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한국에 가고 싶지 않다”는 조현병 당사자 그를 추모하며
“다시는 한국에 가고 싶지 않다”는 조현병 당사자 그를 추모하며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0.12.28 19: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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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효 선생 70세로 타계...권위주의 시절 고문에 의해 간첩 허위자백
중앙정보부가 만든 것은 인간의 삶을 거세시키는 일
다시는 인간을 이념에 맞춰 재단하는 독재가 나와서는 안 돼
‘조현병’으로 정신병원 전전한 김 선생에 질병적 ‘동지’로 연대의 인사 보내고파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다가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김승효(향년 70세) 선생이었다. 기자는 그를 모른다. 단지 기사 몇 꼭지를 엮어보면 그의 생은 이렇다. 재일동포인 그는 1974년 서울대 경영학과 유학 중 ‘북한의 지령으로 반정부 투쟁을 선동했다’며 간첩으로 몰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그 고문의 강도와 아픔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없지만 그는 고문에 못 이겨 결국 간첩이라는 거짓 자백을 하게 된다. 이후 법원은 징역 12년에 자격 정지 12년을 선고했다. 그에게 붙은 죄명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이었다.

6년이 지난 1981년 8월 가석방됐지만 고문 후유증을 겪으며 20년 이상 정신병원을 전전하게 된다. 그의 주요 정신질환명은 ‘조현병’이었다.

기자가 그의 생애를 바라보게 된 것은 그가 지닌 ‘조현병’ 진단명 때문이었다. 그 진단명은 기자 역시 겪고 있는 고통이기에 더욱 그랬다. 이전에 이 병명은 ‘정신분열병’이었다.

조현병은 청소년기나 20대에 많이 발생한다. 환청을 듣게 되거나 환시, 환각을 느끼고 누군가가 자신을 ‘탄압’하고 있다는 망상에 시달리면서 병이 가속화된다. 한 번도 그런 질병이 있다는 걸 생각해본 적도 없는 가족이 어떻게 한 번에 환자의 질병적 속성을 알 수 있겠는가.

기자가 20대 후반에 4년 정도 머물렀던 남미의 한 나라는 자고 일어나면 온통 뉴스에 ‘누가 피살됐다, 살해 협박을 받았다, 은행이 털렸다, 조직범죄단과 경찰의 총격이 오갔다’ 등의 소식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왔다.

넓은 땅덩어리 때문에 다른 주(州)로 현금을 옮길 때 비행기를 이용하는데 이 이동 경로를 아는 범죄단들이 차를 몰고 항공 주차장으로 들어가 막 이륙하려던 비행기 앞부분에 올라 조종사를 총으로 위협해 멈추게 했다. 그리고 신속하게 동체 내부에 있는 현금을 털어 차를 타고 유유히 활주로를 빠져나가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 나라의 기사를 가끔씩 읽어온 기자는 은행 주변의 주택을 매입한 뒤 그 주택에 지하 동굴을 뚫어 은행으로 잠입하려했다는 범죄 기사를 접했다. 경찰이 확인한 동굴은 정확하게 은행 창구 밑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기자는 큰 슬픔을 느꼈다.

그때, 20대 청춘의 눈에 그 나라는 시리게 아름다웠다. 무수하게 피어난 이름을 알 수 없는 이국의 꽃들과 나무들. 사람들의 유순한 웃음들은 청춘을 아프게 여겼던 기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렇지만 거기까지였다. 기자는 어느 날부터 그 사회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매일 죽고 죽이는 ‘피’의 참극들을 보면서, 그리고 이토록 풍요로운 나라에서 먹을 음식이 없어 음식 쓰레기가 쌓인 쓰레기 언덕에 올라 남이 먹다 버린 밥을 손으로 주워 먹던 아이들의 모습은 기자에게 이 땅의 존재 이유, 국가의 존재 이유, 정치의 이유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기자는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슬펐다. 다 떨어진 슬리퍼를 신고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밤에 신호등 앞에서 잠시 대기하는 차량에 접근해 총을 들이밀면서 돈을 요구하는 이들은 결국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무서웠다. 그리고 그 공포와 경악은 육체에 영향을 미쳤다. 나는 밥을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았고 입에서는 악취가 났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우는 날들이 많아졌다. 배가 아팠지만 배변도 나오지 않았다.

우울했다. 그리고 아팠다. 그 와중에 신원불상의 흑인 아이들이 내 집에 들어와 옷과 돈을 훔쳐간 것을 집에 돌아와 목격했을 때, 나는 ‘이 땅은 내가 더 이상 있어서는 될 곳이 안 되겠다’는 비참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들은 어떻게 내 집의 열쇠를 복제했던 것일까.

이 같은 일련의 사건이 터지면서 기자는 거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치 층간소음을 오래 당하면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처럼 나는 정신의 층간소음에 몇 달 노출되면서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모두 무너져내렸다. 게다가 나는 정신적으로 퇴행을 거듭했다. 어린애처럼 기자는 무서움에 덜덜 떨었다.

그 나라를 벗어난 비행기 안에서 기자는 ‘다시는 이런 나라에 오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후 한국에 돌아오면서 나의 정신적 심리적 퇴행과의 싸움은 20년이나 이어졌다. 모든 것이 두려웠고 모든 것이 싫었다. 그 나라의 이름 자체도 떠올리기 싫었고 그들의 웃음도 모두 거짓 같았다.

아, 귀국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던 어느 날, 교정에서 한 백인이 기자에게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기자는 분노하고 있었다. 기자는 “이토록 풍요로운 땅에, 이토록 가난한 이들이 많다는 건 뭔가 니네 나라의 정치가, 경제구조가 잘못된 거 아니냐고. 그럼 총을 들고 싸워야하지 않냐고. 종교의 사랑에 앞서 총을 들어야 하지 않냐”고 치를 떨듯이 말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의 교회로의 초대를 거부했다.

한국에 와서부터 병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나는 퇴행해 있었고 모든 사람이 무서웠다. 고향집에 있었지만 그 1년 동안 나는 거의 집밖을 나가지 못했다. 사람들의 쿨럭이는 기침 소리에도 기함(氣陷)하듯이 놀랐고 분노했다.

그리고 살아야 했다. 기자로서 일을 시작했지만 내면의 고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가운데, 특히나 대인공포증을 가진 자가 사람들을 인터뷰하러 다닌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을 수 있었다. 기자는 질병 이후의 인생의 시험을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험은 늘 평균 이하의 점수였고 때로는 낙제였다. 기자는 직업을 찾았고 떠났고 되돌아왔고 다시 떠났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서 기자는 사람들에게 술을 마시고 싶다며 길거리에서 구걸을 했어야 했다.

그 나라에서 4년을 지냈고 이후 한국에 돌아와 20년을 지냈다. 그렇지만 여전히 기자에게는 그 나라에서 겪었던 슬픔과 공포를 내재화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어느 날 아무런 이유 없유를 찾을 수 없는 두려움에 떨며 누나와 같이 찾아간 정신과에서는 기자의 병명을 ‘정신분열병’으로 진단했다.

의사는 건조하게 물었다. 누군가 당신을 해할 거라고 생각하나. 누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나. 기자는 ‘네’라고 답했다. 오늘이 몇월 며칠이냐는 첫 질문에 거부감을 가지긴 했지만 기자는 그의 질문에 ‘이성적’으로 답했다고 생각한다.

삶의 고통은 정신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경제적 빈곤을 갖고 찾아왔다. 알코올중독에 가까운 음주, 사람들이 두려워 피해 다녔던 날들, 길거리에서 술에 취해 혼자 하늘을 향해 울부짓던 날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나가던 사람들의 모습들. 내 30대는 그렇게 철저하게 무너지는 시간들이었다.

40대에 기자는 처음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대학병원이었다. 약을 처음으로 꾸준하게 먹기 시작했고 살은 점점 쪄갔다. 사람들에게 눈을 맞추지 못할 정도로 위축되어 있던 기자에게 인권이 보장된 대학급 정신병원에서의 삶은 그때서야 비로소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갈음해야겠다.

이후 공동생활가정과 우연히 찾아온 직업의 기회인 기자로서의 생을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만, 말이다. 기자는 남미의 그 나라를 잊을 수가 없다. 혹 남들은 그저 그 나라의 사정일 뿐 우리 삶과는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참 똑똑한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괜히 그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억압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면 그가 서 있을 수 있는 영토는 그만큼 좁아지는 것이다.

그렇게 분노한다고 해서 그 땅이 어떤 정의로운 나라로 거듭나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기자는 머리가 나쁜 후자였다. 기자는 이미 그 땅을 저주하고 미워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아무 상도 받지 못할 분노를 왜 했던 것일까.

<마인드포스트>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지 이제 2년 6개월이 지났다. 가끔은 이전의 삶을 반추해보고는 한다. 이만큼이라도 걸어왔다는 것에 다행인지, 아쉬움인지, 분노인지, 슬픔인지 뭔지 모르는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화학적 작용을 하면서 올라오고는 한다. 그래, 그렇게 나는 청춘을 잃어버렸다.

오늘, 기사에 나온 김승효 선생은 ‘조현병’ 당사자였다. 아까 말했듯 조현병은 환청처럼 아무런 상관관계 없이 찾아오곤 한다. 그런데 김 선생은 모진 ‘고문’에 의해 조현병이 ‘만들어지게 됐다’고 기자는 생각한다. 고문의 고통이 지속되면 정신적으로 퇴행하게 되고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되고 어떤 소리에도 놀라게 되고 기자처럼 집밖을 나가지 못할 정도로 인간이 피폐해진다.

기자는 어쩌면 김 선생의 정신병적 ‘동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다만 나는 이국의 나라에서 두려움에 떨다가 병을 얻었지만 김 선생은 국가 폭력이라는 ‘망나니’의 칼질에 의해 병을 얻었다는 접근의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김 선생은 그렇게 20년을 정신병원을 전전했다. 기자는 두 번의 정신병원 입원을 경험했지만 지금은 그런대로 삶을 헤쳐나가고 있다. 그런데 김 선생은 국가 폭력이 만든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그 삶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한 많은 눈을 감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없는 죄를 만들어내는 ‘남산’에서 말이다. 그의 맑은 청춘의 영혼은 거기서 끝났다. 아니, 끝나버렸다.

김 선생은 2014년 자신의 형에게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받을 때 20일 동안 잠을 못 자고 물 고문과 전기 고문을 당해 허위자백했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이후 형이 국가를 상대로 재심을 청구해 마침내 2018년 무죄 재심 선고를 받았다. 한국 법원은 국가가 그에게 8억1100만 원의 형사 보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 돈이 그의 청춘을 보상해줄 수 있을까.

김 선생은 한국 정부가 두려워서 재판에 출석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현재의 한국 정부라기보다 과거의 한국 정부, 억압과 폭력, 훈육과 배제, 죽임과 죽음들. 시인 김지하가 ‘타는 목마름으로’ 외치던 민주주의와 배치되던 군사정권이 그의 의식에 원형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가 한국 땅을 밟아도 이제 아무도 잡아가지 않을 거지만 그의 공포의 원형은 그 땅에 대한 깊은 공포와 슬픔과 노여움으로 녹아 있을 것이다. 아프다.

오늘, 그렇게 누군가가 죽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자연적인 생의 마무리가 아닌 폭력에 의해 만들어진 정신적 질병으로 생의 대부분을 정신병원에서 지내야 했던 한 인간의 삶의 응어리가 그대로 남아 있는 ‘날 것’으로서의 죽음이었다.

김 선생은 재심 재판에 출석하지 않은 이유로 “다시는 한국에 가고 싶지 않아서”라고 답했다. 기자 역시 남미의 그 땅을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

인간의 정신을 훼손하는 모든 폭력은 단순히 국가 폭력뿐만 아니라 사회적 폭력의 장치들, 서로가 서로를 억압하는 모순된 사회의 구조들까지 모든 것을 포함한다. 민주주의는 대화이지만 폭력과 독재는 독백을 유도한다. 우리는 오랜 시간 독백의 시간을 건너왔다. 이제, 국가는 공적인 것(res publica)을 건축해 나가야 하며 인간 삶이 바라보는 세계관에 메스를 대서는 안 된다는 근본적 성찰을 가져야 할 때가 왔다.

그리하여 한 집단의 해방이 아닌 약자와 소수자의 집단적 해방이라는 층위가 깊고 넓은 영토로 확장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국가가 할 일이고 정치가 할 일이고 시민사회의 조직된 힘이 할 일이다. 또 그 해방 과정은 일국이 책임져야 할 문제가 아닌 다국적이고 집단적인 정치운동을 통해 건축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교토에서 눈을 감은 김 선생의 영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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