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 칼럼] 노희정 “회복을 규정짓지 말라...우리는 모두 다르다”
[당사자 칼럼] 노희정 “회복을 규정짓지 말라...우리는 모두 다르다”
  • 노희정
  • 승인 2021.06.27 21: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긍정이라는 무조건적 낙관과 희망에 속지 말아야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긍정의 정의
고통을 수용하고 영혼을 보듬을 때 살아갈 용기 생겨
인생의 희망을 가지려면 성숙하고 승화된 영혼이 돼야

‘스톡테일 패러독스’란 말이 있다.

미국 군인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다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갇힌 용사들은 크리스마스가 되면 풀려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가 되었어도 그들은 풀려나지 못했다. 다시 그들은 부활절이 되면 풀려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부활절이 지나고 추수감사절이 지나도 풀려나지 못했다.

또다시 크리스마스가 돌아왔으나 결국 풀려나지 못하자 그들 중의 대부분은 사망했다.

스톡테일 장군.
스톡테일 장군.

이들 중에 살아남은 스톡테일은 훗날 당신은 어떻게 죽지 않고 생존할 수 있었느냐고 묻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처음 크리스마스가 되면 자유의 몸이 될 것이라고 믿었으나 좌절되었어도 그들은 계속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믿었지요. 그러나 그렇게 희망을 가지고 간절히 기다리던 병사들은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병사들 중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그토록 막연하게 긍정적인 믿음에 매달리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역설적인 대답이었지만 이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토굴에 갇혀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던 상황에서 이들을 죽게 만든 것은 오히려 희망과 긍정이었다.

우리는 어떠한 시련이 닥치고 어려운 상황에 놓였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긍정이란 무조건적인 낙관과 희망이 아니라고 채정호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이야기한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긍정의 사전적 정의이며 객관적으로 힘들고 위기에 처한 상황일 때 가져야 한다고 믿는 긍정의 메시지는 왜곡이며 더 나아가 망상이라고까지 말한다.

즉 이때의 무조건적인 긍정은 짝퉁 명품과도 같은 짝퉁 긍정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에 걸린 아들을 가진 부모가 “우리 아이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라고 이야기하는 대신 아들이 ADHD로 힘들어하는 것을 인정하고 그 아들의 힘든 상황을 공감하고 위로하는 것이 진정한 긍정이라고 해석했다.

물론 절망과 낙담에 빠지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의 결론은 실재적이고 더 도움이 되는 긍정은 고통스럽고 벅찬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며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끝까지 살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처음 정신질환이라는 진단을 받고 우리는 혼돈과 충격에 빠진다. 하지만 치료하고 노력하면 완치할 수 있다고도 믿는다. 그러나 병이 만성적으로 이어져 나아지지 않고 수없이 입·퇴원을 반복하며 어쩌면 평생 약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긍정적으로 희망을 가지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때 필요한 것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똑바로 바라보며 수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처 입은 나 자신의 영혼을 보듬어 안아줘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긴다.

버지니아 울프.
버지니아 울프.

영국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오랜 우울증을 앓다가 결국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자살했다. 로댕의 제자이자 모델이며 연인이었던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은 로댕에게 버림받자 자신의 작품들을 부숴버리고 로댕의 집에 횃불을 던지는 광기에 결국 정신 병원에 갇혀 생을 마쳤다.

독일의 작곡가 슈만은 심한 환청에 시달리다 정신 병원에 입원해서 음악조차 듣지 못하자 먹는 것을 거부하다 굶어 죽었다.

그들은 결국 자신의 정신질환을 극복하지 못하고 회복에 실패한 사람들일까?

버지니아 울프는 에세이 ‘자기만의 방’을 발표하며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선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여성학 연구와 작가의 존재 의미를 각인시켰고 까미유 끌로델은 사랑에 인생의 모든 것을 바치며 로댕의 작품보다 더 강한 울림을 주는 조각들을 남겼다. 슈만은 가장 심한 환청에 시달리던 시기에 그의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받는 교향곡을 작곡했다.

이들의 강렬하고 섬세한 자질이 그들을 병으로 이끌었으나 바로 자신들의 정신질환은 위대한 예술 작품을 만들어낸 요소였다.

세상에서 살아가지 못했고 병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들은 정신질환을 예술로 승화시킨 승리자다. 정신질환에 맞서 이겨낸 회복자이다.

20대 초반에 유명한 미술 작품 절규를 그린 뭉크는 자신의 병을 인지하고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 정신병원에서 그는 자신처럼 정신질환으로 고통받고 있으나 훌륭한 그림을 그려낸 화가 한 명을 알게 된다. 그는 바로 당시 잘 알려지지도 않았던 빈센트 반 고흐였다.

뭉크.
뭉크.

그의 그림을 본 뭉크는 고흐의 그림에서 빛과 찬란함을 보았다. 자신은 어두움만을 보고 있을 때 빈센트 반 고흐는 병에 고통받으면서도 밝음을 바라봤다는 것을 발견한 뭉크는 강한 깨달음을 얻는다.

20대에 절규하는 그림들을 그렸던 뭉크는 생의 말년에는 아름답게 환상적으로 빛나는 그림 한 점을 남긴다. 노르웨이 왕립 미술관에 걸려있는 뭉크 말년의 이 작품은 그를 노르웨이의 국민 화가로 등극시켰다. 뭉크의 대표적인 작품은 결코 절규가 아니었다.

뭉크는 정신질환으로 자살하지도 않았고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지도 않았다. 완연히 달라진 그의 그림은 그가 병에서 치유되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철저히 사회와 사람들에게서 고립되어 살았다. 스스로 외곽에 집을 짓고 그 집에 은둔하며 그림만 그렸다. 작품 소재가 없어서 많은 자화상을 남긴 것도 모델과 소재를 얻을 수 없어서였다.

같은 당사자를 통해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지만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못했고 은둔형 삶을 선택했다.

과연 뭉크는 정신질환에서 회복한 것이었을까? 정신질환에서 회복하지 못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하는 환자였을까?

정신질환은 예측하지 못하고 막지 못하는 자연재해처럼 찾아온다. 같은 병명의 환자라도 본인이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윤봉길 의사는 사람은 이상을 이루기 위해 산다고 말했으나 병으로 인해 수없이 인생의 항로를 바꿔야 하고 인생의 의미를 다르게 규정지어야 할 때에 이상이란 단어는 너무나 낯설고 멀게만 느껴진다.

정신질환은 고통의 긴 여정이다. 고통이란 결코 인생에서 사라질 수 없는 것이기에 이제는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다시는 고통스러운 상황이 오지 않으리라고 단언 지을 수도 없다.

벅차고 위기가 찾아오는 힘든 상황 속에서 긍정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고 낙관과 희망을 가지려면 참으로 성숙하고 승화된 영혼이 되어야 한다. 강해야 하고 고통에 무뎌져야 한다.

고흐 '파이프를 문 자화상'
고흐 '파이프를 문 자화상'

이때에 고통을, 고통스러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고통스럽다고 인정하는 과정이 없으면 고통을 다르게 받아들이는 과정에 다다를 수 없다.

사람은 제각기 다른 삶을 사는 주관적인 존재다. 정체성이 다르듯 살아가며 경험하는 것도 마주하게 되는 것도 다르다. 성공의 경험도 다르고 실패의 경험도 다르며 인생에서 얻은 것과 잃은 것도 다르다.

정신질환의 병증도 개인마다 다르고 치유의 요건이 될 수 있는 서포트도 각기 다르며 경과와 재발과 입원의 횟수도 다르다. 그렇기에 긍정의 퍼센테이지도 낙관의 퍼센테이지도 모두 같을 수 없다.

정신질환에 걸리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지만 정신질환에서 회복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이론은 이러한 인간의 주관성과 각기 다른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인지를 담고 있을까?

당사자 언론 <마인드포스트>의 박종언 편집국장은 회복의 정의는 사람마다 제각기 모두 다르다는 점을 언급했다.

회복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는 그의 이야기는 진정 회복을 갈망하는 상처 입은 이들에게 그 어떤 회복의 강의나 교육보다 더 큰 위로가 되어준다.

회복을 규정짓지 말자.

나는 내 병에 졌다고, 너무 고통스러워 이젠 그만하고 싶다고 느꼈던 것도 나이고,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으니 살아가야 한다고 깨닫던 것도 나이며, 바람을 맞으며 햇빛 속을 걸어갈 수 있음에 감사하는 것도 나이듯, 우리에겐 모두 회복할 수 있는 회복탄력성을 제각기 다른 곳에 간직하고 있으니까.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