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회 인프라 없이 국가책임제 도입되면 대부분 강제입원으로 이어질 것”
“지역사회 인프라 없이 국가책임제 도입되면 대부분 강제입원으로 이어질 것”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1.05.24 23: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송파정신장애동료지원센터 등 단체들 ‘응급시스템 구축’ 성명서 발표
국가책임제 도입시 치료환경 개선과 지역사회 인프라 구축에 중점둬야

지난 5일 경기 남양주시에서 발생한 정신장애인 당사자에 의한 친부 살해 사건과 관련해 정신장애 인권단체들이 공동으로 국가책임제를 요청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다만 국가책임제 도입 시 중점은 강제입원이 아닌 치료 환경 개선과 지역사회 인프라 구축에 있다는 점을 단체들은 강조했다.

24일 송파정신장애동료지원센터 등 11개 단체들은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정신장애 당사자 응급시스템 및 지역사회 인프라 구축’ 성명서를 발표했다.

어린이날이었던 지난 5일, 경기 남양주시에 사는 조현병 당사자인 A(29)씨가 아버지 B(60) 씨를 둔기로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A씨는 수차례 입·퇴원을 반복했다. 지난 4월 B씨는 아들의 협박과 폭행이 계속되자 신변에 위협을 느껴 경찰서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A씨가 “잠시 아버지랑 싸웠을 뿐”이라고 말했고 경찰은 돌아갔다.

B씨는 아버지가 자신을 강제입원시켰다는 이유로 오랜 기간 아버지를 살해하겠다는 낙서를 방 벽에 써두는 등 아버지를 심리적으로 위축시켰다. B씨는 아들의 폭행을 피해 자신의 부모님이 사는 집으로 가 생활했다. 그리고 어린이날 A씨에게 맛있는 걸 사주겠다며 집을 찾았다가 변을 당했다.

사건 이후 강제입원의 문제, 지역사회 정신 응급 시스템의 미작동 등 고질적인 문제들이 수면 위로 다시 올라왔다.

송파정신장애동료지원센터 등 단체들은 “(이 사건은) 응급 시스템이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하는 급성기 문제를 당사자와 가족에 책임지우고 있다”며 “부모 부양·치매 등 국가책임제가 도입되고 있는 가운데 정신질환자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개인과 가족에게 전가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우리나라의 급성기 위기 대응은 강박, 입원, 약물 투여를 통해 사람을 진압하는 방식”이라며 “치료 환경은 강압적이고 비인권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이 같은 치료를 경험한 당사자들은 인권 침해를 경험할 뿐 아니라 퇴원 후 오히려 악화되는 현상을 불러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단체들은 정신 응급 시스템을 당장 국가책임제로 도입할 경우 당사자의 응급 상황 발생 시 비인권적인 치료 시스템에 당사자를 가두는 강제입원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단체들은 “당사자 인권 보장을 위해서 국가책임제는 정신질환 치료 환경 개선, 공공 응급 병상 확보와 이송 체계 구축, 지역사회 중심의 복지서비스 체계 구축을 목표로 시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응급 환자를 폐쇄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사회 분위기와 병원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며 “특별한 대안이 없어 입원하게 되는 게 아니라 지역사회 인프라를 구축해 병원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먼저 정착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2018년 정신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정신의료기관에서 퇴원하지 않는 이유로 ‘퇴원 후 살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24.1%로 가장 높았다. 같은 해 국립정신건강센터 조사에 따르면 지역사회 재활 기관을 이용하는 등록 정신장애인 중 주거가 불안정한 경우는 전체 이용자의 12.3%를 차지했다.

단체들은 “이는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지역사회 기반이 부족하다는 걸 의미한다”며 “위의 조사는 정신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결과로써 실제 정신적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인원을 포함하면 규모는 더 클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또 “퇴원, 재활 시설 이용 시기에도 주거 취약계층으로 나타나는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혼란을 느낄 급성기에는 어디로 갈 수 있을 것인지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어 “주거 시설, 쉼터, 취업 등 당사자가 지역사회에서 회복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 인프라가 많이 구축돼야 한다”며 “병원에 입원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선택지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9년 전체 인구의 15세 이상 고용률은 61.5%인데 반해 중증장애인 고용률은 20.9%였다. 이 중증장애의 장애유형별 고용률을 보면 안면장애(59.0%), 지체장애(44.3%), 간장애(44.0%)로 나타났다. 정신장애는 11.6%로 장애 유형 중 가장 낮은 수치를 보였다.

반면 정신장애인의 국민기초생활수급률은 54.7%로 이는 전체 장애인의 수급률인 15%보다 4배 높다.

단체들은 “정신장애인은 장애 유형 중 생활 수준이 유독 열악하다”며 “당사자가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제도를 마련하지 못할지언정 국가는 당사자의 급성기 발현 시 위험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강제입원을 시키는 방법만을 강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우리는 회복을 위한 다양한 영역의 선택권을 원한다”며 “쉼터, 주거 시설, 취업, 동료상담 등 당사자 개인의 특성에 맞는 선택지와 기본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지역사회 인프라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국가는 응급입원 외에 지역사회 인프라를 구축해 당사자가 지역사회에서 정착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며 “치료 환경 개선을 기반으로 한 응급 시스템을 운영해 이러한 사건들이 더는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성명은 송파정신장애동료지원센터를 비롯해 광주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경남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동대문정신장애동료지원센터, 사회적협동조합 마인드포스트, 희망바라기,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서초열린세상, 정신건강사회복지혁신연대, 한국조현병회복협회(심지회), 한울정신건강복지재단, 한국정신장애인가족지원활동가협회가 참여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