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드 인 아메리카] 슬픔과 그 잠재적 교훈
[매드 인 아메리카] 슬픔과 그 잠재적 교훈
  • 박준영
  • 승인 2021.02.07 1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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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여러 형태로 올 수 있다. 느끼는 방식도 여러 가지다. 가슴이 묵직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마치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피로처럼 몸 전체가 움직일 수 없게 되기도 한다. 가슴이나 배에 구멍이 난 것 같은 공허감, 전면적 결핍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심장이 아무런 이유 없이 고동치기도 한다. 전적인 방향 상실로 오기도 한다.

나는 어떤 이가 자기가 느끼는 슬픔을 자기 가슴에 천 마리의 박쥐가 앉아 있는 것 같다고 설명하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깊은 슬픔의 경험을 아주 잘 묘사한 것 같았다.

현재의 정신건강 패러다임 안에서는, 깊은 슬픔은 우울증이라는 큰 범주로 대충 간주되고, 생물의학 모델에 따라 하나의 기능 부조(malfunction)로 치료받는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이런 일을 잘 다루기 위해 일단 일들을 단순화부터 하는 통상적 관행 때문이다.

이런 패러다임은 슬픔의 가치를 충분한 정도로 이해하지 못하며, 슬픔이 제공하는 교훈들 또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슬픔에서 얻는 교훈이 있다는 시각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교훈에서 얻는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깊은 슬픔은 대개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무언가를 잃는 것을 포함한다. 친구를 잃는다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과 같은 상실에서 비롯되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런 객관적 상실과 같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깊은 슬픔은 우리가 소중이 여기는 어떤 가치를 잃는 경험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존엄이나 자유 같은 것. 또한 깊은 슬픔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어떤 사회적 환경이나 일자리, 또는 우리가 익숙했던 생활양식의 상실일 수도 있다.

깊은 슬픔은 불의를 느낀 것이 몇 년 누적된 뒤에야 겉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다른 감정과 마찬가지로, 깊은 슬픔은 어떤 이가 여러 해 동안 그 안에 살고 있는 한 시스템의 권력관계 안의 불균형과/또는 그 시스템 내부의 긴장을 그 사람이 풀 능력이 없을 경우에 쌓이기도 한다. 우리를 둘러싼 체제가 권력에 관해 아주 불균형해서 우리가 그런 관계를 바꾸기가 너무 어려울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 또한 슬픔으로 귀결될 수 있다.

일단 슬픔이 심각한 형태로 떠오르면, 생물의학 모델에 따라 처리되곤 한다. 그 이유는 다면적이다. 슬픔이 너무 크고 그 사람의 고통이 너무 커서 그 고통을 빨리 물리치는 데에 오직 약만 도움이 된다고 보이곤 한다.

시스템적 여건 때문에, 현재의 생물의학 패러다임은 이런 종류의 접근법과 뇌 속의 화학적 상황에 균형을 되찾는 데 초점을 둔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생물학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의 상호 영향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또한 어떤 이가 가치 있다고 보고 일상의 기능에서 의미를 느끼는 데 필요한 것을 잃을 때 함께 상실될 수 있는 어떤 것을 향한 지향성을 무시한다.

자연히 지금까지 충분히 시험되지 않은 여러 가지 감정 처리 방법이나 대안이 있다. 예를 들어, 슬픔은 전환의 한 과정으로 해석되고 탐색될 수 있다. 낡은 가치관이 어떻게 상실되고 어디에서 이런 것을 재발견하거나 새로운 것으로 대치될 수 있는지 탐색할 수 있다.

이는 슬픔 경험의 크기를 최소화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경험으로부터 느끼는 고통을 최소화하려는 것도 아니다. 환경에 따라서는 슬픔은 경험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오히려 이는 슬픔을 하나의 부조 현상으로만 축소시키는 접근법이 아닌, 슬픔을 이해하고 처리하는 더 건설적 방법이 있고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회복 기반인 슬픔 접근법들이 있고 슬픔의 과정 안에 내재된 교훈들을 고려하는 접근법도 있다. 슬픔의 심중함을 더 작고, 더 쉽게 다룰 수 있는 여러 조각으로 부수어낼 가능성이 있다. 이런 접근법들을 쓰면 깊은 슬픔이라는 감정의 강도를 더 쉽게 견딜 만하게 바꾸어낼 수 있다.

고려해야 할 또 다른 것은 기술적 합리성이라는 문화다. 우리는 산업주의 시대 이후로 이 문화 속에서 살아 왔다. 이 문화는 생산성을 지향하며, 우리에게 많은 진보를 가져다주었지만, 감정들을 다루지는 않는다. 이 문화는 오직 계산 가능성과 수단이라는 원칙만 다룬다. 그 의미인즉슨, 이 문화는 계측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하거나 이윤 추구 경제체제의 생산 라인에서처럼 무엇인가를 만드는 데 쓰일 수 있는 것만 다룬다는 것이다.

그런데 슬픔은 측정할 방법이 없고 무언가를 만드는 데 쓸 수도 없다. 따라서 뭔가 유용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게다가 깊은 슬픔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휴지기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다. 이 또한 현재의 체제에서는 생산적으로 보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 안에서, 슬픔이라는 것이 (나름)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충분한 이해가 결여돼 있다. 이러한 가치는 좀 더 상징적 접근법들, 예를 들어 실존주의 같은 것을 사용하면 이해된다. 슬픔은 어떤 이가 자신의 삶 안에서 객관적으로 가치 있다고 보는 무언가를 잃는 것과 연관될 수 있다. 슬픔은 한 사람으로 하여금 멈춰 쉬게 할 수 있다. 슬픔은 그 슬픔을 느끼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황을 재평가하게 만들 수 있다.

슬픔은 한 유기체가 더 이상 자신을 둘러싼 환경 속에서 존재를 유지하기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속도를 늦춰야 할 때 그럴 수 있게 만든다. 그 인간이 그 상황을 정리하고, 재편성, 재평가할 시간을 주는 것처럼 볼 수도 있다.

슬픔은 우리에게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지만 우리가 무시하기를 선택했던 불의에 대해 경고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리 내부에서 상처받거나 주의가 필요한 영역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무언가 애도가 필요한 영역을 가리킬 수도 있다. 현재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에서는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는 이 과정 안에 어떤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슬픔을 경험하는 것은 힘들 수 있지만, 겪고 나면 가치를 매길 수 없는 큰 교훈을 얻을 수 있는데, 슬픔을 억압하고 부정하고 묶어 두면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현재의 코로나19 팬데믹을 여러 감정 가운데 특히 슬픔을 탐색하라는 초대장으로 보면 어떨까. 강제되는 사회적 고립과 죽기까지 할 수 있는 치명적 질병의 전염이라는 위협 속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간 실존주의자들이 실존적 가정(existential givens)이라고 불러 온 우리의 인간 존재의 한계를 대면한다. 우리가 이 팬데믹 시대에 마주치는 이 실존적 가정의 일부는 우리가 몸으로 존재함, 우리의 홀로 있음, 우리라는 몸적 존재가 한 병에 굴복할 수 있다는 잠재성, 죽음의 불가피성 등이다. 이러한 것들을 만나는 가운데 동반되는 슬픔이라는 개념을 생각할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에 둘러싸여 겪는 슬픔을 우리가 다룰 수밖에 없게 되는 그 정도는 쇼크 수준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의 아주 중심에 있는 깊은 감정들의 존재에 집단적으로는 익숙하지 않다. 평가와 계측성에 바탕을 두고 건설된 한 사회의 기능 방식에서는 현재의 팬데믹에 동반하는 감정들을 다루는 데 그리 많은 방법이 없다.

우리는 이 순간을 이런 종류의 사회적 기능 방식을 평가할 기회로 삼아도 좋다. 생산과 이윤에만 초점을 두는 이런 사회에 계속 살고자 하는가? 이런 사회적 기능 방식은 집단적 차원에서 우리 경험의 중심에 이렇게 강한 감정들이 폭풍처럼 되몰아치는 상황에서는 아무런 기능도 못하고 마비될 수 있다.

이 문제는 각 개인들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남겨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팬데믹 중에는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바 사회의 기능방식이라는 영역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이러한 원칙들을 재평가할 드문 기회가 될 것이다.

개인 차원에서는, 우리는 이러한 슬픔과의 만남을 이용하여 의미를 추구하고 찾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슬픔을 슬픔에 담긴 모든 깊이까지 다 대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경험을 정리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전환의 과정, 오랫동안 친숙했던 믿음, 가치관, 방식들을 떨쳐내는 과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을 애도하며 떠나보내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는데 그 또한 하나의 과정이다.

우리가 세상과 맺는 관계와 우리 자신을 새로이 건설할 필요가 생길 수도 있다. 이는 개인 차원에서 더욱 그렇지만 집단적, 사회적 차원에서도 그러한데, 특히 코로나19라는 조건 속에 있는 지금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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