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관용을 요구하지 않는다...정의와 평등에 관해 얘기하려는 것”
“우리는 관용을 요구하지 않는다...정의와 평등에 관해 얘기하려는 것”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1.06.28 22: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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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서 아버지가 조현병 딸 살해 사건에 정신장애계 ‘국가 책임 방기’
정신과 응급 시스템 부재로 사건 발생...사회는 당사자와 가족만 비난
정신병원 전수조사해 장기입원자들 지역사회로 나오게 해야

경북 포항에서 조현병 딸(40대)을 살해한 혐의로 아버지 A(78) 씨가 기소됐다. A씨는 딸을 살해한 이유로 “나와 아내가 죽으면 조현병 증세가 악화 중인 딸이 손주에게 해를 끼칠 것 같았다”로 진술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 사건은 정신장애인을 돌보는 가족의 피폐한 현실을 민낯으로 드러냈다는 지적이다. 정신장애인 당사자 역시 사회문화적 차별과 함께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악순환을 불러오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사건은 지난 4월 20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A씨는 포항 자택에서 함께 지내던 딸을 살해했다. A씨는 딸의 목을 졸라 숨지게 한 뒤 마대 자루에 숨진 딸을 담아 야산에 유기하려다 미수에 거쳤다. 미리 구덩이까지 파 뒀지만 노부부가 시신을 옮기는 게 어려웠기 때문이다.

포항 사건은 지역사회 응급 시스템의 부재가 만든 비극

A씨는 장례지도사(장의사)를 불러 딸을 매장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장례지도사는 장례 절차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사망진단서가 필요하며 변사의 경우 경찰의 조사를 통한 사인(死因) 규명이 필수적이라고 알렸다.

A씨는 경찰에 사망 신고를 하며 “자고 일어나니 딸이 죽어 있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경찰은 시신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목이 졸린 흔적을 발견하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부검을 의뢰했다. 부검 결과 사인이 질식사라는 통보가 나왔다.

A씨는 경찰의 추궁하자 결국 “손주의 앞날이 걱정돼 (딸을) 살해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사건은 정신장애인 당사자와 가족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 피폐해지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었다는 의견이 많다. 당사자와 가족에 대한 국가 지원이 전무한 상황에 대한 비판도 일었다.

이에 대해 정신장애와인권 파도손 등 정신장애 인권 단체들은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정하 파도손 대표는 “정신보건법이 지난 2016년 개정돼 정신건강복지법이 됐지만 정신장애인 당사자와 가족의 삶은 더 나빠지기만 했다”며 “개정 법은 입원 조항은 까다로워졌지만 응급 시스템의 부재로 인해 지역사회에서 참혹한 일들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정신장애인에 대한 혐오와 낙인은 더 심해졌다”며 “이제는 정신장애인이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히고 조현병 환자는 살인자의 대명사가 됐다”고 토로했다.

기승전 정신병원...그 폭압적 병원 환경은 철저하게 감춰져와

이어 “법이 제대로 돼 있지 않고 국가가 정신장애인을 지원하지 않으면서 정신병원만이 선택지 없이 일방적으로 강요됐기 때문”이라며 “정신병원에서 일어난 수많은 학대와 고문을, 수용소와 다를 바 없는 그 환경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감춰져 왔다”고 지적했다.

이 대표는 특히 국가와 보건복지부가 지역사회 인프라 구성에서 가족과 당사자에게 직접 지원되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 공급자 중심으로 인프라를 확산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며 이를 비판했다.

그는 “전국 정신병원의 장기 입원자들을 전수조사해 이들이 지역사회로 나올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지만 철저하게 묵살당했다”며 “정신병원이라는 수용소를 없앨 생각을 하지 않고 병동 내 침대 간격을 넓히려고만 하는데 이는 국가와 사회가 탈원화의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운 부분”이라고 밝혔다.

특히 과거 정신보건법 제24조는 보호자가 정신장애인 당사자를 정신병원에 강제입원 시킬 수 있는 독소 조항으로 작동했다는 지적이다. 자신의 자유의지가 아닌 가족이 강제입원을 시켰다는 사실에 대해 당사자는 분노하게 되고 이후 가족과의 관계가 급속히 나빠졌다는 게 이 대표의 설명이다. 지역사회 인프라의 고민 없이 정신병원이라는 열악한 치료 환경만을 유일한 해결책으로 만들어왔다는 데에 대한 비판이다.

이 대표는 “강제입원이 해답이 아니라 당사자가 아플 때 바로 지역사회 지원 체계가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며 “진정한 응급체계는 당사자가 건강을 회복하고 삶을 회복하게 하는 좋은 치료환경이 답이며 쟁점”이라고 말했다.

진정한 응급체계는 당사자 회복 지원하는 좋은 치료 환경이어야

그는 “보건복지부는 탈원화 약속을 지키고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수많은 장기 입원 환자들을 개개인별로 전수조사해 지역사회로 나올 수 있게 인프라를 갖추라”며 “그들이 지역사회에서 남은 여생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대한민국 국가가 당사자들에게 속죄하는 길”이라고 비판했다.

정신장애인 당사자 예술단체 광장의 박목우 활동가는 “포항 사건에서 손자를 구하기 위해 딸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부모의 발언은 들렸지만, 그래서 정신장애인을 강제입원 시켜야 한다는 국가의 치안의 목소리는 들렸지만 정작 들려야 할 정신장애인 당사자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던가”라고 비판했다.

그는 “그녀는 침묵하는 존재로 남아 있다”며 “그녀는 공론장에서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며 그녀를 둘러싼 부모와 치안의 논리만이 공론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말했다.

박 활동가는 “우리는 우리를 관용해 달라고 기존 사회에게 요구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정의와 평등에 관한 것이라 이야기한다”고 전했다.

이어 “단순한 심정적 이해를 넘어서 제도화를 요구하는 것”이라며 “오랫동안 들리지 않았던 정신장애인 당사자의 목소리에 응답해 온 이들이 요구한 것이자, 시대의 마지막 게토(Ghetto)로 남아 있는 정신장애인의 삶에 대한 사회의 응답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주장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정신장애인에 대한 당신들의 비난과 차별과 폭력을 거두고 우리의 말을 들으라”며 “우리는 침묵당하는 정신장애인이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그날까지 싸울 것이고 그것이 죽어간 당사자들과 고통받는 당사자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주상현 보건의료노조 서울시정신보건지부장은 “어둠 속에 있는 정신장애 당사자들, 피로 죽어간 당사자들이 있는데 의사들은 치료받으면 나을 수 있다고 말한다”며 “이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제대를 치료를 못 받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하는데 과연 진실일까”라고 의문을 표했다.

시대의 게토로 남은 정신장애인 삶에 사회가 응답해야

그는 “어느 누구도 (이 죽음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서울시정신보건지부는 파도손과 연맹 단체와 함께 투쟁이 승리할 수 있도록 국회 앞을 계속 지키겠다”고 말했다.

이어 연맹 단체들은 요구안으로 정신장애인의 회복을 지원하는 동료지원체계, 의료·재활·복지 체계와 동료지원가 제도의 도입을 촉구했다. 또 지역사회 당사자와 가족을 상담하고 지원할 수 있는 정신장애인 역량강화센터를 전국적으로 도입할 것, 급성기 당사자가 쉴 수 있는 위기쉼터를 설치할 것을 요구했다. 이어 응급 상황 시 좋은 치료를 받고 퇴원할 수 있는 시스템의 마련, 지자체가 정신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안전하게 치료받고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의 조성, 만성질환자의 지역사회 지원 체계 구성 등을 요구했다.

연맹 단체들은 오는 29일부터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국회 앞에서 ‘정신장애인 기본법 제정’을 위한 릴레이 시위에 돌입한다고 밝혔다.

이번 기자회견에는 파도손을 비롯해 경남정신장애와인권 ‘온새미로’, 광장, 대전세종당사자모임,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 설악어우러기, 수원마음사랑, 청주 회복의등대, 한국정신장애인협회, 한국조현병회복협회(심지회)가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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