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정신건강시스템을 지켜야 하는 건 이탈리아만을 위한 문제가 아니다"
[번역]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정신건강시스템을 지켜야 하는 건 이탈리아만을 위한 문제가 아니다"
  • 송승연 기자
  • 승인 2021.07.26 1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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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는 1978년 정신보건 개혁법(법률 180)이 통과된 후 많은 정신의료기관이 폐쇄되고, 지역사회 정신건강시스템이 잘 구축된 국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탈리아의 혁명이 시작되고 완성된 대표적인 도시는 바로 ‘트리에스테’이다. 하지만 최근 트리에스테 정신건강시스템을 공격하고 해체하려 하는 정치적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정신과의사 앨런 프랜시스(Allen Frances) 박사가 저널 란셋에 글을 기고하였다. 미국 듀크대학 명예교수로 있는 앨런 프랜시스 박사는 참고로 굉장히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데, 그는 정신의학영역 내 주류 중에 주류였으며, 전 세계 정신과에 비치되어 진단의 교본으로 사용되는 DSM(정신장애진단통계편람) 4판(DSM-IV)을 작성하는 팀을 조직하고 이끌었던 경력이 있다. 하지만 그 이후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정신 의학계의 DSM에 대한 맹신, 의료 현장에서의 부주의한 진단, 제약 산업의 질병 장사 등이 결합하여 진단 인플레이션과 거짓된 정신병의 유행을 초래하는 현실을 실제 의료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그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주류에 맞서 지속적인 저항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국내에 번역된 앨런 프랜시스의 주요 저서로는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사이언스북스, 2014)’이 있다.
(c) thelancet
(c) thelancet

트리에스테(Trieste·이탈리아 북동부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주의 주도) 정신건강 서비스 모델은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해 지역사회 정신의학의 국제적 표준으로 인정받았다. 트리에스테 모델은 국제적으로 많은 국가들의 프로그램에 영감을 주었으며, 전 세계의 많은 임상의, 당사자, 가족 등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 북부 도시인 트리에스테는 현재 민영화를 추진하는 우파 정부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으며, 정치적으로 좌파 정신의학이라는 오해를 받으면서 해체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다. 이탈리아의 이러한 상황은 1980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미국의 지역사회 정신의학을 해체시켰던 고통스런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트리에스테 모델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트리에스테 모델이 너무 이상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믿기 어려울 수도 있다.

입원 치료도 거의 없고, 강제적 치료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소위 중증이며 만성적인 상태에 있는 환자들에게 어떤 정신건강 시스템이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나 또한 한 때 (트리에스테 모델에 대한) 가장 깊은 회의론자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섯 차례 트리에스테를 방문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확신하게 됐다. 트리에스테는 정신적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당사자가 되기에 세계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는 것을 말이다.

반면에 미국에서 교도소와 거리에 있는 당사자들을 만나게 되면서, 미국이 당사자가 되기에 세계에서 가장 최악의 장소 중 하나가 될 수도 있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트리에스테에서 제대로 된 대우를 받고 당사자들이 확연히 나아지는 것을 보면서 놀랐으며, 반대로 미국에서 방치로 인해 당사자들이 얼마나 더 큰 고통을 받는지를 보면서 놀라게 됐다.

트리에스테의 접근방식은 4가지 원칙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1) 당사자 또한 존엄과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시민이다.

2) 도시에서 이루어지는 일상 활동에 당사자들을 포함시키는 것은 중요한 치료적 가치를 지닌다.

3) 당사자를 다정하게 맞이해 줄 수 있는 포용적인 사회적 구조 형성을 위해 지역사회와 협력해야 한다.

4) 우리가 당사자들의 자유를 보장하고 그들의 강점이 발휘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할 때 당사자들의 능률이 가장 높아진다.

트리에스테는 대인관계, 가족 참여, 생활 환경 개선, 일하고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기회 등에 중점을 두고 정신건강을 증진시킨다. 배려와 따뜻함이 두드러지는 트리에스테 시스템에서 강제적 치료, 격리, 폐쇄 공간 등은 어느새 사라진다.

이와 달리,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방임은 급성기를 만성화로 변화시키고 증상의 악화를 불러오며, 당사자의 의기소침을 촉진시킨다.

트리에스테에는 예전에 24만 명을 수용하는 1천200개의 정신의료기관이 있었지만, 현재는 6개의 종합병원 정신과 병동과 24시간 이용 가능한 지역사회 정신건강센터 내 30개 병상만을 가지고 있다. 트리에스테의 지역사회 서비스가 매우 잘 구축됐기 때문에 탈시설화는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의 경우 지역사회 서비스가 매우 부족했기 때문에 탈시설화가 비참하게 실패했다. 지난 60년 동안 미국 내 정신과 병상 90% 정도가 폐쇄됐는데, 이들은 지역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약 60만 명의 당사자가 교도소로 수감되거나 노숙인이 되는 등 국가적인 수치로 이어졌다.

탈시설화가 잘 진행되기 위해서는 정신과 병상이 ‘폐쇄’되는 것과 동시에 사회에서의 ‘개방’이 일어나야 한다. 예를 들어 트리에스테는 정신병원을 없앰과 동시에 지역사회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공하였다.

*지원주택

*24시간 운영되는 지역사회 정신건강센터와 위기 대응

*재가 지원 서비스

*사교 클럽

*트리에스테 정신건강 시스템에 의해 창출되고 운영되는 회사나 사업체의 유급 일자리

*여가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 제공

*경제적 지원을 받는데 도움이 되는 사회 서비스

또한 지역사회 정신건강센터는 창의적이고 디자인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는 환경 속에서 당사자의 가족들과 친구들 또한 따뜻하게 맞이했다. 그리고 즐거운 클럽 같은 분위기가 보편화됐다.

만약 당신이 지역사회 센터에 간다면 일반적으로 누가 직원인지, 당사자인지, 가족인지, 방문객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가 활동과 즐거움이 삶의 중요한 부분임을 인식하면서 지역사회 센터는 파티, 여행, 운동, 예술활동 및 연극 워크샵 등을 주최한다. 트리에스테 모델은 가치, 안전성, 실용성, 지역사회 통합, 그리고 비용 효과성 등을 입증했다.

지역사회 서비스는 이용자를 따라 집, 병원, 너싱홈, 교도소, 사법병동까지 이어진다. 가정 방문 상담원은 당사자의 생활 환경을 파악하고, 당사자와 가족, 이웃과의 갈등을 중재하고, 약물치료를 관리하고, 필요에 따라 관공서나 직장에 동행하기도 한다.

믿기 힘든 아이러니는 미국이 가장 먼저 최고의 지역사회 정신의학을 개척했다는 것이고, 실제로 트리에스테는 이 당시 미국을 모델로 삼았다는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0년 당선된 후 강력한 개인적 동기로 인해 정신질환자들의 어려움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실제 케네디는 여동생 로즈메리가 당사자로서 잔혹한 치료를 받았던 것을 경험했다.

케네디는 지역사회정신건강센터법(Community Mental Health Centers Act)을 통해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정신의료기관에서 퇴원하는 환자들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모든 주 대상으로 프로그램 예산을 지원했다.

트리에스테 모델 창시자 프랑코 바살리아. (c)L'Espresso.
트리에스테 모델 창시자 프랑코 바살리아. (c)L'Espresso.

이처럼 탈시설화 과정에서 정신병원 폐쇄로 인해 발생하게 된 예산(가용 예산)은 지역사회 내 주거와 치료를 제공하는데 사용됐다. 이는 1969년 미국에서 탈시설화와 지역사회 정신의학을 공부하며 6개월을 보낸 프랑코 바자리아(트리에스테 모델 창시자)에게 영감을 주었다.

기이한 운명의 반전은 이전에 최고의 지역사회 정신의학이 있었던 미국은 붕괴되었다는 것이며, 이제 트리에스테가 세계 최고의 지역사회 정신의학의 꽃을 피웠다는 것이다. 레이건은 케네디가 만든 지역사회정신건강센터에 대한 예산 지원을 중단했고 결국 지역사회 센터는 폐쇄되거나 민영화됐으며 비보험 상태에 있거나 치료 비용이 많이 소요되는 중증 정신질환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역사회 정신의학은 비용 효율적이며, 오히려 예산을 중단하는 것이 매우 비싼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 밝혀졌다. 정신적 어려움을 경험하는 당사자를 (아무런 지역사회 서비스 없이) 방치하는 것은 경찰, 교도소, 병원, 응급실, 너싱홈, 노숙인을 위한 서비스 비용 등을 크게 증가시켰다. 당사자가 겪고 있는 고통을 무시하는 것은 비인간적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결과 또한 가져온다.

트리에스테를 지켜야 하는 것은 단지 이탈리아만을 위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훌륭한 지역사회 정신건강시스템을 지키는 것이며, 전 세계 당사자들을 위한 지역사회 주거를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 트리에스테 정신건강시스템을 지키기 위한 청원 사이트

(아래로 접속하여 서명에 힘을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https://www.change.org/p/international-mental-health-collaborating-network-save-trieste-s-mental-health-system?redirect=false

 

기사 출처: https://www.thelancet.com/journals/lanpsy/article/PIIS2215-0366(21)00252-2/fulltext?fbclid=IwAR0csAm2lNBtnu53Tb4kVwVw_NMhiYYOuPxcQ4lrrNaX2WVhZbGkqHfT9X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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