떤 불공정을 낳을까요.

“의료적 관점에서 정신장애는 손상이고 치료해야 할 이상이고 문제라는 식으로 프레임화 되잖아요. 사람이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간다고 하면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정신장애인은 환청이 들려, 혹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라고 말하면 거기에 낙인을 찍고 이상한 사람으로 본다는 거죠. 똑같은 아픔일 뿐인데 사람들의 정신장애에 대한 편견은 공고해요.

저는 정신적 어려움을 이상(異常)이라고 규정하는 의학적 시선에 반대해요. 농인(聾人)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수어를 배워야 하잖아요. 그처럼 정신장애인의 환청이나 망상, 강박도 하나의 세계이고 그럼 그것을 병리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비정신장애인들이 이해하고 배려하고 소통하기 위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임상심리와 이상심리에 굉장히 부정적 관점을 갖고 있어요.”

박목우 작가 (c) 마인드포스트
박목우 작가 (c) 마인드포스트

-자유는 다른 사람의 아픔과 처지에 공감하고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할 때 자유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치 김남주 시인의 시에 ‘만인을 위해 일할 때 나는 자유다’라는 시구절이 떠오르더군요.

“바슐라르(프랑스 철학자)의 책에 그런 내용이 나와요. 일상의 꽃덤불을 넘어서 볼 수 있는 새 시각이라는 이야기가 잠깐 언급이 되는데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됐어요. 우리는 삶이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삶은 사실 여러 가지 축들이 교차하는 장이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삶은 흘러가는 것이라고 보는 관점 대신 삶을 정치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정치화시킨다는 건 우리가 삶에서 끊임없이 더 나은 어떤 것을 요청하고 타인과의 소통을 넓혀가는 쪽으로 만들어가는 노력의 과정이에요. 삶이라는 영역이 자연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기보다 정치의 영역이 아닐까요. 김남주 시인도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라고 이야기한 게 그거 아닐까 싶어요.”

-선생님이 믿는 종교에서는 참으라, 용서하라고 했지 억압에 대해 대항하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니체가 말한 노예 종교로서의 한계를 의미하는 걸까요.

“종교는 도그마로 기능할 수 있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상황과 맥락이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한데 그것들을 한 번에 재단할 수 있는 진리가 있다고 환상을 심어주는 게 종교라고 생각해요. 종교에서 요청하는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말은 너무나 좋은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상냥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면서 정치적인 책임을 망각하는 삶이 있을 수 있어요.

종교인들이 너무나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삶에서 타자가 겪고 있는 고통이나 아픔을 외면하게 된다면 정치적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 되고 그럼 그 삶은 비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약을 먹는 몸을 말했습니다. 약의 효능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억압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억압입니까.

“의사들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 약을 먹어야 한다는 얘기를 빼놓지 않는데 여기에 문제 제기를 하고 싶어요. 약보다는 전인적인 회복의 개념, 아니면 다가가려는 진실한 노력이 사람을 변화시켜요. 약 먹으면 불안은 줄겠지만 사회적으로, 혹은 관계에서 발생했던 불안의 원인을 약이 제거해줄 수 없잖아요. 저는 약물로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거나 약물은 필수니까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 입장에는 반대하는 편이에요.”

-문학상담을 배우려고 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가장 섬세하게 두드릴 수 있는 부분이 문학이잖아요. 저는 동료상담을 하면서도 느낀 건데 많은 정신장애인들이 의미의 빈곤에 시달린다고 생각을 해요. 이들이 교육을 받는다거나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없어서 그냥 환청이나 망상 속에 살고 있어서 굉장히 의미의 빈곤에 시달려요. 그 문을 열어주는 게 문학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다수자의 관점을 따르거나 자기 계발류의 내용을 많이 참조해요. 하지만 문학은 다른 이야기를 하거든요. 문학은 소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데 구호나 논리적인 말로 풀어내는 게 아니라 사람의 감성에 직접 와닿는 이야기로 풀어내요. 저는 정신장애인들이 문학을 통해서 자기 삶을 보다 섬세하게 보듬었으면 좋겠어요. 그 안에서 작은 진실들과 교훈들이 계속 발생한다면 그들의 삶의 회복에 그것보다 좋은 건 없다는 생각에 문학상담을 준비하고 있어요.”

-학비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대학원 과정인데 지금 학비를 못 모았어요.”

박목우 작가 (c) 마인드포스트
박목우 작가 (c) 마인드포스트

-언젠가 선생님은 바슐라르를 이야기하면서 그의 글 ‘이 책에서 지식을 찾아서는 안 된다. 이 책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는 말을 인용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바꿔 ‘삶의 텍스트에서 지식을 찾아서는 안 된다.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더군요.

“맞아요. 지식은 정보잖아요. 정보가 주는 것도 있지만 저는 모든 말들의 너머에 있는 건 결국 소통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말이라는 건 장식적으로 꾸며낼 수 있지만 소통은 너와 내가 만나서 어떻게 관계 맺어나갈까를 이야기해 주는 거거든요. 저는 그게 관계가 주는 즐거움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일본 베델의집 관련 책을 읽었는데 거기에 ‘아래로 가는 정체성’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정신장애인은 축복받은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더 욕심을 내고 탐욕을 부릴 때 증상이 와서 탐욕을 제어해 준다는 이야기를 읽었거든요. 우리가 어떤 지식을 추구하다 보면 자신만의 성을 쌓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마음을 열고 소통할 수 있고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즐거운 건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바슐라르는 즐거움이라고 표현했지만 저는 서로가 다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그게 문학이 할 수 있는 어떤 게 아닐까 싶어요.”

-선생님은 아팠던 동안 심리상담은 비용이 너무 높았고 지역 재활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부분이 있지 않나요.

“지금도 그렇죠. 저는 그나마 책도 찾아서 읽고 사람들하고 무람없이 어울릴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됐거든요. 그런데 정신장애인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거예요. 이분들이 사회에 나와서 일을 찾고 자신의 역할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정신장애 운동이 그런 분들의 삶을 되살려내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치유된 당사자들이 다른 당사자에게 가서 자신의 경험을 나눠줄 수 있고 이런 식으로 확장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겠죠. 정신장애인의 빈곤율이 장애 유형 중에서 최하위이고 직업을 갖는 것도 최하위인 통계를 보면서 우리가 아직도 황폐한 세계에 살고 있구나 싶었어요.

저도 발병한 지 25년 정도 됐을 때 정신장애인 당사자 운동을 알게 됐고 제 삶이 많이 변했거든요. 당사자 운동을 더 활성화해서 집밖을 나오지 못하는 분들, 세상을 떠돌면서 어디에도 마음 붙이지 못하고 고통받고 있는 분들에게 찾아가 그들에게 다시 삶을 회복할 수 있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걸 알려주는 노력을 기울여야 된다고 생각해요.”

-정신장애인 문학단체 ‘천둥과 번개’를 알게 되고 참여하면서 선생님은 엄청난 삶의 전환기를 맞게 됐다고 했습니다.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처음 천둥과번개에 갔을 때, 제가 알고 있는 정신장애인들의 모습과 너무 달랐어요. 외래 가서 보면 아무 말도 없고 무기력하게 자기 차례만을 기다리고 있는 분들을 항상 보게 돼요. 그리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 언니들이 담배를 되게 많이 피우고 병원에서 자해를 한 언니도 있었어요.

또 저랑 친한 사람들이 방황하고 힘들어하는 모습들만 보다가 천둥과번개에 갔는데 어떤 사람은 시인이었고 어떤 사람은 연애를 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동료상담을 하고 있었어요. 자신의 삶이 너무나 확고한 사람들이 많은 거예요. 그걸 보면서 정신장애인의 삶에 대한 마음이 많이 바뀌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부모님에 대한 불신이 안 없어져서 부모님이 저를 누군가에게 팔아넘길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들이 제가 그런 얘기를 하면 ‘목우야, 그건 망상이야’라고 얘기를 해 줘요. 그 이후로는 그런 생각을 별로 안 하게 됐어요.

그리고 좋았던 건 망상이나 환청을 갖고도 우리가 친해질 수 있다는 거였어요.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이상한 얘기라고 하겠지만 그 이야기를 통해 서로의 아픔을 보듬으면서 관계가 깊어지고 돈독해진다는 게 무엇보다 좋았어요.”

-선생님이 말한 ‘회복의 가능성은 다양하다’는 것을 바꿔 ‘회복으로 가는 길은 다양하다’로 풀이되더군요.

“회복으로 가는 길은 결국 자기 자신이 찾는 건데 그때 어떤 선택지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서 삶을 선택하고 책임져 나가는 것보다 좋은 건 없겠죠. 그런데 인간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은 굉장히 여러 가지인데 정신장애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거의 없어요. 취업도 하기 어렵고 병원밖에 없으니까.”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 정신장애인의 몸을 배제하고 차별해도 그것에 대해 우리는 어떤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할까요.

“자본의 시선에서 우리는 무능력하고 쓸모없는 존재죠. 자본주의 체제가 발달하면서 일할 수 있는 사람과 일할 수 없는 사람을 구분했고 그 과정에서 정신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시작됐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장애의 범주도 그렇게 생겨났죠.

그런데 자본에게는 우리는 쓸모없는 존재지만 우리가 삶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한다면 오히려 그게 사회 전체 구조를 바꿔내는 힘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삶, 자기 통치와 자기 경영의 시대에는 타인을 돌아보지 않고 나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하는 목소리가 주류겠죠.

하지만 지금 소외돼 있는 삶을 되살려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자고 이야기하는 건 자기에게만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삶을 바꿔낼 수 있는 혁명적 힘이 된다고 생각해요.”

-선생님은 이타적 존재입니까.

“저요...아니요(웃음).”

박목우 작가 (c) 마인드포스트
박목우 작가 (c) 마인드포스트

-이타적 삶을 지향하는 건가요.

“지향하고 있지만 아직 이타적인 존재는 아닌 것 같아요. 우선 저는 제 안에 제가 너무 많고요. 요 몇 년 사이에 정신장애를 몇십 년 간 앓아오면서 제 안에 고여 있던 이야기들을 말하기 시작했어요. 사실 삶으로 풀어낸 지는 얼마 되지 않아요.

기존에는 예쁜 글을 쓰는 게 중요했는데 지금은 내가 쓴 글에 책임을 지는 존재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가끔 제가 썼던 글들을 읽어보면 ‘아, 내가 이때 이런 이야기를 했었지. 이제 이렇게 살아야겠다, 흔들리지 말아야겠다, 이 지향을 갖고 삶에서 실천해가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돼요.

예전에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시간들보다 혼자 멍하니 있거나 책을 읽는 시간이 많았어요. 그 시간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쓰기 시작했고 이걸 넓혀나가면 지금 제가 이해를 못할 거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외로울 때, 아플 때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까.

“노래는 되게 많죠(웃음). 천지인의 ‘청계천8가’를 부를 때도 있고요. 꽃다지의 ‘당부’라는 노래도 있어요. 떠나간 동지들을 생각하며 부르는 노래인데 거기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그 상황에 처하더라도 우리는 만날 사람들이었다’는 가사가 있어요. 그건 소외받고 있는 자리, 고통받고 있는 자리, 빼앗기고 있는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또 만날 거라는 이야기여서 이 노래를 많이 좋아해요.

기독교 중에는 내가 이야기하듯이 살고 그렇게 죽게 되기를 노래하는 성가가 있어요. 그 이야기가 되게 좋았어요. 우리가 말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해나갈 수 있어야 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공연(公演)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을 실천해나갈 수 있는 구체적 방법들을 삶 속에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탐구해야 한다는 의미죠. 그게 좋아요.”

인터뷰가 끝나자 그는 포근해 보이는 캐시미어 옷을 걸치며 "엄마가 사 주셨어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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